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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10-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어느 한 부자가 “평화” 를 화폭에 담아 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세 명의 화가에게 각각 평화를 그림에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한달 후에 세 화가는 각자 완성한 그림을 들고 왔습니다.
세 개의 그림이 베일에 덮인 채 전시되어 그 모습이 공개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화가가 베일을 벗겼습니다.
아름다운 산이 그려져 있습니다.
산은 울창한 나무와 꽃으로 덮여 있고, 산꼭대기는 파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솟아 있습니다.
그 부자는 말했습니다.
“잘 그렸군. 산은 평화로운 모습이야”
두 번째 화가가 베일을 벗겼습니다.
멋진 바다가 그려져 있습니다.
바다는 푸르고 고요했고, 바닷가 모래는 수정같이 반짝였으며, 태양은 잔잔한 바다 위로 석양의 빛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에는 두 사람이 해변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부자는 크게 만족하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잘 그렸군. 바다는 평화로운 모습이야.”
세 번째 화가가 베일을 벗겼습니다.
폭포가 그려져 있습니다.
폭포가 높은 곳에서 한참 아래에 있는 바위 위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 부자는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이 평화로운 그림인가?
나는 전에 폭포를 보았는데, 폭포 물소리에 내 귀가 먹을 지경이었어”
화가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폭포를 옆에서 본 그림입니다.
폭포 아래와 뒤를 보세요. 바위 가운데 갈라진 틈이 보일 것입니다.”
그 부자는 그림을 자세히 보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틈이 보이는군. 새 한 마리가 그 틈 안에 자리를 잡고 있어”
이때 화가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새는 시끄러운 가운데 평화로운 장소를 찾은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빌립보서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에도 해당이 됩니다.
빌립보서에는 환난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빌립보는 마케도냐, 지금의 그리스 에게 해의 연안도시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주후 51년에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할때 세운 교회입니다. 유럽에 세운 첫 번째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에서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바울에게 유럽에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환상에서 한 그리스인이 “마케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간청했습니다.
바울은 그 즉시 배를 타고 빌립보에 갔습니다.
그리고,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후 바울은 3차례 전도 여행을 끝내고 로마에 감금되었습니다.
빌립보서는 주후 61년경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면회를 오고 선물을 보내며 지속적으로 후원을 했습니다(4:15-18).
바울은 이런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선물에 대해 부담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대가를 받는 것이 교회에게 부담이 될까봐, 한사코 선물 받는 것을 거부했습니다(고전 4:8-13, 9:1-18, 고후 11:7-10).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고맙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한참 미루었습니다
그러다가 4장 17절에서 비로소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라고 못을 박아 둡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하면서, 부담도 주지 않도록 배려를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하면서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천막 짓는 일을 했습니다.
전도하는 여행비와 생계비를 스스로 해결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본문에는 세가지 귀한 말씀이 나옵니다.
첫째는, 기회에 대한 칭찬입니다.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전에 너희가 나를 도울 생각이 있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이제 그 기회를 얻었다” 라고 하면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있더라도 기회가 없으면, 아무리 열심으로 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바울이 마케도냐를 떠날 때 빌립보 교인들은 전도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까맣게 잊었던 모양입니다.
그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놀라서 다시 모금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생각은 있었으나 기회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마음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상황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졸고 또 졸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인데 육신이 말을 안 듣는 구나”(마 26:41).
또한 베드로는 주님이 잡혀서 심문을 당하실 때,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슬쩍 들릴까 말까 하는 정도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주님을 모른다”(막 14:71)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후 갈릴리에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6)고 세번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 라고 세 번 반복하여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비록 큰 잘못을 했지만, 주님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추락할 대로 추락한 베드로에게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둘째,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11절에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자족이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족은 무관심이나 방임 상태에서 현실을 무시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족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독립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족은 주어진 여건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감당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셋째, 일체의 비결(SECRET)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배부르거나 배고파도 그만이다. 나는 풍부나 궁핍한 것에 대처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모든 일에 만족할 수 있는 비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영적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것보다는, 미래적인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의 수고와 고생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면, 그것이 더 기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하고, 마지막으로 귀한 고백을 합니다.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흔히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슈퍼맨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에서 “모든 것”은 긍정적인 목표 성취가 아닙니다.
11절과 12절에 설명된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을 받아들이고 적응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상황에서 자족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루어진다” 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부자를 시기하지 않으며
풍족하다고 해서 없는 자를 무시하지 않으며
높아질 때에 겸손하며
낮아질 때에 좌절하지 않으며
어떠한 역경에서도, 항상 주님을 신뢰하며 산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58년 뉴욕의 어느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습니다.
시력은 극도로 나빴습니다.
천식을 앓아서 호흡 곤란 때문에 앞에 있는 촛불을 끌 힘도 없었습니다.
그저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해 갔습니다.
이 아이가 11살 되었을 때, 아빠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오히려 너의 장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를 주목할 것이며, 너는 역사에 남는 신화 같은 기적을 만들 것이다”
이 아이가 커서 23세에 뉴욕 주 의원이 됩니다.
28세에 뉴욕 시장에 출마하고, 얼마 후 뉴욕 주지사가 되고, 부통령이 되고, 미국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을 때에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1906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이 사람은 바로 데오도르 루스벨트 입니다.
루스벨트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삶의 여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환경에서 세상이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었고, 스스로 신화 같은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있는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방해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린도후서 11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유대인 사회에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는 최고 형벌입니다.
40대 이상 맞으면 죽기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만 때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극형을 다섯 번 당했습니다.
태형은 의자에 묶어놓고 무릎 위 다리를 때리는 것입니다.
지독한 형벌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면서 겪은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은 보통 어느 때 하게 됩니까?
성공한 다음에 하는 것입니다.
“처칠 수상이 공부할 때 낙제했다거나, 에디슨이 퇴학당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성공했기 때문에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고생하고 고생했는데, 결국은 망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의 일을 하면서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극형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에 깊고 심오한 비밀스런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신앙이 세상적 가치관에 의해 흔들리고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방해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그 이유는 왜 그럴까요?
기독교의 추진력과 힘을 “세상의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것으로 판단”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이때 축복이 무엇입니까?
물질적 넉넉함 입니까? 아파트 가격 상승입니까? 만사형통입니까?
무병장수입니까?
물론 구약에서 복의 개념을 물질적으로 설명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이 풍족하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다” 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방편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수단입니다.
“축복”은 물질적으로 형통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형통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이라고 하면, 종교적인 활동에서만 일어 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종교적인 활동과 비종교적인 활동을 애써 구분하려고 합니다.
찬송 부르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만을 영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일은 일상 생활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성경에는 일상의 활동이 영적인 활동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레위기 19:11절에 보면, “도적질 하지 마라” 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앞 절에는 “너는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고,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도적질 하지 않도록 네 것을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이라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자기를 계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탄압하던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택하시어, 이방인 선교에 놀라운 역사를 진행하게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바울을 고통스런 로마 감옥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감옥에서 기독교 신앙의 높은 경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 즉 주 예수 안에서의 “자족”에 대한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큰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능력을 주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족하는 성도에게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입니다
세상은 깨끗하고 하얀 순결한 상태로 보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쓰레기와 수많은 더러운 것들이 그대로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눈 덮인 하얀 세상에서는 그 더러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흰 눈의 풍성함이 더러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멀리서 전체를 바라보는 바다는 평화를 느끼게 합니다.
물론 바다 속에는 생존을 위한 어류들의 치열한 싸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면서, 어류들의 싸움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다의 평화만을 느낄 뿐입니다.
넓은 평화의 풍성함이 다툼의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자갈 길을 지나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상한 마음이 있고, 슬픔이 있으며, 힘든 역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에게 바울이 그러했듯이 자족하는 마음 이 있다면, 우리는 능히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이 땅의 슬픔이나 역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느끼며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사도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자족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기쁨을 가지고 항상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영적이고 미래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살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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