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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9,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19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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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학의 입학 지원서 양식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도자인가”
어느 연세 많은 분이 뒤늦게 공부하려고 이 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서를 보았는데 한참 고민하다가 정직하게 썼습니다.
“아니오”
그리고 나서, 이 분이 너무 고지식하게 썼다고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 후 대학 학적부에서 이런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우리 대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음 학기에 입학할 신입생 중에서 1,452 명의 지도자들이 있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한 명의 문하생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의 지도자는 권한이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도자는 책임과 의무가 주어집니다.
주님이 명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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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이 10년이 넘게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로 가기 위해 항구도시인 터키의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이 무렵 예루살렘 교회는 기근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소아시아 각 교회로부터 구제금을 모아 지참하고 있었으므로, 에베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하면서 어느 지역에든 오래있지 않았습니다.
기반만 조금 잡히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서는 3년을 거주하였습니다.
에베소에 두란노 서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제자 훈련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 와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 장로들을 만나고 싶다고 전언을 보냈습니다(17절). 밀레도에서 에베소는 50km 정도되는 거리입니다.
장로는 노인, 대표자라는 의미입니다.
17-35절까지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서 당부하는 설교가 나옵니다.
25절에 보면 바울이 “너희가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고별사에서 목회의 절정에 달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
바울은 목회와 전도에 세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요? 겸손, 눈물, 인내입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바울은 겸손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냥 겸손이 아니고 모든 겸손 입니다. .
바울에게 모든 겸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종의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영어로 serve라고 하는데, 종을 의미하는 servant 와 어근이 같습니다.
그러니 섬긴다는 것은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은 로마에서 가장 비참한 노예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 노예된 자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 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종/노예라는 개념을 좋지 않게 평가하였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이 주님을 섬기는 삶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2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바울이 탐심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종으로 주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만일 종이 욕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그는 주님이 맡긴 자리에 설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고 사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세대를 “자기 중심의 세대”라고 부릅니다.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분위기가 안 맞습니다.
자기가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종의 삶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것이 교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왜 교만해 집니까?
그것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랑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교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 중에 주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있습니까?
내가 소유한 재능, 건강, 배운 것, 모두 주님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자신이 무엇을 가진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둘째, 눈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놀라운 성과를 나타냈습니다.
바울은 열심으로 전도했습니다. 때로는 불굴의 의지도 보여 주었고, 냉혹하기도 했습니다.
1차 전도여행 때 마가가 중도에서 돌아갔는데, 2차 전도여행 출발할 때 마가가 다시 따라가겠다고 하니, 안된다고 거절했습니다.
잘못하면 가차없이 혼내 줍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도에 성공한 이유를 보면, 이러한 열정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따뜻함과 동정이 충만한 사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는 눈물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31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는 30절을 의미합니다.
30절, 또한 너희 중에서는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당시 에베소 교회에 이단 사상이 침투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잘 가꾸어 놓은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파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눈물로 그대들에게 권고했던 말씀을 기억하라”고 에베소 장로 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눈물을 흘리셨던 경우가 세 번 있습니다.
-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히)
-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로마서 9:1절에 보면,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친척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가슴을 압박하는 고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순간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이 흘렸던 눈물을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이 구주를 모른 채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얼마 만큼 진지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복음 전도자는 눈물이 영성의 척도 입니다.
사람이 아픔이 크면 감각이 정지됩니다. 그리고 감각이 생기면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러니 가장 애닮아 하는 순간이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사람이 교만해 지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징조가 무엇입니까?
눈물이 사막이 되어 버립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아픔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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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이라는 유태인 정신과 의사가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다가 해방되는 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 견뎌냈습니까?”
이 사람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눈물과 한숨으로 견뎠습니다.”
이 눈물과 한숨은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수용소에서 버티던 사람들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면 포기한다고 합니다.포기하면 나타나는 현상이 두가지 입니다.
첫째, 포기하는 자는 아끼는 것이 없어집니다.
수용소에서 아끼는 것이 담배라고 합니다.
물물교환을 하므로 다른 것으로 바꿀 수가 있어서 소중하게 여깁니다.
포기하는 사람은 이 담배를 다른 사람에게 그냥 줍니다.
둘째, 포기하는 자는 울지 않습니다.
우는 자는 절망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극복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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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걸어야 되는 모습이 이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 형통하여 웃고 사는 날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모르는 곳에서 울면서 기도해야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왜 울어야 합니까?
자기를 위하여 우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위하여 웁니다.
시편 84:5-6,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그리스도인이 흘리는 눈물은 많은 사람에게 샘물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사막과 같이 물이 귀한 나라입니다. 물이 귀한 나라에서 샘이 됩니다.
우리가 이웃이나 친척,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그 사람에게 사막에서 찾아지는 생명수 같은 샘물이 됩니다.
셋째, 인내입니다.
바울이 전도 사역을 했을 때, 그를 철저하게 가로막는 무리는 동족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이나 우상이 대적하는 것보다 늘 부담이 된 것은, 바울이 회심 하지 전의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입니다.
바울이 어디에 가든지 이들이 핍박하고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바울이 동족 유대인에게 어느 정도의 취급을 받았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24절 이하에 소개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 한번 돌, 세번 배가 파손되었습니다.”
엄청난 일이지요? 그리고 놀라운 인내입니다.
고난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혹독합니다.
그런데 고난을 제대로 겪은 사람은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오히려 강해 집니다.
왜 그럴까요?
고난을 겪는 동안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경험과 고난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온실의 화초는 밖의 나가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온실에서 편하게 자라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바울은 전도하면서 이와 같이 겸손, 눈물, 인내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겸손과 눈물과 인내는 바울의 마음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었을까요?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내가 달려갈 길” 바울은 운동경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바울의 생애는 달려가는 것, 완주해야 할 경주였습니다(빌 2;16).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는 일을 자기의 본능보다 우선 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열망은 그 경주를 잘 끝마치는 것뿐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바울과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고난을 극복하면서 전도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에게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목적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의식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3차 전도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체포 당하여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바울이 잡힐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복음 전하는 것을 마칠 때 까지 그 길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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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프란시스는 청빈한 삶을 살았으며 성자로 추앙을 받습니다.
이 분이 주님의 고난을 사모하였고 어느날 주님처럼 고난을 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은 고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 수도승이 이 프란시스의 신앙에 감동을 받아 똑같이 기도했습니다.
“주여, 십자가의 고통을 알 수 있도록 내 손과 내 발에 주님의 못자국을 허락해 주옵소서”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표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기도하였는데, 어느 날 환상 중에 예수님이 상처를 지니고 있는 어깨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수도승은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를 소유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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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바울의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이 흔적이라는 것은 본래 노예들에게 새겨진 문신이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을 상징하는 비참한 표시였습니다.
바울은 복음 증거 때문에 받았던 고난과 시련을 훈장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나는 예수님의 노예이다.
나는 주를 위해서 받은 고난을 영광의 상처로 받아들인다.
오늘도 주를 위해서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도하면서 예기치 않는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됩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 고난과 시련은 피해야만 할 유혹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시련은 주님 앞에서 영원한 영광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흔적, 훈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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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교도소 전도자로 다시 태어난 척 콜슨은 그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 의회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하던 때였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연설자에게 박수를 잘 보냅니다.
그런데 테레사의 연설이 끝났을 때는 한 사람도 박수를 치지 않았습니다.
박수를 칠 여유가 없었습니다.
숨막히는 감동이 그들의 목과 가슴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테레사가 던진 한마디 말 때문이었습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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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서 2천년 전의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강렬하고 감동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박는 사람들을 처단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묵묵히 내어 주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길이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줄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한마디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무엇입니까?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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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워싱턴 D.C.에서 종교 방송가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그가 죽었을 때 비문에 어떻게 쓰이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신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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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달려갈 길 마칠 때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르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실하게 사는 방법은 한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섬길 때는 어떻게 섬깁니까? 종으로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섬기는 것입니다.
오직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하겠습니다.
“금년 한해, 오직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섬기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진 주님
그리스도인은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신실해야 하며, 신실하게 사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있으니,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겸손과 눈물, 인내로 주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겸손과 눈물, 인내로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겸손과 눈물, 인내로 이웃을 섬기겠습니다.
우리 모두, 내 안에 주님의 형상과 사랑, 은혜로 가득 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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