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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9:26-27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시고 또 그 제자에세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하신대.
예수님은 슬퍼하는 자 없이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당시 슬퍼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동정하는 희망을 빼앗긴 놀란 영혼의 그 작은 무리들은 조롱하는 무심한 나머지 군중들과 강한 대조를 보입니다.
이 가상 3언을 말씀하시기 전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여러 설명이 있지만, 4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이모인 살로메, 세베대의 아내입니다. 이 여인은 사도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또 한 여인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이 사람은 아마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마 27:56, 막 15:40,47). 그리고 마지막에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누가복음 8장에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주님의 은혜로 온전해진 여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실 때에 예수님 뒤에는 두 무리들이 따라가고 있었다고 상세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백성이라고 이름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들의 큰 무리였습니다. 꼭같은 십자가 사건을 대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갈릴리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은 긍휼과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던 이적과 기사, 치유와 위로와 교제를 잊고, 이제는 끌려 가시는 예수님이 처형받는 것을 구경하는 정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과 다른 모습으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눅 23:27)”
그러면, 왜 이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울어야 했을까요?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들은 피어린 통곡을 한 것입니다.
로마 병사들은 이 여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막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흩어져 돌아갔고 주님은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병사들은 예수의 시체를 거두어 갈 때를 기다리며 십자가 아래 앉아서 제비를 뽑으며 옷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여인들은 큰 제재없이 십자가 바로 아래, 주님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까지 다가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때,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여관에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낳아야 했으니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헤롯이 어린아이의 생명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들을 위하여 어쩔수 없이 애굽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동안에 자신의 백성에게 미움을 받고 백해받는 아들을 보면서 그녀의 마음은 슬픔으로 짓눌렸을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 앞에 선 그녀의 심정이 어떠할지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모세 율법에 따라 어린 예수의 부모는 예수를 성전으로 데려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시므온이 예수를 팔에 안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그리고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 2:34-35)
그녀의 많은 특권 때문에 가장 가슴 아픈 일을 당하는게 정말일까? 시므온이 말했을 때 가당치도 않아 보였지만, 정확하게 비극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유아기와 어린 시절을 지나 공생야 사역을 하시는 내내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늘에서 배경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들의 고난이 극에 달하는 시간에 세상이 그녀의 배에서 나온 아이들 내칠 때, 그녀는 십자가 곁에 서 있습니다. 마리아는 끔찍한 십자가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이 사라진 채, 뜻하지 않은 상황에 당황하고 온 몸이 얼어붙었지만 죽어가는 그에게 사랑의 금사슬로 엮이어 거기 서 있습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속 생각과 감정을 느낄수 있습니까?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는 것은 분명 날선 칼입니다. 한 인간의 탄생에 그런 축복이 없었고, 비인간적인 죽음에 그런 슬픔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어머니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죽어가는 사람의 어머니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은 자가 그녀의 자식입니다. 가시면류관이 둘린 이마는 그녀가 맨 처음 입 맞추었던 이마였습니다. 처음 걸음마를 뗄 때, 그녀가 보호해 주었던 손과 발이었습니다. 그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갔고, 친구들은 그를 저버렸으며, 백성들은 그를 경멸했지만 어머니는 십자가 발 밑에 서있습니다. 누가 그 어머니의 마음을 짐작하거나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칼이 서서히 마리아의 영혼을 관통하고 있을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누가가늠할 수 있을까? 그녀의 슬픔은 극심했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못 박힌 손과 발이 마비되고 멍드는 것을 보았지만, 손으로 따뜻하게 안아 줄수 없었습니다. 아들의 목마름을 느꼈지만 갈증을 풀어 줄 수 없었습니다. 영혼의 적막한 심연 속에서 그녀는 괴로웠던 것입니다.
군중들은 조롱하고 강도들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대제사장들은 비웃고 군병들은 냉담하며 무정하고 구주는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끔직한 조롱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십자가 옆에 서 있었습니다. 슬픔을 억누르고 서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주님이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닌 ‘여자’로 부른 것은 요한복음에만 있으 면 두 번 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설명하지만, 네 번째 복음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모든 인간관계를 초월하시므로, 여기에서 주 예수께서 마리아를 여자로 부르는 것은 완벽한 일치입니다.
헬라어로 ‘여자여’는 비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여자여 라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미 슬픔이 봇물처럼 가득 차서 흐느껴 우는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름으로써, 그 가득찬 아픔을 터뜨릴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육신을 낳아 준 어머니 마리아를 마지막 순간까지 위로하기 위해서 여자여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를 여자여로 부르신 것은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로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혈육에 매여 있을수 없는 만왕의 왕이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주가 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자기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리아에게 요한을 소개하셨습니다.
“보소서 아들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통해서 이제 마리아의 관계에서 아들로서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고,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셔야 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요한, 줄곧 당신을 따르던 제자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가족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영적인 가족들이 자기 육신의 가족들보다 더 사랑스러워지는 일은 참으로 변화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오히려 정상적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요한과 마리아를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로 묶어 놓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십자가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의 심령이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가 서 있는 교회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참된 하나됨입니다. 한 사람 한 지체가 각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고 그 십자가로부터 배우며 못 박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를 기억합니다. 이 교회가 십자가에서 떠났을 때, 당파가 갈라졌고, 파쟁했으며, 서로 분쟁했습니다. 서로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십자가를 외쳤을 때, 그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성령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그들의 마음 속에 십자가의 사랑이 새겨질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종과 자유인이 얼싸안고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한마디로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눈을 돌려 자신에게 눈을 떼어 죄인을 위해 죽으신 구주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의 전형적인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원, 죄의 사하심, 하나님을 영접, 이 모든 것은 잘난 행위나 선한 일이나 종교적 의식에서 얻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보는 것에서 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광야에서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한번 바라봄으로써 여호와께서 믿음의 대상으로 정하신 것을 바라봄으로써 고침을 받았듯이 오늘날에도 죄와 죄의 능력에서 구속, 깨진 율법의 저주와 사단의 속박에서 놓임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뱁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라보는데 생명이 있습니다. 고난을 받는 신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시기 위해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의로운 자,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그를 바라 본적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도 그를 “보아야만” 했고,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보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
마지막에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십자가상에서의 세 번째 말씀은 요한 한 사람을 상대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때 유일하게 그 현장을 지킨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막 14:27) 고 미리 말씀하셨고, 마가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27)고 덧붙였습니다.
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그러나 이 요한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었습니다. 그후 요한은 다른 제자들 보다 가장 먼저 회개하고 이 십자가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요한의 마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인해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구세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분의 편으로 돌아 온 것을 아는 것은 아는 것은 가장 다행스런 일입니다. 주님은 이런 요한에게 중요한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어가시는 십자가를 향하여 때늦게 달려온 요한을 용납하시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심으로 실패한 요한을 향해서도 변함이 없는 당신의 관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그에게 당신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신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요한을 향한 은총만이 아닌 이렇게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몸에서 떨어지고 있는 십자가의 보혈을 맞으며 슬피우는 여인과 같은 사람들로서 주님 곁에 서 있습니까? 여러분은 서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기억하며 주님 곁에 서시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렇지 못한 자들도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채찍과 매질로 고난 당하시고 사형의 언도를 받으실 때에 비록 그분을 변호해 주지 못했지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갔을 때에 주님은 요한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아 내 육신의 어머니를 너에게 부탁한다.”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회개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새로운 임무를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 앞에서도 주님을 사랑하기에 십자가 곁에 견고히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위하여 환경을 능가하는 사람으로 주님의 고난의 현장에 흔들리지 말고 서 있습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일에 실패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소망은 오직 골고다의 예수 그리스도 뿐이니 그분 곁으로 달려오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됩시다. 비록 잠시 주님을 떠나고 마땅히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할 참된 충성을 드리는데 실패하였다 할지라도, 주님은 참된 사랑과 참회함으로 오직 십자가 앞에 나오는 우리들을 용납해 주실 것입니다. 그 이름을 부르시고 당신 옆에 세워주실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런 영적 회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녀를 네 자신의 어머니로 모셔라 나를 향한 너의 사랑을 그녀를 온유하게 돌보면서 나타내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의 손에 맡기신 우리 주님의 행동은 어머니가 과부였다는 점에서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요셉의 죽음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없지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어느 시점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열두살 때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된 사건 이후에 마리아의 남편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행동에는 이런 측면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구약에는 주 예수님이 현명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은 “보라 네 종이 형통하리라”(사 52:13) 어머리를 살아하는 제자에게 맡기시면서 구주는 그녀의 보호자가 될 사람을 선택하는데 현명한 분별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마도 어머니만큼 주 예수를 잘 이해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요한만큼 주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한 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하나로 묶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묶는 친밀한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둘은 서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것입니다.
게다가 경이롭고 영광스러운 일이 요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묵시 속에서 이 제자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계시의 시간을 기다리는 30년 동안 구주와 가장 친밀하고 깊은 관심 속에서 살았던 그녀와 계속 함께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계시를 준비하는 방법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 마리아와 요한이 함께 있는 것이 타당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거처를 선택하시고 동시에 영적 교제의 복을 누렸던 사랑하는 제자에게 인생의 길동무를 주시는데 신중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또한, 요한이 마리아를 요한의 집에 모셔갔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다음 장에 기록된 사건이 설명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요한은 동료를 앞질러 달려가 먼저 무덤에 도착하지잠 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성격대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 잘 개켜진 세마포를 봅니다. 그리고 나서 요한이 들어가 보고 “믿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부활과의 약속을 이해하지못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믿고 난 후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요 20:10)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간 이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 19장 27절을 보면, 그 이유는 분명해 집니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지금 그는 구주가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을 알고 그녀에게 이 기쁜 소식을전하려고 급히 “집으로 돌아간다” 이 기쁜 소식을 어느 누가 그녀보다 더 기쁠 수 있을까”
죄인들을 위한 구주로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있었던 일 중에 또 앞으로 이 세상이 목격할 일중에 가장 중대하고 가장 거대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진노한 정의를 만족시킬 찰나였습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진 목적, 인류가 창조되어진 목적, 모든 세대가 기다린 목적,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바로 그 목적을 성취하는 일을 막 하시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적인 인연의 책임도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육신의 어머니였던 그녀를 위해 준비하십니다.
이 가상 3언은 가장 완벽한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이 어우러져 있는 그의 인격에서 가장 경이로운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복음서가 그가 인간이었음을 육신이 되신 말씀이심을 신중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여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어둠의 권세와 씨름하면서도 그 와중에 인간의 부드러움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것이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함입니다.
죽어가면서도 어머니를 근심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품행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완벽했습니다. 그의 타고난 소박함이 가장 돋보입니다. 과시하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능력은 상당수가 걸거리, 오두막, 고난을 당하는 자들의 작은 모임에서 나타났습니다. 의미가 풍부해서 오늘날에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다함이 없는 그의 말씀의 상당수는 친구와 함께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언급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비교해 보면, 세상을 창조한 일이 사소하게 퇴색될 만한 일을 수행하고 계셨습니다. 마치 나사렛의 집에 어머니와 함께 계셨다면 그렇게 하셨을 것처럼. 구약에서 “그 이름을 기묘자라”(사 9:6)고 말씀하신 것이 정확했습니다.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이 놀랍습니다. 맺으신 모든 관게들이 놀랍습니다. 인품에서 놀랍고, 행하신 일이 놀랍습니다. 삶에서도 놀랍고 죽음에서도 놀랍습니다. 우리는 그저 경탄하고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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