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세우는자리

: 세상을 세우는 자리(창6: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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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리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어떤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까? 성경 전체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자리를 종합해 보면 어린 아이가 크레용 상자를 바닥에 엎어 버리고는 요란하게 그것도 빠른 손길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곳에다 흥분한 얼굴로 칠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아이는 크레용색을 고르는데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은 채 다양한 색깔로 아니 모든 종류의 색깔로 주저하지 않고 즉시 색칠을 하는데 그 색이 모자란다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골고루 사용하면서 온 바닥에 자신이 생각하는 우주를 그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 그림 잘 그렸지?”라고 할 때 부모님 아니 어른들은 또 한번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야! 그림 정말 잘 그렸구나!” 감격스런 모습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이 거짓말을 학문적인 용어로 사용한다면 격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부족한 인간의 자리를 세워주는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격려를 너무나 크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내용에 맞지도 않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자기 마음에 맞는대로 행동하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사람이로구나. 내가 많은 것으로 너에게 주리라”고 하시며 담대하게 세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심사 기준에 맞춘다면 온 세상은 심판 받아야 하지만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세워 주시려고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현장이 본문에 나오는 노아를 향하여 세상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자리입니다.

1. 방주를 지읍시다(14).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어떤 죄도 넘기시지 않으시고 심판하시면서 옳고 그름을 반드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공의의 자리에서 반드시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자리입니다. 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자리에서 우리가 받아 누려야 하는 은혜와, 그 은혜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처럼 귀하고 복된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공의의 채찍을 드시는 것이 아니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리에서도 사랑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그 공의를 멈추시고 우리를 세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의 자리에서 판단하신다는 것은 어떤 미련도, 어떤 좋은 것도 아무것도 없으시다는 것을 나타내시는 자리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을 포기하시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있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포기할 수 없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옮기셨다(사27:8)”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를 사도 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인간을 기다리며 세워 주시는 자리를 본문에 나오는 노아에게는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방주는 개인적인 방주가 있고 전체 공동체의 방주가 있는데 이 둘은 똑같은 것입니다. 즉 개인적인 방주를 짓는자는 공동체의 방주를 짓게 된다는 것이기에 이 둘이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모세를 위해 갈대 상자를 준비케 하시고는 그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의 방주를 준비하게 한 것입니다. 이 두 방주를 하나로 보여준 것이 노아의 방주입니다. 악한 세상에 성도가 존재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는 방주를 짓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사람을 포기할 수가 없기에 성도를 통해 방주를 만들어 세상을 세워 주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 방주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세상을 세울 수가 있으며 교회의 자리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가는 가교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사닥다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내 가정과 교회에서 방주를 만드는 자로 살아 갑시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세우는 자리는 오직 교회라는 것입니다.

2. 식물을 저축합시다(21).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절대적인 필요 요소는 입는 것과 먹는 것과 거할 처소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먹는 것입니다. 이 먹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세워 주시려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방주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사람의 집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 임재 앞에 자신을 세우는 자들을 통해 교회는 세워 지는 것입니다. 이 임재의 축복을 일컬어 성령님의 역사라고 합니다. 즉 교회는 성령님으로 고백할 수 있을 때에 만이 복되게 세워지는 것이기에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 주는 하나님의 사닥다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닥다리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사닥다리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방주가 비어 있는 것은 방주가 아닙니다. 방주 속에는 생명의 기식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 생명의 기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식물을 저축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방주를 짓고 난 뒤 방주의 생활을 위한 중심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생활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몸을 살리는 곳이 아니고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곳입니다. 이 교회에서 식물을 저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영혼의 식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자신 속에 저축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방주의 생활 곧 교회의 생활이 자신에게 고통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 현장을 보여 주는 것이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리입니다. 저들은 육신을 위한 식물인 만나와 메추라기는 끊임없이 제공 받았지만 영혼을 위한 식물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저축하지 못하므로 광야가 고통으로만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는 다른 민족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고통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은 버티고 살고 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감당을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은 영혼의 식물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줄을 몰랐기 때문에 삶이 닫혀져 버렸고, 세상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의 식물을 저축하여 세상을 복되게 세우는 성도로 살아 갑시다.

3.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며 삽시다(22).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격려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에덴 동산에 모든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아담에게 축복을 약속하신 후에 맨 처음 주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듣고 동산에 있는 나무 중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먹지 않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격려의 자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이유는 우리의 미래를 아시고 그 미래를 향해 가장 복되게 살아가는 최상의 자리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미래에는 별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반응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1:9-10)”고 하신 것입니다. 즉 미래에는 인간이 입고 사는 혜택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혜택을 보는 자리에는 상대적으로 인간에게 더 큰 불 이익도 올 수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리에 더 좋아지는 미래는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 열릴 수도 있기에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것이 미래 속에 세상을 복되게 세우는 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방주 곧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이요 식물을 저축하는 것이 미래를 더 밝게 열어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날 처럼 곳곳에 방주 곧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의 식물인 하나님의 말씀이 풍요로운 세상은 없습니다. 그 세상이 오히려 우리를 두렵게 하고 약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열어가야 합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 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하여 어둔 세상을 열어 간 노아의 자리에 우리 모두가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자리보다 나의 작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로 우리를 세우게 될 때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소금과 빛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말에 「어른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축만 하지 말고 순종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더 좋은 미래를 예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령님을 내 마음속에 받아 들여 그 능력으로 말씀을 순종하여 나의 무너진 세상을 세우는 성도로 힘있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있어서 세상이 복되게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세우는 것은 가정과 교회에서 방주를 짓고 영혼의 식물을 저축하되 내가 좋아하는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에 그 분께 도움을 요청하여 힘있게 세상을 열어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