감사의 자라를 확장하자

감사의 자리를 확장하자(고후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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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사의 자리가 정말 힘들게 느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너무나 많은 큰 상처를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은 너무나 나약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랑을 하는 자리에서도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상처의 자리에 있는 중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얘기가 있습니다. 「10센티미터 자가 있는데 이 자는 무엇이든 그 길이를 마구 재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넌 길이가 5.4센티미터야 넌 키가 9.8센티미터 밖에 안돼. 10센티미터도 안되는 것들이 까불고 있어.”라고 으스대며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울이 그것을 보고 자를 무조건 저울 위에 올려 놓고는 “겨우 5그램이군. 짜식! 아주 가벼운 놈이네. 비켜! 상대도 하기 싫으니까!” 저울은 더 이상 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휙 가버렸습니다. 10센티미터 자는 저울이 자기 멋대로 평가하는 것이 몹시 기분이 나빠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 또한 남들을 함부로 평가하여 많은 상처를 준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치료가 되는 길은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나야 하는데 그 새 살이 돋아나는 동안에 겪어야 하는 인생의 겨울이 너무나 길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자신의 몸에 가지고 있는 부끄러운 질병 때문에 너무나 괴로워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바울의 자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자리는 감사의 자리를 확장해 나가는 지혜를 주신 자리입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이 감사의 자리를 확장하여 새 살이 돋아나는 봄철을 만난 성도로 살아 갑시다.

1. 자신을 자랑하는 성도가 됩시다(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하여 타락한 사람들에게 무서우리만큼 집착하시는 자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강렬한 하나님의 자리를 이렇게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1)”라고 하신 자리입니다. 성경 전체는 이스라엘 민족의 타락상과 그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라는 도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을 괴롭히는 이방 나라인데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일방적으로 사랑하신다고 하시며 그 사람들을 세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 가라고 하시는 가장 본질적인 자리는 바로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리에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관계성의 축복입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과 함께 사는 공동체 속에서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사람처럼 사랑의 자리를 강요할 때가 있어서 이것이 관계 속에서 큰 상처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차이는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임을 알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해 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포기하고 싶고, 낙심하여 모든 것을 닫아 버리며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믿음의 사람도 깨닫기가 쉽지 않은 것을 본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것이 사람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자리에 있는 인간의 삶속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약함을 주시고 그 약함을 찾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케 한 것이 본문의 사건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것이 바로 자신의 무너진 자리를 자랑하게 세워 주신 것입니다. 나도 나를 버리고 싶은데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해 주시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것처럼 더 큰 감사의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명예나 권세, 물질보다 나 자신이 있으므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때 내가 있는 세상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감사의 자리를 넓혀서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랑하는 성도가 됩시다.

2. 약한 자리에서도 자랑거리가 있는 성도로 살아 갑시다(5,9).

   세상이 달려가는 방향과 그 목표는 한결같이 더 힘있고, 더 강해지는 것을 위함인 것입니다. 그 대열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이 생존 경쟁의 자리입니다. 이런 인간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역설적인 자리를 외치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라고 하신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가장 중요한 자리는 얻는 것과 놓치는 것, 잃는 것과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인간 삶에 우선이 되는 것은 얻는 것이요 가장 큰 것은 찾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유익된 것이 있는가 하면 무익한 것도 있기에 유익된 것에 나를 세워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본적인 상식의 자리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자리와 하나님의 자리를 알고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자리란 평생을 몸부림치며 연구하면서 살아와도 사람이 터득한 것은 너무나 작은 조각 한덩이 같은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작은 덩이 하나 붙들고 큰 명예를 획득하고,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의 자리에서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일생을 통해 깨달아 이루어 놓은 자리가 미래의 인간에게 무서운 무기가 되는 것을 인간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이루어 놓은 자리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은 잠시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인간의 자리에서 열어주신 자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고 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약한 자리에서도 자랑거리가 있게 하시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사람에게 죽임을 당해 무덤에 내려가신 자리에서 부활 하신 예수님의 자리이며 “나를 위해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본문은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리에 세워진 사도 바울이 자신의 약함 때문에 닫혀져서 세상을 막아 버린 것을 활짝 열어 버린 사건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힘들게 한 약함의 자리에서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유는 나는 약할찌라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내가 받은 축복은 세상의 것과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감사의 자리가 확장되고 자신의 삶을 크게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축복은 나를 작아지게 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큰 자로 담대하게 살아가게 합니다.

3. 목적이 있는 삶에는 감사의 자리가 확장 됩니다(10).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자리에 있는 인간의 자리를 찾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부득불 자랑하는 자리와 자기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는 자리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자랑해도 상대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무익한 것이 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요, 또한 내가 자랑할찌라도 여전히 부끄럽고 밀쳐냄을 당하는 자리가 계속되리라는 것도 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지고, 너무나 작은 것으로 인정될찌라도 자기 자신은 그것을 자랑하고 싶고 그것을 큰 것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런 부족한 자리에 있는 나를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서 어머니 태에서부터 나를 택정해 주셨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다(갈1:16,17)”라고 바울은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에게 있는 약함은 그냥 있어진 상처가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세워 주시려고 자신을 찾아주신 하나님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라고 자신을 담대하게 열어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 속에는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어울리게 하셨고 불필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짝으로 세워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합당한 존재로 세워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약함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닫아 버렸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목적 곧 그것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장인 것을 깨닫고 감사의 자리를 열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배부른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감사로 받아 들일 수가 없고,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기도 어럽지만 자신의 부족을 알게 해주는 것을 크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입니다. 이 자리에서 감사하는 길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것을 깨달을 때에 세상을 덮을 수 있는 감사의 자리가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덮어 버리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며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목적이 나에게 있음을 믿고 감사하는 자리에서 세상을 열어 갑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감사 없이 사는 것과 감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세우는 자리는 분명이 다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속에 자신을 향한 큰 목적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는 목적이 있는 삶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며 그래서 세상을 감당하는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성령님이 내 속에서 그 세계로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자랑하게 하고 자신의 약함도 자랑하게 하므로 감사하는 자로 세상 속에 자신을 담대하게 세울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