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감당하는 성도

세상을 감당하는 성도(신8:1-10)
  :3 | VOTE : 1 |
  맥스 루케이도의 동화에「토비아스의 우물」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사람들은 여느 동네와는 달리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마을엔 토비아스라는 우물 주인이 모든 사람들에게 거져 물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토비아스는 아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나면서 하인에게 우물 관리를 맡기면서 부탁하기를 “모든 사람에게 물을 주라”고 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주인의 부탁대로 하다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자기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기로 한 것입니다. 하인이 주인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또 마음이 바뀌었는데 이제는 자기 눈에 예쁘게 보이는 사람에게만 물을 준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을 먹기 위해서는 원치 않는 아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을 가린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에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거만하게 행동을 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이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벗어 버리자 하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주인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민들이 아들에게 지금까지 하인이 행한 것을 다 고해 바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 하인에게 물을 주지 말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때 아들이 말하기를 “저 사람에게도 물을 거져 주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입니다.”라고 하며 그 종을 용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허물 많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자비의 손길을 펼치셔서 끝까지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세워 주심은 세상을 감당하는 자로 살아가는 지혜를 깨닫게 해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감당케 하려고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세워 주시는 것을 깨닫는 성도가 됩시다.

1. 현재가 과거보다 더 나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2-3).

  사람의 자리는 두 종류의 자리에서 세상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저주의 대물림이요 다른 하나는 축복의 계승자의 자리입니다. 이 두 자리는 환경의 차이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가치관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약한 인간의 자리입니다. 놀라운 것은 저주의 대물림의 자리는 극히 드문 현상일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물림을 받았을찌라도 자신의 자리를 고정시키지 않고 축복의 계승자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더 좋은 것을 이루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지금의 자신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직은 그 자리에 자신이 세워진 것을 자신의 삶속에 받아 들일 수가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감당하기가 벅찰 뿐 아니라 자기 세상을 좋게 바라보지를 못한다?것입니다. 이런 갈등의 길목에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자리가 본문의 자리이며 성도가 세상을 감당할 뿐 아니라 세상을 더 좋게 세워 주는 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 자리는 현재가 과거 보다 더 나은 자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과거가 더 좋았다고 말합니다. 과거가 좋은 것이 아니고 지금에 와서 보니까 과거가 좋은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유는 과거라는 시제는 오로지 생각 속에만 있는 것이기에 편하게  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는 자신의 눈에 좋은 것이 가리워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너무나 가깝게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친히 겪으면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 때문에 좋게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현재가 과거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 어쩔 수 없어서 떠밀려 살아온 것이 아니고, 분명한 목표를 바라보고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보여 주는 것이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가나안이라는 목표를 바라보며 힘들지만 헤쳐 나온 자리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함도 깨닫기도 하고, 세상을 자기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하며 사는 것을 발견하므로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가장 큰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교회 생활을 하는 자리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섬기는 헌신의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의 나의 삶이 더 좋은 것임을 깨닫고 과거를 세우려 하지 말아야 세상을 감당하는 자로 자신을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라(빌3:13)”고 하셨습니다. 미래는 나를 위한 더 좋은 무대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과거보다 더 나은 현재의 삶을 찾아야만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자신의 삶을 연단의 자리로 받아들입시다(5).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과 고통의 자리를 성경은 불티가 위로 날음 같다고 표현을 했습니다(욥5:17). 이는 인간의 자리를 편안히 세우지를 못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의 모습을 가질 수 없도록 끊임없이 흔들어 버린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결코 나에게만 있는 특별한 사건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신앙인도 예외가 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두가지 길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으로 걸어가는 것과 믿음을 떠난 사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걸어가는 자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 갈때에 성도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세상을 닫아 버리지 않게 하는 삶을 소유하게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자리에서 겪는 자신의 문제 속에 숨겨진 해답을 찾는 유일한 지혜인 것입니다. 이 자리를 본문에서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떠난 자리에 세우는 사람은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인정하면서도 지금의 아픔 때문에 닫혀질 뿐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 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문제의 해답은 찾지 못한채 끊임없이 악순환만 거듭 될 뿐입니다. 성도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감당해야만 하고 또한 그 세상을 감당 할 수 있어야 세상을 열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의 지혜는 자신의 삶속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단시키신다는 자리를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연단의 자리는 자신을 더 좋은 적합한 자로 세우기 위한 감독의 특별한 자리입니다. 이 훈련의 결과는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70년만에 첫 금메달을 딴 박태환이라는 20세 청년 수영 선수입니다. 정금같이 세워진 자리였습니다.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은 그 자리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다(사43:4)”라고 했으며, 이 사실을 깨달은 욥은 고통 중에서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담대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나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세상을 감당하는 성도가 됩시다.

3. 모든 것을 은혜의 자리에서 열어 갑시다(4,10).

  인간의 삶을 닫혀지게 하는 자리와 닫혀진 자리를 열어 주는 자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자리를 어떻게 세우느냐에 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의 자리를 제외시켜 버리면 인간에게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은혜를 깨닫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만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자리는 과거의 자리에서 미래의 자리까지 하나로 묶어 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처해 있는 지금이라고 하는 자리는 끊임없이 함께 한 은혜의 자리가 없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도 지금의 상황처럼 어려운 일도 있었고, 이보다 더한 자리가 있었어도 그때 나에게 입혀준 은혜가 있었기에 지금 내가 이런 세상을 만나게 되었고 또 한번 세워 볼려고 하다 보니 더 힘들게 느껴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만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을 닫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정말 찾아야 하는 것은 나에게 입혀준 은혜의 자리 곧 과거의 자리를 과거로만 돌려 버리지 말고 과거에도 은혜를 입어서 세워진 것처럼 지금도 이 은혜의 자리가 자신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을 잡아야 합니다. 이유는 과거에는 나의 경험이 없었지만 지금은 나의 과거 속에서 경험한 은혜의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자신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자리의 현상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이며, 그 다음은 나에게 가까운 사람에게서만 찾으려 하지 말고 어떤 자리에서라도 나에게 주신 은혜의 자리를 지워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복되게 세우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자신이 세상을 감당한 자로 자손들 앞에서 세우기를 바란다면 모든 것을 이 은혜의 자리에서 열어 갈 수 있어야만 미래를 향한 자신의 삶이 담대하게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은혜의 자리 곧 지금의 자리에서 과거를 새롭게 하여 미래에 대한 약속의 자리를 굳게 세워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과거 40년 광야에서 입었던 은혜는 어느 민족도 경험 할 수 없는 은혜였고, 그 은혜가 지금의 자리에 세워 주셨을 뿐 아니라 미래의 가나안에 대한 약속도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리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셔서 세상을 감당하게 세워 주시는 것을 믿고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성도로 살아 갑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세상이 많이 발전했다는 것은 그 만큼 세상적 세력이 강해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적 자세도 더 강하게 표출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보다 현재가 더 나은 것을 잊지 말고 오늘의 자리에서 잘 연단 받아 복된 미래를 열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은혜로 다스리는 성도의 자리를 세울때에 만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세상을 감당하는 성도로 세워 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