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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23:44-46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계속하여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우리에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을 살아갈 준비가 안된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대부분은 죽음에 대항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즉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 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세상에 매이거나 미련 없이 구주께 맡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에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의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때 세상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계속하여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육시쯤이면 낮 12시이고 이로부터 3시간 동안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연현상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래로 온 세상은 인간들과 함께 죄인들을 구속하고 저주 받은 이 땅에 저주를 풀며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될 그 세상을 그리워하였던 것입니다. 구주께서 못 박히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여명이 밝아올 것이었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살아나고 이 세상도 하나님의 완전한 완성을 소망 가운데 바라며 기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내려 보내시고 고난의 세월을 살게 하신 것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사랑의 성품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고, 마지막에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손을 통하여 구속의 뜻을 이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이 선택해야만 하는 인류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의 십자가에 죽어가시는 모습을 차마 직시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은 아들의 죽음을 인하여 아파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합니다.
이 어두움과 함께 놀라운 이적이 발생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기워진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소는 출애굽기 26장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막이 서는 자리 주위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가운데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에서 들어가는 첫번째 큰 방이 성소고, 이 성소 안에 지성소라는 은밀한 방이 있었습니다. 이 지성소 안에는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를 열면 그 안에 법궤가 있었습니다. 법궤와 속죄서는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좌정하시는 보좌였습니다. 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었습니다. 이 휘장은 베로서 단단하게 만든 것입니다. 거룩한 곳을 지키고 있던 휘장이니 얼마나 신경 써서 만들었겠습니까? 일년에 단 한번 대 제사장만이 이 휘장을 열고 들어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또한 이 휘장이 찢어진 때가 주님이 소리를 지르면 운명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고 하듯이 장엄하게 찢어졌던 것입니다.
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구별이 철폐되고 성소까지 밖에 들어갈 수 없었던 모든 제사장들이 아무 거치는 것이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현존하고 있는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을 향하여하나님은 오랜 세월 동안 드리웠던 보좌 앞의 휘장을 걷으시고 단번에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뿌리신 그 피 길을 걸어 당신 앞에 나아와 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이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기다려 오던 일이 바로 이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뿌리는 외침 속에 죽어가면서 전했던 예언이 바로 이것이었으며, 그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단지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세상에서 고난을 받되 하나님의 백성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 속에 남아있는 모든 힘과 기운을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보좌 앞으로 죄인들이 나아올 수 있는 구속의 산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이제는 기력이 진하여 운명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순간에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니 의아할 뿐입니다. 죽어가시면서도 이 마지막 말씀을 위해서 유독 큰소리로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탄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간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어주셔야 할 탄원이었기 때문에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 말씀의 시작이 아버지여 입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한없는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어떻게 이 순간에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부르실 수 있을까요? 살이 찢어지고 피도 다 흐리고 호흡이 멎어지는 이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 분에게 아버지셨습니다. 이 한마디의 호칭 속에서 이 세상의 극한 고통과 죽음도 끊어 놓을 수 없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그 깊고 신비로운 관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하나님을 마치 자기가 원하는 일을 위하여 동원되는 해결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의 시대에는 이 십자가의 마지막 장면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담긴 복음 진리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이 세상의 언어로는 헤라일수 없는 가시 밭길과 같은 고난의 인생을 살아오신 주님은 자기 땅에 왔으되, 자기 백성에게 배척을 받으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화목제물로 드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고 계셨으니, 우리의 죄악과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셨습니다. 어린 자녀가 아비를 부르는 것과 같은 친밀함이 십자가 위에서도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이 임마누엘의 약속의 예언은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성취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남기신 말씀은 자기의 영혼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주님은 내 영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아니라 내 영혼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행되는 일, 외롭고 긴 인생길에 함께 한 위로와 격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이 인생길 동안에 관계일 뿐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때에 홀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누가 같이 갈수도 없는 길입니다. 주를 믿는 모든 영혼들은 홀로 걸어서 하나님의 보좌 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혼이 서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확신을 갖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현존을 느꼈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죽을 수 있었습니다.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직물을 끝마치면서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시편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였나이다.” 이 구절은 유대의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 사용했던 기도였습니다. 시편 31;5은 구약의 약속이었으며, 예수님은 자신을 이 말씀에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어 하나를 덧붙이고 구절을 하나 생략함으로써 변형시켜 인용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특권은 행사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란 단어를 덧붙이고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였나이다” 란 구절을 생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어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아버지에게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것이 곧 죽음을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7: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원본의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합니다. 헬라어로는 그가 “자신이 영혼이 떠 날 것을 허락하시다”입니다. 요한복음 19:30에는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하늘로 올리셨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신적인 영광을 지닌채 죽음을 이기시는 온전한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올리신다!”
속죄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한 거룩함과 훼손된 정의를 온전히 충족시켜야 합니다. 오직 그만이 우리의 대속물이 되셔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해 내셨습니다. 이제 다른 한가지가 남았습니다. 바로 구주께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죄인들에게는 먼저 죽음이 있고, 그 이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구주에게는 당연히 그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셨고 그 이후에 죽으셨습니다.
목숨을 버리심으로서 그의 죽음은 다른 어떤 사람들과의 죽음과 구별되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왕처럼 죽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로마의 사형 집행관들이 주님을 죽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를 ~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니(행 2:23)”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그는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 10’:17-18)라고 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으셨습니다. 즉 선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구약의 희생 제물들은 기꺼이 죽지 않았습니다.양이나 염소, 그 어떤 것도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승리하는 가운데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지진이 일어났는데(마 27:51) 이것은 하나님이 시내산에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에도 지진이 일어났던 사실을 생각나게 만듭니다(출 19:18). 그러나 갈보리의 지진은 율법에 대한 두려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을 정복하고 율법을 성취하신 뒤, 다시 말해서 승리하는 가운데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죽음, 그리고 율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9고전 15:56-57)”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적 축복들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구속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 양의 피로써 사단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계 12:11).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살이 찢어졌을 때, 그가 성전의 휘장도 찢으셨기 때문입니다(히 10:19-22).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부활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는 육을 극복하고 새로운생명을 누리면 살아 갈 수 있습니다(롬 6장).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높이 들렸기 때문에 세상과 사단이 패배를 당하였습니다(요 12;31-32). 우리들의 대적들-세상과 육, 그리고 사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무능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까지는 기독교인들도 언젠가는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그 방식 그대로 죽게 됩니다. 죄를 짓고 살았던 사람들은 죄 안에서 죽을 것입니다(요 8:21).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아버지의 손안에서 편안하게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요 14:1-6).
요한복음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죽는 순간에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는가. 이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려받은 재산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 마지막 기도에서 아버지와 교통하는 복된 진리와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음이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최악의 두려움일수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저 사랑하는 분 앞에 나아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 영혼의 행동은 삶에서도 그렇듯이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향합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구주의 이 마지막 말씀이 죽어가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표현한다면,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의 영혼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보여줍니다. 내면의 영은 소중한 보물이며, 우리의 주된 걱정과 큰 염려는 안전한 손에 영이 보호되는 것입니다.
구주의 이 기도는 육신이 어찌 되든지 간에 영이 안전한지 믿는 자가 영을걱정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수 있습니다. 죽음이 가까운 하나님의 성도는 육신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항상 영혼을 생각하고 있듯이 죽음이 가까워서도 영혼을 생각하며 마지막 숨을 거둘 때 하나님의 돌보심에 영혼을 맡깁니다.
“주 예수여 내 몸을 받으소서”가 아니라 “주 예수여 내 영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보석함이 깨어질 때 보석을 보호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볼 수 없으며 죽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삶에는 많은 시행착오와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사방에서 위협을 받습니다. 함정이 있습니다. 이 세상, 육신, 사단은 연합하여 우리를 대적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힘에 비해 너무 강합니다. 여기 어둠 속에 등불이 있습니다. 폭풍우 속에 안전한 항구가 있습니다. 사단은 계책과 술수에서 보호해 주는 복된 가리개가 있습니다. 삶의 질풍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피난처 되시는 아버지의 손과 마음의 진정한 피난처가 있습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 십자가의 죄사함, 이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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