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말할수 없는 탄식

주일 설교
로마서 8:26-27,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로마서 8:26-27,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어느 날 무신론자 한 사람이 큰 광장에 청중들을 모아놓고 무신론 강연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강연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이 사람이 갑자기 시계를 풀어 놓더니 매우 흥분한 어조로 신에 대한 도전장을 냈습니다.

‘신이여 5분간 당신을 저주할 것이오. 만약 당신이 살아 있다면 나에게 형벌을 내리시오.’ 그리고 5분 동안 신을 저주했습니다. 5분 후에도 연단에 그대로 있자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만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된 것입니다’

그때 뒤에 앉아 있던 노인이 앞으로 다가서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당신은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하나님은 내가 잘못하면 나를 책망하고 징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노인이 성경적으로 잘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켜보시고 간섭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질그릇에 비유하셨으며, 질그릇은 깨지기가 쉽습니다.

사람의 연약함은 믿음이 좋다고 해서 사라지는 증세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간섭하신다고 했는데,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어떻게 간섭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능력있는 천사로 바꾸려 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입니다

 

‘이와 같이’는 23절-25절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라는 의미입니다.

23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절)

 

‘성령 받은 것’은 농부가 추수하는 첫 열매를 얻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양자로서 우리 몸의 구속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탄식하며 구속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24-25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24-25절)

 

한마디로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망을 위해 참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는  

우리의 소망이 우리를 인내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가 시련을 견딜 수 있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연약함’은 ‘힘이 없는 상태’,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도우시나니’는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을 때 도와주는 경우를 말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12 제자를 데리고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방문객이 많으니, 마르다는 부엌에 가서 음식 준비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서 말씀만 듣습니다.

이것을 본 마르다가 속이 상해서 말합니다.

 

(누가복음 10:40),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이때 ‘도와 주라’는 단어가 ‘성령이 도우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령이 도와 주신다는 것은 ‘짐을 들어 주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도움을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성령을 보혜사 라고 하는데(요 14:16), 보혜사는 “옆에서 돕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마땅히”는 반드시 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옵션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 싸움입니다. 회피하지 말고 부딪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개, ‘현재의 고난을 면하게 해 달라’, ‘필요한 것을 채워달라’는 그런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게 기도를 합니까?

 

욥기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의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욥기 1:8)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그런데 사단은 하나님이 욥에게 물질적인 복과 자손의 복을 주셨기 때문에 욥이 의인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단은 욥을 시험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욥이 의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단의 시험을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식, 재산, 건강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환난에 대해 혼란스러워 합니다.

욥의 친구 3명이 위로 차 방문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도덕의 하나님이시니 욥이 죄가 있어서 이런 중한 환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욥이 기도합니다.

 

(욥기 7:20-21)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욥기가 42장인데 37장까지 이런 탄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38-41장에서 길게 욥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욥은 마지막 42장에서 이렇게 회개합니다.

 

(욥기 42:3-6)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의인이었지만, 큰 환난이 닥치자 무엇을 기도할지 몰랐습니다.

 

다음은 모세입니다.

 

신명기 3장에 보면 모세가 가나안 입국을 눈 앞에 두고 여리고성 맞은 편 느보산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신명기 3:25)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습니다. 모세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함을 경험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이 좋은 것에서 편히 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는데 가나안에 들어가면 오죽할까 하는 마음에서, 그들을 위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신명기 3:26)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신명기 3:27)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다시는 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가 죽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누가 인도합니까?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능히 측량하지 못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무엇을 기도할지 몰랐습니다.

 

다음은 엘리야입니다.

 

이스라엘 북 왕국 아합왕 시대에 배짱 좋은 선지자 엘리야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과 맞서 영적 대결을 합니다.

 

번제단에 송아지를 놓고 불을 피우기 위해 불을 부르는 대결을 합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가 큰 소리 지르고 칼과 창으로 몸을 찌르고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바알신이 응답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엘리야 차례입니다. 엘리야가 조용히 딱 한번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도와주옵소서’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여호와의 불이 내립니다.

그런데, 이 싸움 후에 엘리야는 탈진합니다.

아합왕의 부인 이세벨이 악독한 사람입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전해 왔고, 엘리야가 광야로 도망갑니다.

하루를 꼬박 도망가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하며 기도합니다.

 

(열왕기상 19:4)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그런데, 이 기도 후에 천사가 나타나서,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주면서 ‘일어나 먹고 갈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두 번이나 그랬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다시 40일을 걸어서 호렙산에 갑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해야 할 일 3 가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아람 왕 세우고, 이스라엘 왕 세우고,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알에 무릎을 끓지 않은 선지자 7천명을 남겼다고 하셨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는 역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런 예로 보아, 우리가 무엇을 기도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하는데, 어떻게 도우실까요?

본문에 두 가지 방법이 소개됩니다.

 

우선, 성령은 탄식함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짙은 신음입니다.

‘간구하시느니라’는 문법적으로 현재 직설법입니다. 즉 어제나 오늘이나 성령이 항상 변함없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령께서 탄식할까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고 고통에 빠져 신음하고 있기 때문에 탄식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전에 상달되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이 있기 때문에 비록 부실하고 형편없는 기도지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뜻’ 대로 기도함으로 도와주십니다.

 

27절 보겠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마음을 감찰하는 것’은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분이고,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생각’이란 26절에 ‘깊은 탄식으로 인간을 위해 간구하는 내용’을 말합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시니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 줍니다.

 

‘하나님 뜻’을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 예루살렘에 올라가려고 하실 때에 요한과 야보고 형제, 그들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이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시면 분명히 높은 왕좌에 오르실 것이니, 그때 자신의 두 아들이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엉뚱한 욕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로메는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요청했습니다.

 

(마태복음 20:21)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때 주님이 참 의미 있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22)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수 있느냐”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 욕심대로 구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마태복음 20:23)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따로 예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엉뚱한 기도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민수기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기도를 많이 했고 응답도 받았지만, 아주 손해를 많이 본 기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는 ‘기름 섞은 과자 맛’(민 11:8)이라 했습니다.

누룩 넣은 떡을 먹다가 만나를 먹으니 좋아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싫증이 났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메추라기 떼를 사방에서 몰아 주셨습니다. 메추라기가 참새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순종에 진노하셨으며, 큰 재앙을 내리셨고 많이 죽게 됩니다. ‘탐욕을 낸 백성을 장사한다’(민 11:34)고 했습니다.

 

시편 106편에 보면 이것과 관련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06:15)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그들은 고기를 먹고 육신은 살이 쪘겠지만 그 대신 영혼이 형편없이 야위어 갔습니다. 광야에서는 만나로 자족했어야 했습니다.

 

다음은 바울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대개 간질병이라고 추정합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다녀왔습니다. 천국에 다녀왔습니다.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말씀도 들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았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바울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낳습니다.

이런 정도가 되면 자만해지기 싶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자고하지 않도록 이 병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서 간질 증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무지 은혜가 안됩니다.

바울이 견딜 수가 없어서, 이 병을 고쳐달라고 3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쳐 주시지 않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고후 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이때 바울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약한 것에 대하여 자랑합니다.

왜 자랑합니까?  

‘자신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신에게 머물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자신의 약함이 있으면 사도 바울 처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하셨을까요 ?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3번 기도하셨습니다.

 

(마 26:39)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기쁨은 잠시이고, 환난을 더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의 백성이 환난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의 악한 힘이 성도들의 힘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환난의 시기는 하나님의 훈련 기간이 됩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에게 ‘비행’을 가르치기 위하여, 새끼를 높은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훈련을 시킵니다.

어미 독수리가 높은 하늘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면, 새끼는 죽을 힘을 다해 날개 짓을 하지만 힘이 없으니 땅에 떨어집니다. 그러면 새끼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어미 독수리가 내려와서 새끼를 등에 태우고 올라갑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고, 새끼 독수리같이 이 환난에 마주 서야 합니다. 그리고 이 환난을 이기는 힘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여 기도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막상 기도를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몰라 당황하게 됩니다.

‘무엇을 기도 해야 할지’

‘무엇을 해 달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메말라,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가 과연 천장 너머로 올라가고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영혼의 궁핍함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번역하고 정결케 하여 하나님 앞에 들려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혼자 싸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기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성령은 오직 탄식함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령이 도우시는 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전에 상달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성령의 도움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힘차게 올라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게 하시고, 그 뜻에 따라서 기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전에 상달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