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폭력

친구의 폭력(마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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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관계에서 맺어진 친구의 자리는 몇 가지로 구분 되어집니다. ①순전히 자신이 선택하여 친근한 사이로 관계를 맺는 것(friend), ②개인적인 선택과는 상관없이 서로를 알고 살아가는 것으로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학우, 전우)(comrade), ③우정은 내포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같이 동행하는 사이(companion), ④한 공동체의 일원이면서 단짝으로 늘 함께하는 사이(pal), ⑤일 때문에 가까운 사이로 맺어진 관계(associate)등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표현 한다면 친구란 나에게 있어서 진정한 후원자요 동반자가 되는 것을 말 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들어도 이 친구만 있어주면 그래도 웃음을 가질 수가 있고, 세상 속에서 자신을 닫아 버리지는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친구가 자신에게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가 자신에게 치유가 될 수 없는 너무나 큰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린이 성 폭력의 중심이 바로 이 친구 곧 면식범 그것도 너무나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라면 너무나 큰 아픔이요 불행인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 고통의 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상황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구원의 현장에서 겪어야 하는 영적 갈등이요 다른 하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의 자리가 가장 고통스런 모습으로 자리를 잡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친 가정의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인이 살고 교회가 살며 나라가 사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뜻이요 구원의 복음을 세상 속에 복되게 열어 가게 하는 길목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가정에 친구의 폭력이 사라지고 친구의 복을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자신의 무기를 잘 관리를 합시다(34).-“검을 주러 왔노라”

  아군의 폭격으로 헬리콥터가 추락하여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면 이것처럼 가슴 아픈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군의 폭격으로 이런 사태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고 원인이 기계적인 잘못도 있겠고,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실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전우 곧 친구라는 것입니다. 친구의 폭격으로 죽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아픔이요 충격일 수 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전쟁은 특별한 상황이기 때문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평소보다 더 엄한 군기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친구의 폭격으로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생활은 어떠합니까? 여기에는 통제가 없을 수가 있고 나의 일방적인 통로가 열려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친구의 폭격은 대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삶의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아무런 문제 의식을 느끼지도 못한 채 자연스럽게 무차별 적으로 폭격을 감행 한다는 것입니다. 악성 베토벤을 향하여 그의 음악 선생님은 그에게 “너는 작곡가가 되기는 영 틀렸어”라고 우정 어린 친구의 폭격을 가했고,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의 선생님은 그를 향해 “이 녀석은 도대체 뭔가를 배울 능력이 없어”라고 했으며 신문 편집장은 월트 디즈니를 향해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 일반 사람들이 쓰는 용어들입니다. 그 용어가 당사자에게는 무서운 폭격으로 다가 오는 것입니다. 이유는 자기 곁에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방아쇠를 당기고 버튼을 눌러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세우고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며 세우는 자리는 이 친구의 폭격을 멈출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친구의 폭격을 멈추게 하는 가장 우선적인 사실은 자신의 언어가 무서운 무기라는 것을 인식하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 언어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매사에 부정적인 관점으로만 보면서 상대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것은 이 언어 무기 창고를 발견하고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고 무서운 거인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삶의 현장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데 거인하고 싸워 보지도 못하고 아군 곧 친구의 폭격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이 거인의 세상을 감당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고,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9:50)”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상대방을 받아 들이는  온유한 마음으로 바라 보아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언어 무기를 잘 관리하는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2. 방패를 가집시다(36-37).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이 아니고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 환경을 말씀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자리에는 이 환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환경은 세상의 자리가 적대 세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모두가 정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전혀 다른 세력의 통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화평이 아니고 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칼을 가지고 다가오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적대관계 속에서 만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친구 곧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요 동료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찐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찐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시55:12-13)”라고 했습니다. 이 친구의 폭력이 가까운 자리에 있기에 그 아픔이 너무나 큰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인이 가지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속수 무책으로 당하면서 버티고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친구의 폭력 앞에 방패를 가지고 그 폭력을 막아내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칼은 뺏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패를 가지고 칼의 폭력을 막아내는 것만이 최선의 자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라(엡6:16)”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방패만이 능히 악한 자의 폭력을 막아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실체는 인간의 경륜과 지식과 의지적 결심에서 가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님께서 내 안에 임재 하셔서 나를 세워 주실 때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 인류를 품으시는 예수님을 내가 마음에 모셔 들일 때 성령님이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게 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폭력을  막아낼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여 방패를 가진 자로 살아 갑시다. 이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스리는 것이 방패를 가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3. 언어 비타민을 충분히 섭취합시다(38).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어진 믿음의 방패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세워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전에는 상대방에게서 날아오는 모든 것이 내 속에 깊이 박혀 버렸는데 이제는 박혀지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싫어하는 물건을 거절하는 것과 같은 자리입니다. 내가 거절하면 그 싫어하던 물건은 그 사람의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몇번 반복하면 큰 깨달음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령님의 감화 감동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감동의 축복이 생기는 이유는 믿음 곧 사람을 무시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주신 영적인 언어 비타민입니다. 비타민은 모든 인간이 필수적으로 받아 먹어야 하는 영양분이며 이것이 골고루 채워진 뒤에 다른 영양분을 보강할 때 큰 힘을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받아 주실 뿐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받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엡2:16)”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나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받아 주신 이 십자가의 자리를 깨달을 때에 나도 받아 줄 수 있는 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비타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화목하게 하는 축복된 언어 비타민이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성경은 말하기를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6)”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자리가 축복의 언어 비타민이 되는 것은 전에는 내가 이길려고만 했는데 이제는 내가 져주는 것 곧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삶을 기쁘게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예수님이 우리를 세워주신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자리이며 이 자리에서 성령님이 강한 자로 세워 주셔서 무서운 칼의 세력을 막는 방패를 가지게 합니다. 이것이 폭력을 다스리는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 세상에 있는 폭력 그것도 친구의 폭력의 현장을 보여 주시면서 그 해결책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나에게 있는 무서운 무기들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모두가 친구의 관계 곧 축복된 이웃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세워주는 성도가 되어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합시다. 그 자리가 바로 내가 이길려고 하는 것보다 먼저 인정해 주는 자리에서 자신의 공동체를 세워주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세워 주는 자의 축복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