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 으로 오시는이

주일 설교
요한복음 12:12-1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요한 12:12-19, 눅 19:41,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부활, 그 다음으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3~4월 어느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5일 후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1장에서12장까지 공생애 3년이 기록되어 있고, 12장부터 나머지가 마지막 1주일을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시기에, 유대 땅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로마가 임명한 헤롯 필립1세가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새로운 왕,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 이적과 기사를 감추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 일부터는 공개적으로 행하시고, 시선을 끌도록 하셨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알려야 하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께서 명하신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십자가에 못박히는 금요일부터 1주일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입성과 십자가를 설명하셨습니다(10:33~34).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저희가 채찍질 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 나리라”

 

둘째는, 성경이 예언하고 미리 약속했던 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입성은 사복음서에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구약 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입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다니엘서 9:24~27절에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있을 때, 엎드려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계시를 주십니다.

 

단 9:24,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름을 붓는 직분은 3가지입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이 될 때 입니다.

그런즉, 예수님은 왕이고, 선지자이고, 대제사장이십니다.

 

“이레”는 7이니 “70 이레”면 490년입니다.

학자들은 70 이레의 시작을 주전 455년~445년으로 추정합니다(느 2:1)

 

단 9.25,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 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7 이레와 62 이레가 지날 것이요”

단 9:26, “62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예루살렘 성이 복구되는데 7이레라 했으니 49년입니다.

그리고, 7이레와 62 이레 합하면 69 이레이고 이는 483년입니다. 이때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일어날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 했으니, 죽는다는 것입니다.

주전 455~445년에 483년을 더하면 주후 28~38년입니다. 예수님이 33세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니 앞뒤로 5년 정도의 차이만이 납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맞습니까?

 

단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데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바로 이것입니다.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는 것은 이제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가 그의 몸을 제물로 드렸으니, 하나님 앞에 나가는 우리가 다시 제사드릴 필요가 없게 된, 영원한 제사를 드린 분입니다.

 

지금도 해마다 종려 주일에는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부근의 벳바게라는 작은 마을에 모여서, 그곳에서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어떻게 들어 가셨는지 보겠습니다.

 

12절,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그 이튿날” 은 연속된 사건을 가르쳐 줍니다.

요한복음 12:1에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에 가시기 위하여 베다니에 들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이날의 다음날이면 일요일입니다. 전통적인 종려 주일입니다.

 

유월절은 명절로서, 팔레스틴과 지중해 각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250만명이 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어린양 256,500마리가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이 많은 어린 양들이 예루살렘에 끌려 올려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중에도 이 어린 양들에 둘러 싸여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11장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입성도 나사로 집에서 바로 출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영접한 무리가 있습니다.

한 무리는 베다니에서부터 동행한 무리입니다. 베다니는 나사로의 집이 있는 곳이니, 나사로를 살리심을 체험하고 따라온 무리입니다.

또 한무리는 예루살렘에서 이 소문을 듣고 마중나온 무리입니다

 

17~18절,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

 

이 무리가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늦은 주후 9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은 오랫동안 묵상하는 가운데,  

“왜 예수님이 굳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에 나사로를 살리셨는가?” 하는 그 깊은 의미를 비로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군중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어떻게 했을까요?

(합독)

13절,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영접하는 모습은 구약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장면입니다.

구약의 말라기이후 신약시대에는 400년의 중간기가 있습니다.

주전 323년에 알렉산더가 제국을 건설하고10년만에 바벨론에서 돌연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의 부하 장군 4명이 제국을 분할 통치하게 됩니다.

이집트지역은 톨레미왕조, 시리아지역은 셀루키드왕조가 통치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집트 톨레미 왕조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톨레미 왕조는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성경”을 지원하는 등 유대인에게 호혜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200년경에 셀루키드가 톨레미와 전쟁을 하게 되었고, 이때 셀루키드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셀루키드는 유대인들에게 잔인했습니다. 종교말살정책을 썼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마카비라는 장수가 저항운동을 주도하였고, 마카비가 간신히 셀루키드에 승전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마카비 장군을 환영했습니다.

그때부터 종려나무 가지는 유대 국가의 상징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히브리어로 “호시안나”인데, “지금 구원을 주소서’”입니다.

도움을 청하는 외침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메시야가 들어오는 시점에서 하는 것이니, 감격과 환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군중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로마 지배하에 있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분이라면 로마 지배로부터 독립을 시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끌려 왔을 때, 빌라도가 “네가 왕이냐”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세속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로 왔다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힘쎈 말을 타고 군대를 거느리고 입성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입성하셨습니까?

  (합독)

14~15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가 이를 예언했습니다.

스가랴 9;9 에 “시온의 딸아 기뻐할지어다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곧 나귀 새끼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의도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길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했던 메시아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타야 할 나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마가복음 11:1~2에, 예수님이 제자 둘을 보내면서, 마을에 가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있으니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인이 왜 나귀를 가져가느냐 하면, “주가 쓰시겠다” 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린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자신이 왕이고 메시아 임을 보여 주어야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왕은 정치적인 왕이 아닙니다.

나귀는 겸손과 낮아짐을 상징합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는 깨끗하고 순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른이 나귀 새끼에 타고 가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을 정복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조롱하거나 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을 영접하듯이, 자기들의 옷을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영접했습니다.

 

마 21:8-9,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무리가 소리질러 가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옷을 벗어서 길에 까는 것은 충성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것은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오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길에서 군중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에 가까운 것입니다.

유대 지도층이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합니다. 하지만, 즉각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자인합니다.

 

19절,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또한, 누가복음 19:39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19:40,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지라 하시니라”

 

이것은 주님이 이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 무리가 하지 않으면, 돌들이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소리지르리라’는 헬라어로 ‘크락수신’, ‘큰 소리로 외친다’는 의미입니다.

억울함의 호소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외침을 나타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메시아를 소망하는 무리의 찬송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또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이스라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기 전에 의미있는 일을 보이셨습니다.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우시며’로 번역했는데, 원어로 보면 ‘애곡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가슴 터질 것 같은 괴로움, 고통에 차서 부르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왕으로 맞이하는 환호성을 들으면서,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울고 계셨던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

 

눅 19:42,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한탄하셨습니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눅 19:43~44,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슬픈 예언입니다.

주님은, 찬양하고 있는 이 무리들이, 인간적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폭도로 돌변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도성에 파멸이 임했습니다.

AD 70년 로마군대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시켰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은 로마 군인들의 말발굽에 짓밟혔고,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실행된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예루살렘과 군중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이 울고 계십니다.

인간으로 오셔서, 죄를 담당하시려는 하나님이 우는 장면을 보십시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은 세 번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본문에서, 그리고 겟세마네동산에서 우셨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심한 통곡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왜 통곡하셨을까요?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고 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구원을 받아야 백성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용서를 경험해야 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울고 계셨습니다.

사실 주님의 이 눈물이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그렇다면,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울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 영생을 주시는 분, 주 예수 그리스도” 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복음을 알면, 복음을 모르는 분들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예수 십자가를 알려야 하는가?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천사들의 호령하는 나팔소리와 함께 그가 등장 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1 에서 말하듯이, 흰 병거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주 예수께 돌아갈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믿을 시간이 지나가 버린 뒤입니다.

 

자, 때는 지금입니다.

오늘 이순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따라, 이 자리에 와 있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조건없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받은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의 이웃에게 역시 아무 조건없이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환호하는 무리를 보시고서 흘리신 눈물 !

이제는 우리가 복음을 모르는 이웃을 위해 흘려야 하는 눈물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웃을 위해서 흘릴 뜨거운 눈물을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은혜에 따라 구원을 받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이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듯이,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이 오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되게 하옵시고.

마침내 이를 기쁨으로 거둘 수 있도록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