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가상칠언
마태 27:46,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46,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병행구절 막 15:34)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

 

주님의 네번째 말씀은 고난의 절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중에서 다른 말씀은 모두 복음서 하나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 네 번째 말씀만은 마태와 마가에 두 기록자가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히브리어 원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헬라어와 아람어가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말씀을 히브리어로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유대 시간으로 제 삼시라고 했는데 여기에 여섯 시간을 더하면 우리의 시간이 됩니다. 그러니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시간은 우리 시간으로 오전 아홉 시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아홉시에서 낮 열두 시가 되기까지는 온 땅에 빛이 있었습니다. 이 세 시간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앞 장에서 살펴 본 세마다의 말씀을 남기셨던 것입니다.

 

네 번째 말씀을 시작하실 시간인 제 육시로부터 제 구시까지에는 어둠이임하게 되었습니다. 낮 열두시가 되면서부터는 어둠이 온 땅에 임하여 앞을 분간할수 없는 흑암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이한 이적이 천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 마디의 유언을 말씀하신 다음에 세시간 가까운침묵이 흘렀습니다.

주님은 온 몸과 영혼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채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끔찍한 형벌을 다 당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견딜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견딜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었습니다. 출혈과 함께 쓰라린 육체의 통증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심판은 육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혼 위에까지 쏟아 부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혼으로 당하신 영적 고난은 육체의 고통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고난이었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에 겟네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실 때는 이미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오는 심령의 고통과 영혼의 아픔을 남김 없이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영혼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이 말씀은 절규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이 하나님과의 깊은 단절을 경험하는 아픔을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이 순간에 어둠을 온 땅에 내리신 것은 이 자연의 큰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잘못된 일임을 깨닫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늘 아래 살아가는 인생들은 자연계에 큰 변화가 일어나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예민함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박을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했고,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를 못박는 그들이 행하시는 일이 바로 어둠의 일임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이 놀라운 흑암은 바로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육신의 눈으로 뚜렷이 감지할 수 있도록 베풀어주신 교훈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에 빛으로 인도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순간에는 어둠을 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에도 세상은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 분께 경배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별빛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별빛 마저 없이, 밝아야 할 대낮에 일찍이 없던 깊은 어둠에 갈 길을 더듬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어둠을 온 땅에 내리심으로 온 세상 사람들의 죽음과 이 한 사람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다름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곱마디 말씀 중에서 세 마디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처음과 세번째는 아버지여라고 하셨으며, 두번째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보통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의로우신 아버지”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께 질문한 것은 여기서만이 유일합니다. 보통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은 하늘의 의로우심에 호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둠 속 어디에선가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벗어나 아무도 없는 숲으로 떨어진 느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의로우심에 매달리십니다.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이 옳게 일을 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음을 아시는 그 순간의 신비함에도 불구하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 중에서 엘이라는 이름은 강한 힘과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별명이었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다가오는 그 고난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통 가운데서 능력의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버리셨음에도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형통할 때가 아니라 고난을 받을 때에 진노하심으로 심판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셨던 것입니다.

‘엘리 엘리’ 하나님을 향한 이 짦은 호칭은 예수님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으나,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가 압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었습니다.

고난이 닥치고 영적인 어둠이 우리를 둘러싸고 어찌할 수 없는 시련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일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완전한 우리 인생들의 믿음의 한계인 것입니다.

새벽의 안개가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먹구름의 어두운 그늘이 우리의 앞길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할 때마다 의심은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신뢰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눈을 뜨십시오. 그리고 골고다 언덕을 보십시오. 나무 위에 높이 달린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부르짖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예수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비록 죄 가운데 살았다 하더라도 누가 예수님처럼 이렇게 자기의 죄를 인하여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죄인 중 누가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비록 사망의 어둔 길을 지나고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광야를 지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용납된 그분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희망을 잃은 상황의 수수께끼입니다. 좌절된 마음의 물음입니다. 그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마음을 삼키고 있다는 가리킴입니다. 마음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릅니다. 행동, 감각, 욕망을 통제하는 인격의 부분이 질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은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영원히 계속됩니다. 하늘이나 땅의 어떤 목소리도 엉킨 실을 풀기 위하여 주어지지 않습니다. 신선한 아침의 구원을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고통스러운 악몽처럼, 결코 풀리지 않는 절망적인 수수께끼는 영원이 계속됩니다.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당해야만 하는 지옥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놋쇠 같은 하늘에 대고 수수께끼 같은 “어찌하여”라는 소리를 지르고 계십니다. 되울리는 끝없는 메아리… “어찌하여” 이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더욱 심각합니다. 그리고 지치고 괴롭고 혼돈된 마음이 죄의 결과들 중 하나라는 풍부한 증거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심리학자들이 그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려진 이라는 단어는 모든 언어에게서 가장 슬픈 단어입니다. 헬라어에서그것은 세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to leave 방치하다, down 패배, in 장소” 이 말의 전체적인 의미는 패배하였고 도움 받을수 없는 누군가를 적대적 환경 한 가운데로 버리는 그러한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부터 점점 버림받고 고독해지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와 함께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지키신 후에 유다가 먼저 그를 배반하고 떠났고, 열한명의 제자들만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택하시고 깨어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동산에서 붙잡혔을때, 제자들이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 뒤에 베드로와 요한만이 병사들을 따라가 대 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그를 외면해 버렸지만 아버지만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위에서는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을 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십자가위에서 구세주가 느꼈을 고독감,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신비함인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계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그 죄를 그냥 간과할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고립시키며 그 안에 공허함을 불러 일으킵니다. 또한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때, 하나님 앞에서 숨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를 지었고 거룩한 하나님을 대하기가 너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 외에 어느 누구도 결코 져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다고 느낄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져버리지 않습니다.

암흑이 세시간 동안 계속되었을 때, 예수님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성경에는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었을 때 그 고통이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초자연적인 암흑은 비밀스런 암흑으로서 마치 하나님이 십자가 주위에 커튼을 두른 것과 같습니다. 이 세시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구원 사역을 완성하였고 세상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번, 오로지 속죄의 날에만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것도 대제사장 혼자 들어가야 했습니다(레16). 그리고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언약궤 앞 속죄소에 뿌려야 했습니다. 이 의식은 대제사장 혼자서만 행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지켜보실 수 있었습니다.

암흑이 계속되는 세시간 동안 예수님은 아버지와 영원한 계약을 성취시키셨고, 그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임무를 다 수행하셨습니다. 그 임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구속의 임무로 예수님만이 성취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시간 동안 침묵하신 뒤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갈보리의 비극은 네가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인간도 한 일이 있습니다. 온전하신 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나무에 못 박음으로써 인간의 타락을 드러냈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단도 한 일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여 끝없는 적개심을 나타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죄인을 대신하여 의인이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지신 분에게 진노를 쏟아내어 거룩함을 나타내셨고,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인간의 필력은 흠없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감히 기록할 능력도 없고 기록할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셔서 인간은 그 분을 직접 뵈면 살 수가 없습니다.너무나 거룩하셔서 천상도 그의 눈에는 정결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거룩하셔서 천사들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얼굴을 가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는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합 1;13)”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구주를 보지 않으시고 외면하여 버리신 것은 그가

우리의 죄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우리 모두의 악을 담당케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대속자인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대속자에게 쏟아져야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질문은 하나님께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시편 22편에 있습니다

시편 22편은 네번째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3절에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는 옳지 않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합니다. 당신은 거룩하시며 내가 담당해야 할 내손의 모든 빛을 처리하는데 공정하십니다. 갚아야 할 내 백성의 죄를 모두 내가 지고 있으므로 당신의 날선 칼로 날 찌르는 것이 옳습니다. 당신은 거룩하시며 공명정대하신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죄의 극악무도함과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목도합니다. 노아때 세상이 물로 뒤덮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과 불로 멸망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진노의 잔을 마시셨고, 정의의 칼에 고난을 받으셨으며, 아버지께 거절당하셨고,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은 아들이라도 용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어떻게 지독한 비극을 예감했었는지 보십시오. 지형 자체가 해골과 같습니다. 쏟아지는 거대한 진노 아래서 떠는 땅을 보십시오. 태양이 얼굴을 돌렸을때, 하늘을 보십시오. 땅은 어둠으로 뒤덮였습니다. 죄를 벌하시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진노를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끔찍한 심판을 견디어 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거룩하신 분, 죄를 미워하심이 무한하신 분, 순전하게 성육신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죄를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노의 폭풍 앞에 굴복하셨고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수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가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갈보리가 보여주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라면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있을지라도 심판하실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의는 충족되었고, 하나님의 거룩은 입증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었습니다. 저주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날에 그의 왼편에 선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고 하실 말씀에서 명백합니다. 저주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서 추방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단절되어 성문 밖에 계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를 삼으심으로 문둥병자와 같이 되셨습니다.

죽음의 장막이 땅을 뒤덮었던 암흑의 세 시간이 가지는 의미를 보겠습니다. 초자연적인 어둠이었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기 때문에 밤이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천문학자는 십자가 처형이 있던 시간에 달은 태양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는 나의 대속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주와 하나로 인정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허물을 인하여 찔리셨고, 나의 죄악을 인하여 상하였습니다. 죄가 제쳐진 게 아니라 제거되었습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서 죄를 심판하셨기 때문에 믿는 죄인들을 그 아들 안에서 용납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3:3).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졌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구주의 외침은 모든 잃어버린 영혼들의 마지막 상태를 예고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진실된 믿음을 가졌다면 그 날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을 경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또한 너무나 자비하셔서 위협적인 말씀이 실제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말들을 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뱀이 하와와 논쟁한 것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뱀은 간교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누구의 말이 진실이었는가? 사단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실제가 되었고, 태초의 조상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바로 그 날에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다가올 날에도 이것은 입증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십니다. 구주를 보내셨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케 하시는 사실이 이를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시면서 지금까지도 제멋대로의 반항을 참아 주시고 이 순간까지 은혜의 날을 연장해 주셨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비의 날은 공 종말이 올 것입니다. 소망의 문은 곧 빠르게 닫힐 것입니다. 죽음은 한 순간에 우리를 넘어뜨릴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아니라 정의로 다루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비웃고 있다면 그 자비를 갚으실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내려진 영원한 형벌을 집행하실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그리스도의 이 절규는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입증하는지만 상기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가 있으면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에게서 죄를 발견했을 때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죄가 있는 채로 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용서받으리라는 희망이 가당하기는 합니까?

그리스도가 백성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를퍼부으셨다면, 우리가 죄를 가지고 죽었을 때 여러분에게 진노를 퍼부으실 것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명백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겠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하나님은 아들이 죄인을 대신하여 섰을 때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주를 거절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시간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 암흑을 견뎌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알게 하고,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오해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었습니다.

우리는 암흑 속에서 주님의 부르짖음을 통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견뎌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주님의 고통 때문에 빛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