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주일 설교
요한복음 4:3-26,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4:3-26,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제가 사는 집 근처에 자동차 정비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섬김이 우리의 비즈니스입니다” 라는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차에 관계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정비소에서 고쳐주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섬김은 예수님의 비지니스입니다. 열병 앓는자, 문둥병 걸린자, 앉은뱅이, 귀머거리, 문제가 무엇이든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혹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해주셨습니다.

 

오래 전에 웨일즈 왕자가 인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왕자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드었고, 인도 정부는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세워놓았습니다. 왕자가 도착한 후에 자기에게 소개되는 고관들 몇 명과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너머에 보이는 군중들을 보았습니다. 왕자가 “모든 방어벽을 치우시오” 라고 소리쳤습니다. 곧바로 방어벽들은 제거되었고, 사회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영국의 왕자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후 웨일즈 왕자가 다시 그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에, 그 지역에 있는 분들은 플래카드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외된 자들을 위한 왕자”

 

이 왕자가 보여주었던 모습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과 아주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이셨지만, 자기 백성들을 섬김으로 자 보여주고자 이 땅에 내려오셨으며, 그리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사마리아로

 

세례 요한이 아직 활동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북쪽의 갈릴리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됩니다.

 

4절입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하겠는지라”는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나타냅니다. 왜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가야만 했을까요 ?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지역에 갈 때 가장 빠른 경로인 사마리아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북서쪽의 여리고로 가서 요단강을 건너 베레아 땅으로 멀리 우회함으로서 사마리아 땅에 발을 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적, 혈통적으로 혼합된 사마리아를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굳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버림받은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6절입니다. “제6시쯤이 되었더라” 낮 12시에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로 물 길러 나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낮 12시쯤이면 햇빛이 뜨거워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피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햇빛이 내리쬐는 그 시각에 물을 길어가기 위해 우물에 나왔으니, 사회적으로 소외 당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남의 이목을 피해 나왔던 것입니다.

 

9절입니다. 여인이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 여인의 말에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였을까요.

 

이스라엘은 북과 남으로 나누어졌다가, 북왕조 이스라엘은 주전 8세기 앗수르에게 멸망합니다.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는 사마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약 3만명의 사람들을 앗수르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으며, 앗수르가 점령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킴으로써 사마리아 지역에는 인종적인 혼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로인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그 여인은 당시 중동 문화 속에 흔히 존재하고 있던 압박당 하는 소수 그룹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멀리했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눅 19:10).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있어서 모든 영혼은 똑같이 귀합니다(마 16:26).

 

목마르지 않는 샘물

 

9-10절에서는 사마리아여인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유대의 랍비 정도라고 생각했을 뿐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그분이 그리스도 되심을 알기까지는 오랜 세월이요구되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라고 고백 했을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다(마 16:17)”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만나 말씀과 가르침을 경청하며 그분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목도했지만, 갈릴리 나사렛의 목수가 메시야일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인산 인해를 이루었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고 돌아간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만난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저 놀라운 일을 행하는 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오늘도 교회에 다니는 상당수 분들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예수만 알고 그리스도임을 모르기 때문에 본질적인 것은 제쳐두고 비본질적인 것들에 치중합니다. 교회가 영혼을 구하는 일보다도 인권 문제라든지 노동자들의 권익 문제, 정치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좋을지라도 교회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상당히 지적인 여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인은 우물을 팠던 야곱과 사마리아인들과의 연관성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사마리안 인들은 야곱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믿고 있었으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라도 결코 야곱보다 더 위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여인의 확신입니다. 그들은 야곱의 후손들로서 비록 이방인들에 의하여 혼혈은 이루어졌으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3절입니다.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야곱이 남긴 우물의 물과 당신이 주는 물을 차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나는 물은 갈증을 일시적으로 풀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목이 마를 때마다 물을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물은 육신적인 갈증을 해소하여 줄뿐, 영혼의 갈증을 푸는데는 도움이 안됩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참으로 놀라운 증거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영적 갈증, 인생의 갈증이 예수님에 의해 영원히 채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여인이 12절에 “당신은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 증거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그 분을 영접한 성도들이 참 만족을 누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15절입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마리아 여인이 요구했던 바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비꼰 것인가요.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다면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 놀라운 물을 내게 주어 편안하게 만들어 주시죠”

 

아마도 삶 가운데 고통을 가득 안고 있는 한 여인의 진지하지만 혼동 속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섯 남편 이야기

 

예수님께서는 16절부터 모든 비유적인 표현들을 없애고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말씀하십니다. 대화의 내용이 급작스럽게 바뀐 것 같지만, 이 여인은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이 여인이 사실을 말했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대화의 정곡을 찌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여자가 두번 이상 결혼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특별한 경우에도 3번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5번 결혼했고, 지금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또 다른 남자와 산다는 것은 지극히 부도덕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을 지적함으로서 그녀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게 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사회에 대한 메시지도 갖고 있습니다. 생수를 얻을 수 있는 첫번째 조건은 죄를 죄라고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곤함과 목마름을 느끼는 인성을 보여주고 있는 이 본문에서 동시에 예수님의 신성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사실을 알아채고는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고 전하게 됩니다(4:29). 잃어버린 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입니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

 

19절입니다. 자신의 도덕 상태에 대한 예수님의 꿰뚫는 듯한 분석에 당황하게 된 이 여인은 대화의 주제를 종교 문제로 즉 예배를 드리기에 올바른 장소 문제로 돌려버립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이 선지자임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도덕성 문제로부터 대화를 멀리 끌고 나가던 중에 이 여인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신학적으로 중요한 쟁점인 예배 장소에 대한 문제를 끄집어내게 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스룹바벨 성전 건축과관련이 있는 역사적으로 꽤 오래된 일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당 당하고 나서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있던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이 이 성전건축에 참여하기 위해 요청했으나 거절된바 있습니다(스 4;1-6, 느 4:1-2). 그래서 사마리아인과 유다 인들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사마리인들은 별도로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운 것입니다.  

 

그 이후 약 200여년간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산 성전이 같이 존속하다가 였고, 주전 129년 전쟁으로 그리심산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그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을 축복의 산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여전히 기도 처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이제 올바른 예배 장소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21절입니다. 이 부분은 신약성경에서 예배에 대해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곧 예배란 장소와는 무관하며, 신체를 통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며 영으로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의 영이란 성령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마음 자세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진리로, 정직하게, 성경적으로,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 드려져야 합니다.

 

이 본문은 종교와 복음의 차이를 설명해 줍니다. 종교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노력인 반면에,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23절. “곧 이때”라는 표현이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메시아가 나타났고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이제 참된 신자들은 예배의 장소와 예배에 관한 중요치 않은 것들에 대한 다툼을 그쳐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사마리아인, 장로교인, 감리교인, 칼빈주의자, 알미니안주의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25절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영적 생활에 대한 모든 다툼과 혼동을 종식시켜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오직 메시아만이 종교적인 혼동을 바르게 잡아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남편, 예배 등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이것은 신성의 선언입니다.

 

헬라어로 Ego eimi(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 라는 표현이 요한복음에서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는 … 이다 라는 절대적인 표현은 출애굽기 3;14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는 여호와의 자기 계시와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복음주의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시기 전날에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 이외에는, 신약 성경에는 오직 이곳에서만 예수님이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예수님은 당신을 구약에 나오는 이사야 40-55장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하셨습니다. 메시아의 강림에 대한 선언은 약속의 거대한 성취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 사마리아 여인이 하나님의 아들의 입술을 통해 직접들은 말씀을 지난 수백년동안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듣기를 고대해왔었습니다.

 

마무리

 

여러분,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만나셨던 여인은 바로 우리의 이전 모습이며, 오늘 우리가 주변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처럼 실패한 인생들이었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로 오셔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 치료가 요구되는 인생들을 찾아가시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입이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수없이 많은 사마리아 여인들을 위해서 모두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버려진 땅 사마리아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 속에서도 홀대 받으며 살아야 하는 여인을 찾아 구원 하셨습니다. 영생의 샘물을 주셨고, 참다운 예배를 가르쳐 주셨고,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구원을 받은 자로서, 구원이 필요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임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