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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1-20, 나의 크리스마스는 언제 이루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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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년 12월 2차대전 중에 벨기에 국경 부근 독일의 휘르트겐 숲속 작은 오두막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2살의 프리츠 빈켄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밖에는 대포와 비행기 폭격소리가 시끄러운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 때였습니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나가보니 미군 2명이 부상자 1명을 부축하고 있었습니다. 3일 동안 헤맸다고 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어머니는 들어오게 한후 부상자의 상처를 돌봐주고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어 나가보니 이번에는 독일군 4명이 찾아왔습니다. 독일군들도 쉬어 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였으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어오세요. 그런데 손님이 있고 당신들의 친구가 아닐지 모릅니다.\"
그 순간 독일군들은 총을 잡았고, 안에 있던 미군들도 총을 잡았습니다.
어머니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전날입니다. 우리 집에서 싸움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순간 침묵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습니다.
잠시후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총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독일군 위생병이 부상당한 미군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식사준비가 되자, 어머니는 전부 모아놓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이시여, 오셔서 저희들의 손님이 되어 주십시오”
기도를 하는 동안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정 직전에 어머니의 인도아래 모두 문 밖으로 나가 함께 별을 보았습니다. 베들레헴의 별을 찾는 동안 그들에게서 전쟁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독일군 병사가 미군들에게 부대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으며, 그리고 악수를 하고 서로 헤어져 반대편으로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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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이기에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할까요?
크리스마스에 그리스도인은 구주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이날에는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 날짜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가 합성된 용어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부터입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는 321년에 12월 25일을 태양의 탄신일로 정했고, 그리스도는 “의의 태양”으로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후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언제 오셨다는 그 날짜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땅에탄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주님이 태어나실 때의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 입니다(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 원래 이름은 옥타비우스입니다.
이 사람은 케사르 시저의 양아들이었다가 시저가 정적에 의해 암살당한 후 세 명의 삼두체제인 집정관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은 다른 집정관인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것을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로마의 패권을 차지하였습니다.
주님이 태어나실 때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유대지역은 이 로마 황제가 임명한 헤롯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헤롯은 주전 4년에 죽었습니다.
아구스도가 “천하로 다 호적 하라”는 영을 내렸는데, 이것은 인구 조사입니다. 주전 4년 이전에 실시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인구조사나 헤롯의 죽음이 주전 4년이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주전 4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서기는 무엇인가요? 서기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해를 기원 원년으로 삼은 것입니다.
6세기에 정해진 것인데, 당시 계산 실력 부족으로 정확히 계산하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 탄생을 4년 늦게 계산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4절,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구약에서 베들레헴은 비극과 슬픔의 장소입니다.
창세기 35장에서 야곱이 사랑하던 라헬이 베들레헴에서 죽어 장사를 지냈습니다(35:16-20).
사사기 19장에서는 레위인의 첩이 마을 사람들에게 죽을 때까지 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행합니다. 이 사건 후, 이스라엘 11개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살육하는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성장하면서 목자 생활을 합니다(삼상 16장). 그래서 베들레헴은 이미지가 바뀌게 됩니다.
다윗이라는 메시아 계보를 잇는 왕을 배출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미가서 5:2절에 보면,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 5:2)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예언 성취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는데, 로마 황제가 실시한 호적 등록에 응하기 위해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호적등록은 주된 거주지에서 이루어졌으며, 마리아와 요셉이 원래 살던 거주지가 베들레헴입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20km 정도 되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8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인구조사 하는 목적은 세금 징수를 위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최고 권력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요셉과 마리아가 로마황제의 명령에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을 이루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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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곤충학자가 개미를 관찰했습니다.
개미 떼가 계속 기어가다가 벼랑으로 갑니다.
그렇게 절벽으로 자꾸 움직이면 결국 개미들은 몰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 학자는 독백처럼 말했습니다.
“내가 개미였다면, 내가 개미가 될 수 있다면 저 개미들에게 지금 그들 앞에 직면한 멸망의 위기를 경고하고 저들을 구원할 수 있을텐데…”
이와 비슷한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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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에 예수님 탄생 사실이 짧게 기록되었습니다.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절)
마리아와 요셉은 베들레헴에 도착하였고 여관이 없어서 한 농부의 가정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마리아는 아기를 강보로 쌌습니다. 강보는 길게 자른 천이니 포대기입니다.
비단 이불이나 고운 세마포에 싸지 않았습니다.
구유는 무엇인가요? 말의 밥그릇입니다.
구유가 세 번이나 언급됩니다(7,12,16절).
이 단어로 인해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초기 교회사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동굴이라고 했는데, 그 당시는 동굴을 마굿간으로 사용했습니다.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라는 말에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산모에게 방을 빌려주지 않은 인정머리 없는 동네 사람들이 연상됩니까?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에 보면,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억눌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다고 했습니다(사 61:1).
그래서 그 분은 이 세상에서의 출발을 이렇게 시작한 것입니다.
흔히 다른 종교에 보면, 아기의 출생은 신화나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화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이 영원에서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베들레헴은 지도에 있는 장소입니다.
말구유가 있던 그 자리에는 4세기에 교회가 세워졌고,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기독교 예배당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유에서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 인근 마을 들판에서는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8절,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천사들이 보기에, 이 세상이 창조된 후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이 놀라운 탄생 소식을 베들레헴의 시민이 아닌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최초로 공개했습니다.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왜 하나님은 목자들에게 알리도록 했을까요?
목자들은 가난하고 소박합니다. 멸시 받는 계층입니다.
목자들은 그 시간에 잠을 자지 않고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호화롭게 사는 제사장들은 목자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 목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만일 천사들이 제사장들에게 말했으면, 그들은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메시아는 그렇게 천하게 오지 않는다. 궁전이나 큰 저택에 온다.” 라고 했을 것입니다.
목자들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권력자가 아니라, 비천한 자, 최하위 계층에 속하는 자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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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어느 왕이 우연히 농촌에 살고 있는 가난한 평민 소녀를 알게 되었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녀는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하였지만 마음씨가 아름다웠습니다.
왕은 수하들과 협의했습니다.
수하들은 왕비 간택령을 내리라고 하고, 그 소녀를 고등 교육을 시켜서 왕비의 재목을 만들라고 합니다.
왕은 고민했습니다.
간택령을 내리거나 고등교육을 시키는 방법으로는 그 소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 것인지 왕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왕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잠시동안 왕의 지위를 포기하기로 결심합니다.
일정 기간 동안 서민이 되어 그 소녀의 이웃에서 생활하기로 했습니다.
왕은 그 소녀와 같은 환경에 속해서, 그 소녀의 마음을 진심으로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야 했던 이유입니다.
마굿간에 태어나고, 목자들에게 처음 소식을 전했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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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은 목자들에게 구유에 누인 아이를 볼 것이며, 이것이 표적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허다한 천군이 내려왔습니다.
천군이 무엇인가요? 하늘의 군대입니다. 천군은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 중에서 선택 받은 집단입니다(왕상 22:9, 단 7:10).
천군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의 찬양의 초점은 “하나님께 영광” 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보내십니다.
이때 평화는 메시아만이 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전쟁의 평화가 아니라, 죄인인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 생기는 평화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평화”
무엇이 그렇다는 것입니까?
아기의 탄생입니다.
“땅에는 평화” 라고 했는데, 왜 땅에 평화가 임한다고 했을까요?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출생 메시지는 한마디로 평화 입니다.
천사들이 이렇게 선포하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15절).
목자들은 천사들이 베들레헴에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천사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구유에 놓인 한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아기에게 천사가 말한 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했습니다.
당시 아기가 태어나면 마을의 악사들이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는 말구유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런 예식을 거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하늘의 천사들이 천상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세상은 태어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마굿간으로 밀어냈지만,
천사들이 천상의 노래를 불렀고, 이를 목자들이 아기 예수와 마리아에게 전했습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에 가장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 직장입니까? 새 집, 새 차, 더 커진 금고입니까?
아니면, 좋아진 건강, 안락하고 편안한 노후입니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구세주가 아닙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동기, 새로운 능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분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겪어야 하는 실패와 좌절, 공허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이러한 이유 때문에 크리스마스는 “기쁜 소식”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신, 우리의 구원자가 “내 속으로 오셨다” 는 의미에서 기쁜 소식입니다(요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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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를 아실 것입니다.
7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중심 캐릭터는 사자 아슬란 입니다.
1권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 사자 아슬란이 예수님으로 비유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자로 표현했을까요?
창세기 39장에 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가 유다 지파의 사자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유대 지파를 통해 왕으로 오실 그분을 사자라고 설명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에드먼트 라는 소년이 반역죄를 범합니다.
그리고 에드먼트의 반역죄를 대신해서 사자 아슬란이 돌탁자에서 죽습니다.
돌탁자는 십자가라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자 아슬란이 다시 부활합니다.
사자 아슬란의 부활과 동시에 상상의 나라인 나니아의 모든 죽었던 것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니아에는 오랜만에 크리스마스가 찾아옵니다.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봄이 춤추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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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러시아와 전쟁을 했습니다.
크리미아 전쟁입니다.
이때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간호사로서 어느 편이든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 날도 나이팅게일이 한 군인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이 군인은 상처가 아주 심했습니다.
그 군인이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그리스도입니다”
그 군인은 나이팅게일의 헌신적 사랑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믿는 자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자기가 부자인 것을 모르고 거지처럼 살다가 결국 굶주려 죽었다고 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부자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고, 복음서의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베들레헴의 북적대는 여관처럼 구주를 위한 방이 없다면, 내게 크리스마스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은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크리스마스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그분을 닮아가게 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만약 주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흑암 속을 헤매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소망 없는 인생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오심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입니다.
오늘 이순간, 우리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오신 주님이, 역사적 존재로만 아니라, 현재 나의 삶에 어떤 분인가 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을 영접한 경험이 있는가?”
이렇게 스스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진리 속에서 거듭난 체험이 있을 때, 각자의 마음에 진정한 크리스마스가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크리스마스는 언제 이루어졌는가?”
하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를 통해 세상에 구원을 주시겠다는 오래된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 아기는 장성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이고, 십자가에서 죄의 지배를 전복시킬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날, 거룩한 날입니다.
그리고 이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우리 모두, 이 기쁜 날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같이 우리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영접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 채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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