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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11, 본 그대로 오시리라
중국에서 한 농부가 의사인 선교사에게 우연히 백내장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치료받은 이 농부가 고향에 갔다가 다시 왔습니다. 오는 모습을 보니 긴 밧줄의 맨 앞부분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뒤로는 여러 명의 장님들이 그 밧줄을 잡고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자신이 장님이었다가 눈을 떴고, 눈을 고친 의사를 다른 장님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장님들은 눈을 고쳐주는 의사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따라온 것입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눈의 구조’나 ‘수술 기술’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고칠수 있는 의사에게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비를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완벽한 삶의 모범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신비’의 증인이 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십자가, 부활, 재림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과 재림 사이에 승천이 있습니다.
사실 승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승천이야말로 부활과 재림을 확실히 설명해 주는 증거가 됩니다.
승천이 있었기에 부활과 재림은 구체성, 현실성, 역사성을 지니게 됩니다.
승천은 복음서, 사도행전 등 신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오히려 차이가 있어서 승천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깨닫는데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서로 모순없이 예수님 승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감람산을 말하고, 성령에 대하여 말하고, 사명을 부하신 다음에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까지 사람들 앞에 11번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요 20:11-18), 무덤가의 다른 여인들(마 28:8-10), 예루살렘에서 만난 베드로(눅 24:34),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눅 24:13-35), 닫힌 문 뒤에 있던 열제자(요 20:19-25), 열한 제자(요 20;26-31),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던 일곱 제자(요 21:1-14), 갈릴리 산에서 만난 열한 제자(마 28:16-20), 오백여명의 군중(고전 15;6),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고전 15:7),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자들(행 1:3-9, 눅 24:50-53).
자 이제 이자리에서, 부활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후 40일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늘 같이 지내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부활하신 것이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다시 보니 사라지셨습니다.
어떤 때는 문을 잠그고 그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 앞에 홀연히 나타나셔서 “평강하뇨?”라고 하셨습니다.
육체로 나타나신 것은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육신도 만지고, 함께 식사도 했습니다. 틀림없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다시 고기잡으러 갈릴리호수로 갔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승천이 없다면, 부활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환상적으로 비칠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승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순간 제자들은 비로서 예수님 부활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 승천은 예루살렘 부근 베다니 가까운 감람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베다니는 나사로의 집이 있는 곳이고, 감람산은 산상수훈을 가리키시던 곳입니다. 승천은 주님이 늘 계시던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감람산에는 승천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그럼 어떤 모습으로 승천하셨는지 보겠습니다.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 말씀”이란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한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행 1:4~8).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 내게 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다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누가복음 9장에 변화산 사건이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때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현현했습니다.
이때에도 구름이 와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갈라 놓았습니다.
구름이 하나님과 관계된 것은 구약에서 흔한 일입니다.
이사야 19:1에 보면,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임하시리니”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은,
- 부활로 인한 영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 또한, 예수님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보여줍니다.
10절,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제자들이 승천하는 예수님을 주목하며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때, 갑자기 두 천사가 나타나서 제자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제자들의 관심을 승천에서 재림으로 돌려놓게 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할 때 무덤에 있는 여인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 24:5-6) 고 했습니다.
그때 두 천사의 말은 당황해 있는 여인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였고, 여인들은 예수님 부활하신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도 부활을 증거하게 됩니다.
여인들의 설명에 대해 제자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정신병자가 횡설수설하는 “허탄한 말”이라고 간주합니다(눅 24;11).
그러나, 천사들의 이 부활 증거는 나중에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여기 사도행전에서 주님이 승천하실 때, 두 천사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11절, “가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님이 재림하실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했습니다.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말한 것은, 예수님이 이미 교훈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21:27에서 예수님은,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승천사건은 직접 눈과 눈이 마주 친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제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행 1:8)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이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하늘로 올리워 가셨고, 구름이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립니다.
“본 그대로 오시리라”
그런데, 두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오지의 촌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했어도, 별볼일 없는 촌사람들임을 잊지 말고, 새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초심을 잃지 마라’ 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자,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하다면, 다시 나오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도대체 언제? 재림이 있을까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후손들의 족보가 나옵니다. 모두 9백년이상을 삽니다. 무지하게 오래삽니다. 그런데 족보가 ‘죽고, 죽고’로 이어집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조상들이 죽었다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낳고 낳고’입니다. 생명의 족보입니다.
창세기 5장에서 9백년이상을 살았다는 것에 대해, 그때 당시의 년수와 지금의 년수가 다르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창세기 족보에, 죽지 않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창 5:21~24에, “에녹은 65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365 세를 살았으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 에녹은 이 죽음의 족보에서 어떻게 죽음을 모면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이 이어집니다.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까요?
성경에는 거기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에녹이 365년 살았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이 없으니, 하나님과의 동행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입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것이 에녹에게 신앙의 중요한 전기가 된 것입니다.
므드셀라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에녹이 무슨 계시를 받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유다서에 보면 이에 대한 증거될 만한 구절이 있습니다.
유다서 1장 14~15절,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슬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무엇을 예언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계시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어느날 하나님이 에녹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이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겠다.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고 그 아들이 죽는 날이 내가 세상을 심판하는 날이다. 그러니 네 아들 이름을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라고 해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 생각해야 합니다.
므두셀라는 969 세를 살았습니다.
창세기 5:25~29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습니다. 므두셀라가 369세때 손자인 노아가 태어납니다.
창세기 7:11~12절에 보면, 노아가 600세때 홍수가 납니다. 므두셀라가 969세인데 이때 므두셀라가 죽습니다.
이 얼마나 정확합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믿으면 아멘)
창세기에서 므두셀라가 가장 오래 살았는데, 이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늦추어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하는 기회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늦출수는 있어도, 그 순서는 변함이 없다고 봐야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세다. 주님이 도적같이 오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때 말세는 기간이 얼마나 남았느냐 하는 뜻이 아니라 순서가 그것 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갑자기 오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절에 보면, 세상 사람은 주님 오심에 대한 대비가 안되어 있고, 우리 믿는 자는 준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적같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생활과 어떤 자세를 말하는 것일까요?
누가복음 17장에 있는 주님의 설명을 듣기로 하겠습니다.
눅 17:26~30,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주님은 두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고, 또하나는 노아의 홍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세상 사람들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죄는 아닙니다. 사람이니 당연히 해야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것을 말씀하셨습니까?
이것 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온통 신경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먹고 마시는 것을 염려하지 마라.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에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이 속히 오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초림시 그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하지만, 초림시에는 숨어서 오셨습니다.
그 분이 태어난 유대에서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지만 유대에서는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오실때는 우리 모두가 알수 있도록 오십니다.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재림하실 때는 그를 찌른 자도 그를 알아본다고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는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악함과 거짓의 권세는 굴복할 것이며, 의롭고 선함은 주의 오른손에 의해 들리어 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아픔은 주의 품안에서 녹아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준비해야 합니다.
그때 두려움으로 맞이하겠습니까?
기쁨과 찬송으로 맞이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방식에 대하여 경고를 하셨습니다.
11절,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기독교를 명상적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만사 제쳐놓고 ‘금식’ ‘철야’를 외치면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삶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때부터 하나님께 부여받은 일종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일을 하고 노력을 해야 먹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삶에서 성실한 모습이,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지혜로운 열 처녀같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라. 그래서 구원받게 하라”
지금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간입니다.
이때는 하나님 주신 사명에 따라 전도하고, 선교하는 기간입니다.
어느 노인이 그림 한 장을 가지고 유명한 화가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이 그림을 봐 주십시오”
화가는 그림을 보고 깜짝놀라 묻습니다. “누가 이 그림을 그렸습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열두살 된 소년이 그렸습니다.”
화가는 다시 놀라서 말합니다. “그 소년을 데리고 오시요. 내가 세계 최고의 화가로 키울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노인이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소년이 바로 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살았으면 하면서 후회합니다. 하지만,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삶은 단 한번의 기회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에서,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까?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지금도 부르십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까?
무엇을 위해서 인생의 나머지 기간을 살아가시겠습니까?
병든 육신, 영적 절망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그 기쁨에 눈물을 흘리는 이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택함받은 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 이 거룩한 일을 해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
-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 승천할때 “그 모습 그대로” 재림하실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혼구원 전도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의 백성으로 택함을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한 마음으로 외칩니다.
마라나타.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제 결단하오니, 내 인생의 남은 날들을 주께서 주신 목표를 위해서 살아 갈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