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 19:28-30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주님은 오전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처음 세 시간 동안 환한 햇빛 아래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 후에 암흑이 왔고, 그 마지막 순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일곱 말씀 중에서 처음 세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중심이 되는 네번째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번의 말씀은 예수 자신에게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후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맡기고 ‘그 뒤에’ 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세 시간의 어둠 이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남아 있는 일은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 가운데 서서히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 하는 일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모든 일이란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가신 그 일들을 말합니다. 주님의 관심은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이루어지고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만족되며,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사랑과 통치를 힘입어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모든 일이 주님의 관심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 임박한 당신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미 확정된 대속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모두 이루어진 것을 앞서 아셨습니다. 그 많은 제사장들이 할 수 없고, 그 숱한 선지자들이 성취할 수 없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갈망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경건한 소원이 되었던 구속의 역사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성경으로 응하게 하시려고”
성경은 오실 메시야가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칠 것이라고 예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메시야가 고통받는 메시야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으며, 어떤 특정한 말씀은 그가 목말라 하는 가운데 갈증을 식히기 위한 신 포도주를 제공받으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시편 69: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러분은 시편 69편을 읽음으로써 고통받는 구세주의 모습, 하나님의 종으로서 끝까지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 할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69편 19-21절입니다.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예수님이 이렇게 목마르실 때에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복음서는 조금씩 다른 묘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은 19: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술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후”“
신포도주는 원어로 “옥수스”인데 이는 시편 69:21에 나오는 “초”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 시편의 예언을 의식하여 말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예언의 성취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있던 예수님께 음료를 준 것은 복음서에서 아주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34에는 사람들이 쓸개 탄 포도주를, 막 15;23에는 몰약을 넣은 포도주를 주려 했으나 예수께서 맛 보시고 마시기를 거절하셨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런 포도주들은 마취 성분이 있어서 십자가 형이 주는 고통을 경감시킬수 있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온전히 감당하시고자 이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에게 두 행악자와 마찬가지로 잠오는 약이 주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그 약을 먹었지만, 예수님은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몰약이 섞인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으며, 결국 십자가 위에서 죽기 이전까지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막에 들어갈 때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레 10:8-11).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제어하고 있었으며, 못박히고 죽기까지 그 모든 아픔과 고통을 다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로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본절에서 예수님에게 드려진 신포도주는 이와는 다른 것입니다. 갈증을 덜어주는 역할만 하는 값싼 음료였고, 사형을 집행하는 하급 군인들이 마시는 음료였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 는 헬라어로 ‘딥소’로서 네 개의 철자로 이루어진 한 단어입니다. 이 짧은 한 마디를 통해 우리는 주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서 여섯 시간 가까이 피를 흘리셨습니다. 의학적으로 많ㄹ은 출현은 반드시 심한 두통과 극도의 갈증을 동반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고난을 받으실 때 주님은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외침은 육체의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채찍을 맞으며 피범벅이 된 채로 십자가를 지고 바위투성이의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셨습니다. 처형장소에 도착하여 손과 발에 못이 박혔습니다. 그리고 세시간동안 가시관을 쓴채 햇빛을 받으며 매달려 있습니다. 암흑의 세시간이 지나고 이제 막 끝나려 합니다. 그 밤과 낮은 영원히 함축되어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는 일상적인 목마름이 아니었습니다. 그 내면에는 육체의 고통보다 더 절박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목마름은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열기로 그의 영혼이 고난을 받았던 결과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땅의 가뭄을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신 음성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찔림을 받지 아니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니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분이 어떻게 목마르실수 있단 말입니까?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시며 그 속에 영혼을 불어 넣으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던 그 분이 어떻게 이 세상을 향하여 한 모금의 물을 구하며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실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감격하였던 그 선언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강요 받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아버지의 계획에 순종함으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스스로 자기를 비우시고 그와 동등되어 여김 받으실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 어울리지 않는 모독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낮아지심은 우리이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 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목마르고 피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육신을 입으셔야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로 드리실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이 주님의 음성 앞에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낮아지심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스스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우리는 다만 그 십자가의 음성 앞에서 감격할 뿐입니다. 주님이시여 어찌하여 목마르다 말씀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렇게 목마르실 수 밖에 없는 하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육체를 입으셨나이까?
고난의 문제는 항상 복잡합니다. 왜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에 고난이 필요합니까? 악을 방지하실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왜 고난과 불행과 질병과 죽음이 있어야 하는가? 세상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이 세상은 그저 눈물골짜기입니다.
가식적인 얄팍한 유쾌함으로는 인생의 칙칙한 현실들을 가릴수가 없습니다. 고난의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사색해 보았자 초라한 위안만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이성을 총동원해서 묻습니다. 하나님은 아시는가? 가장 높으신 분이 알고 계시는가? 정말로 그가 상관하시는가? 모든 질문이 다 그렇듯이 이 질문들도 십자가로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완벽한 답을 찾지 못한다 해도 궁금한 마음을 해결해 줄 만한 무언가를 만납니다. 고난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십자가는 그 고난을 덜어 주기에 충분한 빛을 던져 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모르지 않으신다고 말해 줍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기“때문입니다(사 53:4)
만일 하나님이 인간으로서 친히 아픔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인간의 아픔 고통을 알 수 있겠습니까?
평생 고생 한 번 안 하고 부족한 것이 없이 늘 풍족하게 산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파서 우는 사람, 부족하여 헤매는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니 고생 한 번 안하고 부하게 편히 살았으니 축복 받았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통받고 힘든 역경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동참해서 같이 나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친히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죄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근심과 고난을 개의치 않는 분이 아니라고 말해 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직접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고난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고 말해 줍니다. 구주 안에서 그는 고난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들이 지니는 가치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율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9히 4:15).
우리의 구속자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의 슬픔을 공감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자신이 슬픔을 아는 자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고난을 받는 마음을 위한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낙심하든지 여러분의 길이 얼마나 험난하든지 여러분의 운명이 얼마나 슬프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을 주 예수 앞에 풀어 놓고 모든 근심을 맡기도록 초대받게 됩니다. 그리고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고통으로 엉망이 되었는가?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오해 받고 그릇 판단되고 잘못 알려지고 있는가?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가장 가깝고 친했던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등을 돌리고 배신하였는가?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암흑 속에 있는가?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이는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세상 사람들은 다 목마르다고 외칩니다. 물질적인 부를 탐하고 복을 달라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충족되기도 하지만 뭔가가 이게 아닌데 하면서 목은 계속 마르게 됩니다.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시는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죄인들의 구세주로서 사랑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주님은 포도주를 만드셨고, 요한복음 4장에서는 수가의우물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죄 가운데서 만족을 얻으려고 했지만, 죄는 우리의 영적 갈급함을 결코 채워주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를 주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세게 치셨던 것입니다.
천국에는 목마름이 없습니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아니할(계 7:16)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당신은 목마릅니까?” 라고 질문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인류가 모두 실제로 목마름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용서받고 싶은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은 언제까지 목마름을 느끼고 살아갈 겁니까?”라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때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거부한다면 영원히 목말라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로 다시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목말라 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로서 고통을 견뎌내셨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순종하셨고, 죄인들의 구세주로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굳게 믿을 때, 그가 여러분을 만족시켜 주실 것이며,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목마르시다는 것은 실제적이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 자신의 사랑과 헌신 때문에 목마르신 것입니다. 그는 피 값으로 산 백성들과 교제하길 갈망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위대한 신비입니다. 구속받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종중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용하지만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대상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제를 원하시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주의 만찬이 구주와 구원받은 사람들의 특별한 교제 시간이듯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먹고”는 항상 교제의 상징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중으로 먹는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하여 보라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와 함께 먹고 교제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우리의 특권일 뿐만 아니라 그도 우리와 함께 먹는다.
그는 우리와의 교제 속에서 그의 마음을 풍족케 하는 것, 그의 갈증을 풀러 주는 것을 발견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헌신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목마르시십니다. 자신의 사랑으로 인해 목마르십니다. 그를 만족시킬 만한 것을 드리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분의 부르심에 답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마음에 인같이 품고 (아 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