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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 :1-10, 내게 있는 이것으로
우리는 길에서 지하철에서 장애인들을 접하게 됩니다. 매일 지나가는 같은 지점에서 같은 장애인을 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연민과 안타까움, 동정심 으로 인해 주머니를 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점차 무감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삶 속에 보여지는 장애인입니다.
본문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태어나면서부터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장애인들의 삶은 우리의 자화상이며,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희망을 상실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불행으로부터의 구출이 절실한 소원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장애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정신적, 육체적, 영적인 장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람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장점이 자신을 옭아매는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프레드릭 뷰크너라는 미국의 문필가는 “아름다움은 신체 장애만큼이나 장애이다” 라고 했습니다. 지체 장애인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동정과 연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미녀 역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찬사와 경탄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아무런 노력없는 장점은 자신을 옭아매는 장애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장애인으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장애를 극복하게 되는지. 어떻게 그러한 불행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베드로가 전도 집회를 열었을때 3천명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장엄하고 경이로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 대한 위대한 반전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하나님이 내려오셨고, 사도행전 2장에서도 하나님이 내려오셨지만, 각각의 목적과 의도가 달랐습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 인류는 언어가 하나였지만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 했고 이를 본 하나님은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인류를 온 사방에 흩으셨습니다. 반면에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은 언어의 혼란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공동체로서 의사 소통과 질서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내려오심으로 신앙 공동체는 새로운 인류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인류는 더 이상 바벨탑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이블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새로운 인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오심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인류에게 어떤 도전이 주어질 것인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않은뱅이와의 만남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느 날 유대 관습에 따라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1절에 “제9시 기도시간” 이란 오후 3시입니다. 신실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두번씩 오전과 오후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관습을 지켜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 성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성에는 여러 개의 문들이 있습니다. 미문은 그러한 문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의 출입이 많은 성문 입구에는 많은 장애인들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장애인들은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의 신앙심과 양심에 호소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들 앞을 지나가게 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처음으로 그 걸인을 만난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앉은뱅이 걸인은 분명히 어제도 그제도 그곳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나 요한 역시 어제도 그제도 그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최초로 만나게 되는 것처럼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내용입니다
누가 진정 불구자인가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사건은 성령 강림 사건이 끝나고 바로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순절에 성령을 경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새로운 일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을 경험한 그들에게 무슨 사건이 발생하였습니까. 오순절을 경험한 그들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본문에 불행한 사람은 나이가 40여세나 된 장애인입니다(행 4:22). 그는 유대사회에서 성인으로 취급되기 시작하는 12세 이후부터 28년 동안 이 성전 미문에 나왔을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으니 오랫동안 버려진 삶이었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그의 지속적인 후견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마지못해 살아가야 하는 체념된 삶이었습니다.
2절에 “사람들이 메고 오니” 를 보면, 누군가 그를 습관적으로 성전 앞에 들어다 놓아서 구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앉은뱅이는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감사했겠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저 그런가 보다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저 초점 잃은 눈망울을 굴리면서 자기 앞에 오는 예배자들에게 주문 외우듯 구걸할 뿐입니다.
앉은뱅이 걸인은 분명히 육체적 불구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미래를 줄 수 없었던 사람들, 매일 그 사람을 성전 입구에 들어다 놓고 구걸하게 했던 사람들,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모두 불구자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을 불구자로 만듭니까. 무엇이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장애인이 되게 합니까. ?
- 종교의식은 잘 알지만, 한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은총과 자비를 사모해 본 일도 없습니다
- 아픔과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그 고통에 있는 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 그래서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성경은 이런 영적 불구자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종교적 노력을 했다고 해서 그에게 구원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 구원은 전혀 생각지 못한 장소인 성전 바깥에서 일어납니다
- 구원은 제사장, 종교 지도자가 아닌 평범한 갈릴리 사람에게서 옵니다
- 구원은 예배시간이나 기도시간이 아니라, 삶의 진부한 시간에 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앉은뱅이의 구원입니까. 그에게 구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에대한 대답은 베드로의 말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6절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여기서 “은과 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은과 금은 외형적인 면에만 치우쳐 있는 예루살렘 성전과 영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유대교를 상징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기독교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을 가르킵니다. 앉은뱅이가 유대교의 성전 문 앞에서는 기껏해야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는 동정만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는 육신을 고침 받고 예수 안에 거하는 귀한 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진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사렛을 붙인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사렛이란 천대를 받는 호칭이었으나(요 1:46),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멸시받는 이름이 아니라 영광된 이름이 되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베드로는 천대하는 의미로 사용했던 나사렛이란 지명을 함께 호칭함으로써 낮아진 위치에서 지극히 높아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킨 것입니다.
6절에 베드로가 한 말은 오순절 이전에 베드로의 입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과거에 자신의 힘으로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로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 유다가 로마군인들 그리고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의 하인들과 함께 횃불과 병기를 들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던 때에, 베드로는 칼을 갖고 있었고 그 칼로 하나님 나라를 방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칼과 창은 전쟁의 무기입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칼과 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는 칼과 창을 의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부단히 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결코 창과 칼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기드온이 미디안 족과 전쟁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군사를 1만명에서 300명으로 줄이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사기 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구약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이 전쟁을 하신다고 외치다가도,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칼과 창의 숫자를 세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지 않습니까?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 역시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별다른 학식이나 재능이 있는 있었던 것은 아니며 성격도 급하고 불 같았습니다. 갈릴리호수에서 고기잡던 어부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힐 때 도망갔고 또 3번이나 부인하기조차 한 사람입니다.
그러던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 강림절 이후에 베드로의 말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칼과 창을 믿었듯이 초대교회 시대에 많은 크리사천들이 은과 금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강력한 목소리를 낸 것입니다. “우리는 은과 금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통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힘찬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미래와 운명이 돈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미래와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영적인 치유까지
8절입니다.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불구였던 다리를 고침받은 사람이 베드로 일행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간 사실은 베드로의 치유 행위가 단순히 의학적 치유에 머무르지 않고 종교적인 치유와 영적인 치유까지 이룬 것임을 보여 줍니다.
유대교에서는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나 신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요 9:2). 그러므로 않은뱅이인 이 사람도 장애의 몸이 부정하다고 여겨져 성전 미문 앞까지는 갈 수 있었으나 성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의 능력으로 자신의 몸에서 육체적인 장애가 제거되었고 성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졌던 종교적인 장애도 제거하였습니다.
이어지는 8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니” 를 보십시오. 앉은뱅이는 자신의 장애를 치유하신 하나님을 찬미함으로써 과거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던 영적인 장애까지 없앨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한 것은 은과 금이었습니다. 하지만앉은뱅이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걷는 것입니다. 그가 걷기만 하면 구걸할 필요도 없이 은과 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했을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되었으니, 이는 일시적인 은과 금이 아닌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창조한 교회
오늘날 삶에 있어서 은과 금은 가장 중요한 신이 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돈의 위력은 사람의 삶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금신”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초창기부터 이러한 세상적인 가르침에 저항하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신앙 고백적 전통에서 종종 멀어지고 했습니다.
중세 교황에게는 두 개의 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방은 성호를 그리면서 신의 축복을 선언하는 방이었고, 다른 한 방은 거두어들인 은과 금을 쌓아두는 방이었답니다. 교황은 이 두 방 사이를 오고 가며 위험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신성함과 신성모독함을 함께 행하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성직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한번은 교황이 에라스무스와 함께 바티칸의 문 바깥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길게 이어지는 마차 행렬이 교황청에 바치는 은과 금을 싣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칼과 창으로 경호를 맡은 군인들이 이 행렬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황이 에라스무스를 보고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더 이상 거룩한 교회는 내게는 은과 금은 없다 라고 말해서는 안되겠지” 그러자 에라스무스가 빙그레 웃으면서 즉시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맞아요. 그렇다면 교회는 더 이상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단순히 중세 교회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무엇이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기 시작합니까. 뭐니 뭐니해도 머니가 있어야 한다고 중얼거리지 않습니까 ?
교회는 앉은 자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성령 강림을 경험했던 베드로와 요한이 창조하고 있던 교회는 새로운 인류로서의 교회였던 것입니다. 교회가 믿고 신뢰하였던 것은 은과 금이 아니었으며, 나사렛 예수라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불구자가 된 인간에게 진정한 미래를 제공한다고 믿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 오순절을 경험한 사람,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결코 재물이 밝은 미래를 제공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님만이 미래를 열어 준다고 믿습니다.
성전 문앞에서 구걸하던 그 사람에게 미래가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의 미래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언제나 성령의 권능을 의지하며 언제 어느 때라도 주님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게 하소서. 성령께서 우리 삶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하소서.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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