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찌 할꼬

주일 설교
사도행전 2:37-41, 우리가 어찌할꼬
 

사도행전 2:37-41, 우리가 어찌할꼬

 

얼마 전에 TV에서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 되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는 기독교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미국, 영국의 내셔날 지오 그래픽이나 BBC 방송 등에서 오래 전부터 소개해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내용 전개를 보고, 오히려 성경의 정확하고도 치밀함에 의해 믿음이 더 굳건해 지게 됩니다.

 

2천년 전에도 마찬가지로 말들이 많았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에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 부근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기도할 때 성령이 불같이 임했으며, 120명이 유대 부근의 15개국의 말로 방언을 합니다.

이때 방언은 신비하거나 비범한 언어가 아니고, 외국어였습니다.

복음이 유대주의를 넘어 이방인에게 전달하는 도구가 열린 것입니다.

 

이 성령강림 사건이 크게 소문이 났고, 유대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성령의 기적으로 인해 각 나라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술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조롱하는 유대인 무리들을 앞에 두고 설교를 합니다.

베드로 설교는 2:14 부터 시작되는데, 본문은 결론부분에 해당합니다.

 

베드로 설교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 성령강림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고 계획한 사건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무덤에 갇혔지만 부활하셨다.

- 오순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성령으로 강림하신 것이다.

-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는 선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설득력이 있었고, 강한 힘이 실려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유대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3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유대인들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첫째 반응, “마음에 찔려”입니다.

 

‘마음에 찔려’는 원어로 보면, 예리하게 칼로 베임을 당한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진짜로 느끼는 고통입니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한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여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 고 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숨기는 동물입니다. 일종의 보호 본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여 벗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한다 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을 드러낸 것은 놀라운 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마음을 드러낸 것은 좋은데, 왜 마음이 찔렸을까요?

그것은 ‘예수 십자가’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것은 빌라도와 로마군인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죽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12:3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들리게 된다고 누차 예언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책임은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도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오늘날에,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유대인, 빌라도, 로마군인이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있다고 자처하는 바로 당신이 죽였다”

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십자가를 경험했는가?’

“십자가에서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은 저들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하는 성령의 음성을 경험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토인 마을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슬라이드로 상영합니다.

십자가의 그림이 나타나자 한 노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외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오. 당신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달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정으로 알게 되면, 이렇게 마음에 찔림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죄책감으로 몸부림쳐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죄 문제를 다루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에,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왜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죽는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내속에 있는 죄와 싸우다가 죽는 죽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경험을 했습니다.

바울이 자기 내면의 죄와 싸운 끝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막 8:34) 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구원과 부활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두 번째 반응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사실, 이 반응이 베드로 설교의 결과입니다.

 

기독교는 성령 운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령 운동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 부활의 축복만을 받으려고 합니다.

십자가는 웬지 두렵고 거북합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우상이라고 하여, 십자가가 교회 내에서 자리를 못 잡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활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십자가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를 통한 부활’ 입니다.

고난이 따르는 영광입니다. 

 

“어찌할꼬”는 무슨 뜻일까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 속의 세상적 탐심이 비어져야, 이 ‘어찌할꼬’가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갑갑하십니다.

택하신 백성이 이 말을 고백할 때까지 가도록 해야겠는데, 스스로 안 갑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개개인의 심령과 그의 상황에 개입하시게 됩니다.

 

모세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 공주의 아들이 되어 궁중에서 생활합니다. 그리고 장성한 후 에 이스라엘에 대한 애국심으로 살인을 합니다.

이것이 탄로났고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 합니다. 모세가 부득이 광야의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40년 동안 살아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결혼도 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 세월이 모세가 교훈을 받은 시간입니다.

40년이 지나서야 모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애굽 왕가의 지식, 출생의 비밀 등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단계를 거쳐서 모세는 호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라”(출 3;10)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때 모세가 무슨 말을 합니까?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합니까?”(출 3:11)

 

애국심으로 살인을 했지만, 뒤늦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 이라니요?

그 엄청난 일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찌할꼬’ 입니다.

 

베드로도 이 경험을 했습니다.

갈리리 호수에서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보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눅 5:1-5).

베드로의 직업이 어부입니다. 고기들의 움직임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자신의 경험으로는 이해를 못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주님만 따라다니겠습니까?” 라고 말했던가요?

아닙니다.

예수님 무릎아래 엎드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이제 우리도 이런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주를 떠났다가 이제 왔습니다.

주를 믿노라 부르짖었지만, 주님을 향한 마음을 닫아두고 있었습니다.

내 심령 깊은 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탐심과 위선뿐이었습니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통회와 자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통회하였고, 이들 앞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38절,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먼저 “회개” 하라고 합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인데,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변화는 행위의 변화와 연결됩니다. 방향전환입니다.

‘잘못 가고 있으니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최대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시작하면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입니다.

 

회개는 참회와는 다릅니다.

참회는 도덕적 반성이고, 회개는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면, 성수대교가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다리가 길으니 뒤에서 오는 차들이 끊어진 것을 모르고 계속 달려갑니다.

이때 차들이 못 오도록 외치고 있다면, 그것은 참회를 외치는 것일까요? 회개를 외치는 것일까요?

회개를 외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회가 아니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회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회개는 성령의 감동으로 칼날 같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 심령을 뒤흔들면서 나타납니다.

성령의 강권함에 따라, 우리의 심령에서 “어찌할꼬” 하는 깊은 영적인 회개가 나타나게 됩니다.

 

회개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세례를 받되 ‘각각’ 받으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일입니다.

아내가 세례 받았다고 해서 남편이 따라 갈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세례 받았다고 해서 자녀가 자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결단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회개하고 세례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로, 과거의 일에 대한 “죄의 용서” 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예외적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고, 세상적 권세를 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 믿어서 해결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사함 받는 것입니다.

 

둘째로, 미래에 발생하는 일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은 그의 택하신 백성을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으로 살았고, 자기 지식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한 그것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행 1:4)

 

왜 그래 셨을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머리와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성령은 누구에게 주어지게 될까요?

 

39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 약속’이라 함은 ‘성령의 사역’의 대한 약속입니다.

너희는 개인이고, 너희 자녀는 세대이고, 모든 먼데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복음을 먼저 받은 자’는 ‘모르는 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합니다.

 

40절,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여기서 ‘구원’은 종말론적 구원이 아니라, 현재적 구원을 의미합니다.

주기도문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매일매일 당하는 시험, 이 세대의 모든 유혹으로부터 구원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오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35-36 에서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역사상 범해진 모든 범죄의 죄값을 치르는 세대’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지은 죄값을 그 당시 세대에서 치르게 된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무력항쟁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나라가 멸망당 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자멸의 길로 가는 사람들에게 패역한 세대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경고하신 대로, 한 세대도 못되어, 유대인들은 열심당원들을 중심으로 A.D. 66년 경에 로마제국에 맞서 항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등 거의 나라 전체가 멸망 당했습니다.

이 로마장군 티투스는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항쟁에 참여하지 않고 갈릴리 지역으로 피신하여 영적 지도부를 유지하였습니다.

 

41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유대인 청중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순절에 120명에게 성령이 강림했고, 이어서 유대인 청중 3천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순식간에 교인 3,120 명의 대형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제자’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12 제자를 ‘사도’라고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제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 모두는 어떻게 됩니까?

역시 ‘예수님의 제자’ 입니다.

 

사도행전에는 23편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본 장의 베드로 설교와 7장의 스데반 설교입니다.

베드로나 스데반의 설교의 본질적인 내용은 같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삼았다.따라서, 너희들은 죄인이다.”

잘못했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베드로 설교는 얼마나 멋진가에 대한 묘사가 없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대해서는 ‘은혜와 권능,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7:8-10).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에는 마음이 찔리고 3천명이 회개 했지만,

스데반의 설교에는 돌이 날아왔고 스데반이 그 돌에 맞아 죽습니다.

문제는 전하는 자의 실력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곳곳에서는 “성령 충만하여’,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주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는지라”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 혼자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 같이 돌밖에 던질 줄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영이 우리를 간섭하였고,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 앞에 항복하는 유대인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성령충만’ 은 것은 무슨 뜻일까요?

‘나를 내 생각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뜻대로 갈 수 있도록 간섭하시옵소서’ 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유대인 청중들에게 말하고자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저주받아 죽은 것이 아니라, 나의 죄로 인해 대속적인 죽음을 받았다. 나의 옛 사람도 이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는 것입니다.

 

 

16세기 영국의 메리 여왕시대의 일입니다.

한 젊은이가 국가의 재정을 횡령하고 왕을 모욕했습니다.

참수형이 선언되었고, 어느 정해진 날 저녁 6시에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종이 6번 치면 집행이 됩니다.

시간이 되어 집행관들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종이 울리지 않습니다.

해가 넘어갔습니다. 집행관들이 종에 가보니 종치기는 청각장애자였는데, 이미 종을 쳤다고 합니다. 대개 종치기들은 종소리에 청각이 마비됩니다.

 

거대한 종각에 올라가보니 그 종 밑에 한 젊은 여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습니다. 사형을 언도 받은 청년의 약혼자입니다.

이 여인은 사랑하는 청년의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형 집행시간이 되자 종각에 올라가서, 종을 치는 공이를 몸으로 감싸서 종소리가 안 나도록 했던 것입니다.

메리 여왕이 이 소식을 듣고 현장에 왔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는 자신의 스카프를 풀어서 그 여인의 피를 묻히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거룩한 피,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대신한 피여!”

그리고 그 피 묻은 스카프를 그 청년에게 주면서, 그의 죄를 사면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는데, 그를 믿는다고 외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매 맞고 모욕 당하고, 못이 박혀 한없이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죄가 사면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2천년 전이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습니다.

한결같이, 택하신 백성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동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 임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 설교로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 받는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어찌할꼬’ 라는 탄식이 나오게 하옵소서.

나를 내 생각대로 버려두지 마시고, 주의 뜻대로 가게 하옵소서.

성령님이여, 우리를 움직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