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믿음의 승리

 주일 설교
갈라디아서 2:20, 믿음의 승리
 

갈라디아서 2:20, 믿음의 승리

 

 

가짜의 유혹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호머의 오딧세이를 보면, 지중해의 한 섬에 살고 있는 반은 여자이고 반은 새인 생물 사이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이렌의 노래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근처를 지나가는 뱃사람들은 정신을 빼앗긴채 뱃길을 가다가 암초에 부딪히고 맙니다.

배가 난파하면 사이렌이 나타나서 선원들을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사이렌 노래의 매력은 선원들을 잡아먹는 순간에 공포로 바뀌고 맙니다.

이러한 사이렌의 매력을 이겨낸 사람이 두 명 있습니다.

보통은 귀를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율리시즈는 귀를 막지 않고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었습니다.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또 한사람은 오르페우스라는 전설적인 음악가입니다.

이 사람은 하프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선원들은 오르페우스의 정교하고 순수한 음악에 빠져들었으므로 사이렌의 노래 소리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초대 교회의 기독교 교리에서도 이 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마치 사이렌의 음악처럼 거짓 교리에 현혹되었던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유대교를 믿다가 복음을 들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복음이 주는 자유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불안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무엇인가 자기를 꽉 잡아 주는 것이 있었는데, 복음 안에는 느슨합니다.

 

율법 아래에서의 신앙은 강요된 신앙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이때 문제되는 것은 인간의 게으름입니다.

인간은 풀어진 상황에서 적응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본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1절에 보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라고 시작합니다.

 

게바는 아람어이고 헬라어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주로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했으며, 안디옥 교회에 잠시 왔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터키 남부에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베드로를 따뜻하게 환대했습니다.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로마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게 하셨으며,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도록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 종교회의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고넬료 사건의 예를 들면서 “이방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선언했던 것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는 순간에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특사가 도착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특사를 보더니 슬그머니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를 피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특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베드로가 피하는 것을 보고나서 바나바 등 다른 유대인들도 이방인과의 식사자리를 피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개처럼 취급되어도 좋은 존재였습니다.

유대인은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14절,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라고 하면서 바울의 질책이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석제자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한참 후배입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까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질책했을까요?

베드로의 행동으로 인해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바울은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거론하면서 질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나를 얽매었던 사망의 사슬을 끊어주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유대인의 생각을 따르는가?”

 

유대인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모세의 출애굽 부터 1500년 이상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됩니다. 심지어 전등 스위치를 작동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율법에서 자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런 율법주의로 다시 돌아가곤 합니다.

외형적인 형식이 신앙의 판단 기준이 되면 율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거룩한 행위를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일주일에 두번 금식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위를 드러내고 자랑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죄인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회개합니다.

여러 모로 바리새인이 깨끗한 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받아주셨습니다. 가장 낮은 상태에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으며, 그 중심을 보십니다.

 

 

이솝 우화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시합이 있습니다.

북풍과 태양이 서로 힘이 세다고 다툽니다.

북풍은 바람을 불었지만 바람이 셀수록 나그네는 옷을 더 붙잡습니다.

다음은 태양이 비추자, 나그네는 점점 하나씩 옷을 벗어버립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야 눈물이 흘러내리고, 진심으로 “내가 죄인이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완전히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 회심하기 전에는 그의 생활이 전부 율법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을 남편에 비유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율법보다 훨씬 능력 있는 것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한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막 울기 시작합니다.

기독도 라는 사람인데, 갑자기 자기 등에 무거운 짐이 얹혀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성경입니다.

이 사람은 그 짐을 떨쳐버리려고 애쓰지만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는 짐을 짊어지고 걸어갑니다.

빛을 지나고 작은 문을 지나고, 언덕에 있는 십자가 앞까지 옵니다.

십자가 앞에 왔을 때, 그는 자기 어깨에 얹혀져 있는 짐이 풀어져 없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어깨 위에 얹혀져 있는 짐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는 율법 앞에 범죄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의 죄를 해결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죄를 해결하신, 주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20절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연합된 것입니다.

영어로 identity 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무엇 때문에 강조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내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 창 자국을 가진 부활하신 분입니다.

내 안에 이 분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가 나서 온 세상에 물이 찹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배를 준비하게 하시고 노아를 살려냅니다.

노아는 키가 물높이 보다 커지거나 물고기 같이 아가미로 숨쉬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방주에 들어가야 살아납니다.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를 한다는 것은 내 안에 힘을 주셔서, 내가 스스로 죄를 몰아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육체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믿음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라비아 로렌스로 알려진 영국의 토마스 로렌스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1919년 파리에서 1차대전 후의 평화회담 때, 그가 맡은 특별한 임무가 아랍 대표들과의 중재 역할입니다.

프랑스 고급 호텔에 아랍대표들을 묵게 했습니다. 아랍대표들은 에펠탑이나 루불박물관 보다 호텔의 목욕탕에 더 관심이 컸습니다.

사막에서 물이 귀합니다. 그런데 호텔 목욕탕은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옵니다. 그들은 목욕탕을 볼 때 마다 감탄을 했습니다.

회담이 끝날 무렵에 호텔에 나가 있는 사람에게서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가서 보니, 아랍 대표들이 목욕탕을 뜯고 있었습니다.

수도꼭지를 아라비아로 가져가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렌스가 수도관이 연결된 것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형태가 아닙니다.

물의 근원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기독교 생명의 물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청년이 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습니까?”(막 10:17-22)

예수님이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고, 이 청년이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그렇게 못했습니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자는 천국을 못 가고, 이웃을 돕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것인가요?

 

이 청년은 자신의 힘으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의 계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신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청년은 이것을 못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이 청년은 인간이 노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자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행함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조건을 만들어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다하여 신을 감동시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디한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종교가 있다. “하라”의 종교와 “은혜”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하라”(do)가 아니라 “다 이루었다”가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행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 그 분은 외쳤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를 믿으므로 너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올 수 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로마에 스칼라 상타(Scala Sancta) 라는 유서 깊은 성당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밟고 올라가셨던 빌라도 법정의 계단을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28 계단입니다.

그 계단을 오르내리면 구원받는다는 속설이 있었고, 이로 인해 무릎으로 기면서 그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을 한 마틴 루터도 그랬습니다.

루터는 계단마다 입을 맞추며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아무리 계단을 올라가도 마음에 죄사함 받는 기쁨이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이게 아니다” 라고 하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습니다.

 

루터가 단골로 사용한 말이 “매일 세례”(daily Baptism) 입니다

세례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완전히 죽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 분이 내 생명이요, 그 분이 내 뜻이요, 그 분이 내 목적이요, 그 분이 내 생애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원하는 곳을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가 네 팔을 벌리고 남이 너를 데려간다”(요 21:18)

 

무슨 의미일까요?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계획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이 베드로의 계획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계획이 나의 계획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가장 실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목표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이 나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나의 계획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어깨에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내 안에 내가 가득 차서 나를 지배하지 말고, 내 안에 주님만이 계셔서 주님이 나를 결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누구도 알아 주지 않고 무엇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똑똑하고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은 주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무능해서 무엇을 할지 모르는 사람은 주님께 의지합니다.

마음을 비어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들어올 자리를 내 안에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살게 하옵소서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계획이 나의 계획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