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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5:25-34, 권능을 움직인 고통의 드라마
오늘날 현대인에게 익숙한 용어가 있습니다. ‘고독’ 입니다.
우리는 학교, 직장,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대중이라는 매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 속의 생활에서도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독은 초기의 외로움의 상태에서 점차 절망의 상태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이 고독이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한 여인도 이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름도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다 이 여인의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관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의 앞부분에는 회당장이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뒷부분에는 야이로의 딸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계속됩니다.
회당장은 유대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병든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는 죽었다가 살아 난 이야기이니, 정말로 인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당시의 군중들을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회당장의 딸을 어떻게 치료하시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회당장의 딸 치료를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다른 본문이 끼어들어 있어서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병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을 마음 아프게 하였고, 자신도 고통 속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초라한 여인이 성경 본문에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기력한 여인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멋지고 중요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틈바구니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져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입니다. 4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이 여인은 가이사랴빌립보에서 왔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이 계신 곳이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의 연안에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북쪽으로 걸어서 여러 날 걸리는 거리에 가이샤라빌립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아픈 몸으로 아주 힘들게 왔을 것입니다.
외경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입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넘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실 때, 예수님을 조롱하는 무리들 가운데서 뛰쳐나와, 자기 손수건으로 예수님 이마의 땀방울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수건에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남긴 여인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요?
먼저, 여인이 느끼는 고독과 절망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보겠습니다.
25절,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이 여인은 혈루증 환자입니다. 혈루증은 만성적인 자궁출혈입니다.
레위기 15장에는 혈루증을 유출병에 포함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난치병입니다.
“앓다”는 것은 헬라어로 “고통을 겪다”라는 뜻입니다.
엄청난 피를 쏟고 그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병을 12년 동안 앓고 있습니다.
26절,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양방, 한방, 민간전래의술 등 전부 다 해 본 것입니다.
불친절한 의사, 돈을 밝히는 의사, 신출내기 의사 등 괴로움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다 허비했습니다. 병환도 더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난치 병으로 인한 것보다는, 주변으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 소외감이 더 큰 절망을 주었습니다.
그 당시 혈루증을 앓게 되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됩니다.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에 하나가 있고 회당은 지역마다 있었습니다. 성전은 일년에 3-4번 가고, 회당은 안식일마다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회당이 오늘날의 교회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입니다.
이 여인은 성전에 접근할 수도 없고, 회당 예배에도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율법에는 이 병에 걸리면 이혼당해도 무방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병에 걸렸다고 말할 수도 없이, 혼자만 앓아야 하는 병입니다.
이 여인은 절망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꺼져가는 희망을 붙들고, 마지막 시도를 하게 됩니다.
27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 여인의 운명을 바꾸게 된 것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에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군중 속에 섞여 있다가, 예수님 뒤로 와서 예수님의 권능을 향해손을 뻗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랍비라 불리셨습니다.
랍비는 “유대의 선생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랍비들은 거리를 걸을 때 입는 겉옷이 있습니다. 이 겉옷은 직각처럼 떨어집니다.
그래서 빳빳하게 된 네 귀퉁이에 청색 끈 실을 매답니다.
“손을 대니”는 헬라어로 보면 단순히 touch가 아니라 seize 즉 ‘잡는 것’입니다. 여인의 손이 옷자락을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고, 옷자락을 잡아 당긴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붙잡은 것입니다.
28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 여인은 “예수님 옷에 손을 대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확신했습니다.
당시는 거룩한 사람의 옷에는 영적인 치유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행 19:11-12)
이 여인은 믿음으로 손을 뻗어서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이 손의 뻗침은 의미가 있습니다.
앓고 있는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접촉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율법이라는 두꺼운 벽을 부수고 일어난 것입니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과 무시받는 사람 사이에 벽을 부수고 일어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손을 뻗치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이 순간에 놀라운 권능이 전달되었습니다.
“곧”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여인의 고통이 권능을 만졌고, 여인의 몸은 병이 나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인이 믿음으로 주님을 만진 순간에, 주의 능력이 여인에게 전달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30절,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의 치유의 힘이 여인에게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른 척 하시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왜 그래셨을 까요?
32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원어로 여자를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옷에 손을 댄 사람이 여인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여인은 병이 고치지자 그 자리를 피해 떠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군중들이 이 여인의 치유를 모르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에게 이 여인을 밝혀서, 이 여인이 정상인이 되었으니 함께살으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영혼도 고쳐주려는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 했습니까? 아주 무관심했습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밀쳤습니다. 누가 옷에 손을 대었다고 하십니까? 뭘 그런 것에 신경을 쓰십니까?”(31절).
이렇게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병자와 예수님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놀라운 기적의 드라마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속을 태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딸을 살려야 합니다. 급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체하시다니!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군중 속에서 한 사람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대답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3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이 여인은 자신의 위치는 예수님 발 아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 순간은 병 고침을 받은 여인과 권능 있는 치유자가 만나는 감동스러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두려워 떨며” 나왔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여인은 유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여인입니다(레 15:19-29).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짐으로써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며”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이 여인의 말이 끝나자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세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딸아” 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주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그 동안 절망 속에 살아왔는데, 전능자께서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둘째,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주님이 어떻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직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셋째, “평안히 가라” 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으로 보면, “평안 속으로 가라” 입니다.
더 이상 고통이 없는 평안 속에 이 여인을 보내고 계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평안 속으로 가라”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도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 앞에다 기념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몇월 몇일에 예수님이 내 병을 고치시다”
이렇게 기념비를 세워놓고, 오고 가는 사람에게 증거를 했답니다.
이제 마가는, 다시 좀더 크고 멋진 이야기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이제 더 나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절망적인 여인에게 베풀었던 것을 회당장과 그의 딸에게도 동일하게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회당장 이야기와 함께 이름도 없는 이 여인도 중요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은 믿음으로 주의 능력이 들어와서 치유되었습니다.
사실 능력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 편에서 보면, 능력을 비워 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릴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고통으로, 주님은 나를 치료하고자 기다리십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있다면,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 성가 가사에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이런 고백이 나왔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 중에 함께 계시면서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고통스러워하면 부모도 함께 고통스러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고통 중에 있는 백성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희망이 진정한 희망으로의 가치가 있기 위해서는 절망중에 나와야 합니다.
봄에 피는 꽃은 봄이 되어서 갑자기 핀 것이 아니라, 겨울 내내 그 추위를 견디면서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아침에 뜨는 해는 밤새 암흑이 깔려 있었기에 찬란한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삶 중에서 가장 고독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어느 날 제자들에게 슬픈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그리고 요한복음 1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서 왔도다.”(요 16:32)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데 제자들이 도망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 큰 복을 받고, 사업이 잘되고, 출세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회적 신분이 껑충 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권능자 주님이 로마군인에게 잡혀서 묵묵히 끌려 가시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닥쳐올 박해와 고통을 피해 도망간 것입니다.
이러한 고독의 순간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주님은 홀로된 고독의 그 상황에서 창조적인 극복의 길을 찾으셨습니다.
1700년대 영국에 작곡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빛을 못보고 실패를 거듭합니다. 56세가 되었을 때 절망하고 음악을 포기하려고 결심합니다.
몸의 오른쪽은 마비가 되는 건강을 잃었으며, 빚쟁이들이 쫓아 다닙니다.
그때 친구가 찾아와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을 줍니다.
이 작곡가는 의지할 곳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24일간 침식을 잊고 하늘의 영광 만을 바라보면서 작곡합니다.
이때 불후의 명작 한편이 탄생합니다.
바로 헨델의 메시아 입니다.
메시아의 첫머리 곡이 어떤 내용으로 시작합니까?
이사야 40장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는 이 땅에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상처와 절망을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셨고, 이 초라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시고, 이 여인을 “평안 속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본문의 이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처럼 생명을 쏟아버리고, 헛되이 가진 것을 써버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무언가 권능에 손을 대보고 싶지만, 전혀 그러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는 군중 속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었는지도 모르고, 앞으로만 나가고 있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너무 바빠서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이 권능을 피 흘리는 환자에게 흘러 들어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환자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엮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에 관한 말씀을 받은 여러분은, 강한 자와 약한 자에 관한 예전의 관습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함께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여인에 관한 말씀은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우리 동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너의 믿음으로 온전하여 질지어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름없는 여인이 고독과 절망 속에서 주님을 만나 치유 되었습니다.
영향력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주님을 만나 치유되었습니다.
주님은 모두에게 동일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한 자와 약한 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복음의 권능을 우리가 하나가 된 세상에 전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명령에 따를 수 있도록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우리 모두, 주님 역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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