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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어느 시골에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가족이 없어서 노후를 의탁할 곳이 없었습니다. 친척을 찾아가서 부탁을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가까운 이웃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성도를 찾아가서 부탁합니다. “내가 비록 늙었지만 당신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는 아름답게 죽을 것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아름답게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교인들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젊은 부부가 이 할머니의 간증을 듣고 맘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할머니를 모시기로 했습니다. 할머니는 여생을 평온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에 다른 날처럼,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기척이 없어서 이 젊은 부부가 이 할머니의 방에 들어갔는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편지 한 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도 나를 맞아 주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나의 기도를 믿어 주었고, 내가 믿는 예수를 믿었으며, 나와 함께 살아 주어서 감사하오. 내가 가진 재산을 당신들에게 주니 하나님 사업에 사용해 주시오” 그리고 막대한 재산 목록과 증서가 같이 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12아들 중에서 가장 사랑한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17살 때 형들의 시기를 받아서 죽음의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겨우 살아나왔지만 애굽의 노예로 팔려갑니다. 애굽에 노예로 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청지기로 생활을 하다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게 되고, 이겨냈지만 그로 인해 무고를 받아 감옥에 들어갑니다. 감옥생활 11년을 하게 되고 바로의 꿈 해석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2년의 청지기 생활을 더하면 13년만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을 만나게 되고, 이윽고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의 생애는 극적인 놀라운 드라마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성(창 37:5), 그의 순결(창 39:10), 고통 가운데서의 인내(시 105;18~19), 그의 지혜와 신중성(창 39;22,47;14), 하나님을 두려워함(창 42;18), 그의 인휼(창 42:24), 선으로 악을 이김(창 45:10), 자기 아버지를 존경함(창 48:12) 등 역경을 이겨낸 성공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신앙의 본질을 말할 때, 지금까지 열거한 요셉의 삶을 다루지 않습니다. 요셉의 죽음의 장면에서 그의 신앙의 특성과 우리에게 가르쳐 줄 신앙의 교훈을 찾았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는 왜 요셉의 죽음의 장면에서 신앙의 특성을 찾아야 했을까요?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임종시에\' 라고 했습니다. 보통의 다른 상황에서라면 ‘죽을 때에’ 라고 했지만, 요셉에게는 \'임종시에\'라고 했습니다. ‘임종’은 헬라어로 “텔류톤”인데 이 단어는 죽음이란 단어와는 달리 ‘결산’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중요합니다.
믿음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맞아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신자로 하여금 견고케 하는 은혜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풍요로워 보일 수도 있고, 삶을 살아가는 동안 부드럽고 안온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고의 위기를 맞았을 때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불러 시간세계에서 영원세계로 넘어가라 하실 때 그의 마음을 지탱해 줄 것이 무엇인가요?”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인하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며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끝이 올 때까지 그 인격의 기능들을 행사 할 수 있도록 하셨다면,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 체념해서는 안됩니다. 그때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마지막 기회입니다. 성도가 죽어가는 시간 동안 믿음이 역사하면 그 자신의 마음이 영적으로 힘을 얻고 위안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존귀함을 받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확신을 줍니다.
요셉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애굽의 부요는 시험의 축복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애굽의 2인자로서 누렸던 세상에서의 존귀한 지위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일들과 약속된 기업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은 17세 어린 나이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당시 애굽에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는 분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읽을 성경도 없었으니 기록으로 남기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이교도들, 우상숭배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모든 유의 시험과 시련에도 하나님 앞에 신실했습니다.
요셉이 하는 일마다 범사에 형통합니다(창 39:1~3). 그런데, 이것은 요셉이 일을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기만 하면 뭐든지 잘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보디발이 ‘이 아이는 뭔가 다르다’하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시편 105편 18절을 보면,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가 나옵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를 설명한 것입니다. 몸은 히브리 원어로 혼이라는 말인데, 한글 성경에는 의역을 했습니다. 즉 쇠사슬이 그 혼을 꿰었다는 뜻이며, 우리말로는 혼비백산했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받고는 믿음으로 잘 견디었다는 것이 아니라 넋이 빠져서 ‘내가 왜 이 지경까지 왔는가?’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떻게 되었습니까? 갑자기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총리가됩니다. 바로가 인장반지를 빼주었다고 했으니(창 41장), 애굽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것입니다. 감옥에만 있었는데 애굽의 실세 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부를 누립니다.
자 그러면, 요셉은 이러한 애굽의 부를 누리면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요셉의 믿음이 행사되는 때는 지상에서의 삶을 마무리 짓는 때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긴 생애를 애굽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올라있었습니다. 애굽의 치리자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쫓겨가 있는 동안 받은 존귀와 부귀영화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게 하거나 그 영혼으로 하여금 땅에 매이게 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정착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우리가 아노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은 이 물질세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 더 큰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보상 받은 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보상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이니라
요셉은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의 부귀가 가나안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애굽의 부귀가 죽음을 면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죽음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자기 생애의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알 때가 있는 것입니다.
생애 마지막에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들보다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장차 올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바라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 기록된 것을 말씀하신 후에 2백년이 흘러갔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신 말씀이 일부는 이루어 졌지만, 그 나머지 부분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전망이 매우 희박해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겠다고 공표하였습니다(창 15;13). 그것은 야곱이 자기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갈때 확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사람 들을 섬기고 그들이 사백년 동안 괴롭게 할 것임을(15;13) 선언하셨습니다. 요셉이 총리를 할때는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미움을 받고 압제를 받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믿음은 따지지 말고, 그냥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함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창 15;14). 그것은 출애굽기 처음 몇 장 속에 기록된 무서운 재앙을 통해서 선언하셨습니다(창 15:14).
하나님께서는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창 15:14,16)
요셉의 마음은 바로 이것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영적인 믿음이 아니고서야 그 것을 어찌 계산 할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가 죽은 후에 히브리 사람들이 지독하게 고통을 받게 되어 있으며, 그것도 오랜기간 동안 그렇게 된다면, 또 그들이 힘없는 노예들로 낮춰지게 될 것이면, 그들이 애굽 땅을 떠날 때, 큰 재물을 보아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리라고 이치적으로 소망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더디다 할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합니다.
믿음은 멀리 내다보는 시야를 은사로 받은 것입니다. 믿음은 난관의 언덕과 산을 넘어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빛나는 수평선을 쳐다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인내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며 행동하기로 정해진 때를 조용히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 순간까지 도우심을 유보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단에 결박하고 칼을 들어 죽이려 할 때, 중지시키셨던 것입니다. 풍랑을 맞은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물결이 배에 덮히게 되었다(마 8:24~26)’ 옥중에 있던 베드로도 사형 집행되기 직전에 감옥에서 풀어내셨습니다(행 12:6-8).
창세기 50: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이 말씀은 요셉의 믿음의 능력을 얼마나 명백하고 복되게 드러냅니까?
거기에는 일점의 의심이나 망설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 하실 수 없으심과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을 분명히 이루실 것을 온전히 확신했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루어질 것도 역시 확실합니다. 그러므로죽어가는 성도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그와 같이 우리의 믿음도 무덤 너머 있는 영광의 부활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내 육체도 안전히 소망 중에 거하리니(시 16:9)”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요셉의 믿음의 넓이는 어떻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시온을 향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자기 개인의 풍성함이나 재산보다 “더 귀하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요일 3:14)
요셉도 그러했습니다. 임종시 그는 자기 뼈에 관한 생각보다 장차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자기 사랑에 사로 잡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는 하등의 관심도 없는 텅빈 거짓된 신앙 고백자와는 다릅니다.
요셉이 죽으면서 자기를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복락을 생각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사무엘상 4:22. “하나님의 궤를 빼았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하였더라.”
대제사장 엘리의 며느리가 죽어가면서 보인 또 다른 사랑스러운 본을 보십시오. 자기 시아버지가 죽었다든지 자기 남편이 살해되었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영광이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복된 신뢰는 여기서 요셉이 모형적으로보여 주는 분의 경우입니다. 우리의 보배로우신 구주께서 배반당하시는 바로 그 밤에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실 때,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항상 그 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락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믿음의 넓이를 다른 측면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들에게 개별적으로 주신 약속을 믿을 뿐 아니라 집합적으로 교회에 주신 약속들을 붙잡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이 심히 쇠약해 지는 경우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또 영적으로 낮은 상태에 처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 훌륭한 지도자들이 하늘나라로 다 부르심 받고 격렬한 핍박이 일어나, 그들이 남기고 간 적은 양떼들이 타격을 입을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말씀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원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단의 계획을 파쇄시키고 그 정반대의 효력이 나타나도록 하셨습니다.
이사야 59:19,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 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창세기 50: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이 점은 요셉의 믿음의 또 다른 특징을 밝혀 줍니다. 곧, 믿음의 공적 서약입니다.
요셉의 믿음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자기 마음 속에 감추어 둔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가 그처럼 오랫동안 걸출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확신하고 있음을 다른 사람이 알까 봐 부끄럽게 여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들 속에서 큰 존영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혜와 분변력으로 그의 명성을 여러 나라에 떨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과의 모든 동맹을 공개적으로 기각시켜 버리는 것이 그에게 더욱 필요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의 후손들이 그가 애굽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애굽 사람들을 좋아했고 사랑했다면, 자기 무덤이 그들 가운데 있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정녕이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확신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는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 갈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지만, 이 확신을 유언으로 말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는 애굽 땅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성공한 땅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는 적당히 성공한 것도 아니고 애굽에서 실세 최고 권력과 부를 누린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언제나 약속의 땅 시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과 모든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전도서를 기록하면서 첫글로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가진 것 다 가져본 사람으로서 부족한 것이 없던 사람이 마지막에 한 말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혼의 말년에 말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즉 그가 이 모든 것을 경험하여 보았지만, 아무것도 소용이 없으니 하나님의 명령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 삶만이 인생의 최후에 남을 것을 솔로몬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치관과 신앙은 어떻게 형성되고 있습니까?
주관적 감상에 의하여 형성된 신앙은 그 감상이 떠날 때, 신앙도 떠납니다. 감상도 신앙도 아니지만, 자기가 신앙이라 생각하였던 감상이 떠나면 신앙도 떠납니다. 자기 주관적 철학에 의하여 이루어진 신앙은 그 철학이 무너질 때 그 신앙도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말씀에 근거한다면, 이 말씀의 영원성 만큼 내 신앙도 영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그의 주관적 감상이나 철학이나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므로 그 말씀의 근거 위에서 신앙을 형성하였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신앙입니다.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이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기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개인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지만 자기 해골로는 그리로 들어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 가나안 땅을 소유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이것은 자기 형제들의 소망을 확고히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으로써 고센 땅에 있는 좋은 기업에서 마음을 떼도록 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된 구속을 간절히 열망할 마음을 더 예리하게 갖도록 할 참이었습니다.
세째로, 이것은 공적인 하나의 기념비를 세워서 어느 때에나 자기 후손들이 약속의 진리를 상기하도록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죽어가면서 요청한 이것이 하나의 공적 기념으로 남겨지기를 바랐다는 증거를, 창세기 50:24, 과 5):25, 의 어구에 있는 의미 있는 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50;24, 요셉은 “그 형제에게 이르되”로 되어 있습니다.
50:25,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켰다”
그는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통해서 전체 백성과 이 조약을 맺어 세대가 흘러도 거기에 매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은총을 입은 후손이라는 이 기념비를 세웠던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맹세하라고 요청한 것은 본보기의 힘을 예증합니다(창 47;31 참조).
그가 자기 시체라고 하지 않고 자기 해골(뼈)이라고 한 것은 이 백년 후에 나 그 일이 이루어 질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대한 전체 협약은 성도들의 교통의 상징적인 증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어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과 끊겨지지만,하늘에 있는 의인들의 영들에게로 들어갑니다.
어느 시골의 할머니 한분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준비입니까? 이 할머니의 신앙과 준비가 부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요셉의 기적 같은 놀라운 드라마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요셉의 신앙이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신앙이 아름다운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아름답게 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요셉은 고난을 이겨낸 것입니다. 평생을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마지막에 자기의 뼈를 후손에게 믿음으로 부탁합니다. 사실 여기가 절정입니다. 요셉의 신앙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이 절정입니다.
“나의 소망은 애굽에 있지 않았다!”
“나의 애정은 애굽을 향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나를 위하여 마련한 시온성을 향해 간다!”
요셉은 마지막에 죽음을 통해서도 그의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의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배워야 하고 실천해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요셉의 그 복된 영광의 자리에 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부르듯이 우리를 부르셨고, 요셉을 만들듯이 우리도 만드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믿지 않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믿음의 일꾼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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