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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영국의 코멘트리 성당은 화려함에 감탄하는 곳입니다. 이 성당은 1962년에 새로 헌당한 것인데, 그전의 성당건물은 1940년 11월 4일 저녁에 폭파당했고 그 잔해가 새 성당 옆에 남아있습니다. 이 잔해 속에서 인상 깊은 것이 있는데, 새까맣게 타버린 십자가 뒤쪽 벽에 새겨진 두 마디 글씨입니다.
“아버지여 용서하소서” 이 글은 건물이 파괴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면서 고통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드린 기도였습니다.
이 건물의 잔해를 보면 인간의 이기심과 죄악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통의 십자가에서 남기신 첫 말씀은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습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사죄의 탄원이었습니다. 참으로 깊은 의미와 심오한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병자들을 향해 더 이상 손을 내미실 수도 없습니다.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두발이 잔인한 나무에 붙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더 이상 가르치실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주를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바로 기도사역입니다.
본문은 “이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23:32~33, “또 다른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해골이라 하는 것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빌라도 법정에서 죄 없으신 몸으로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그리스도께서 능욕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수욕은 형장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그분을 강도와 같은 부류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에는 인간들아 최악의 죄룰 저질렀을 때입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 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 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내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눅 23:35-37)고 외치며, 그리스도를 능욕하고 있었던 그 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시면서 취한 것이 없었고 마지막에는 통옷으로 짠 한 벌 옷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마저도 빼았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소유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군병들은 제비를 뽑고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깨뜨려드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거기서 한 없는 모욕과 고통을 받으시던 “그때에” 주님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해융에 신포도주를 적셔서 갈대에 꿰어 주는 그것을 주님은 포도주인줄 분간을 못하실 정도로 고통 가운데 시달리셨습니다(마 27:34). 몸을 못 두개에 매달려 있으며, 온 몸은 지쳐 있고 혈관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극한 상황에서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입니다. 예수님 안에 아들 됨에 대한 의식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가장 어두운 곳에 있었을 때, 그가 날뛰는 늑대와 같은 적들에 의해 괴롭힘 당할 때, 그리고 고통과 버려짐의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 그는 여전히 “아버지”라고 말하였습니다.
환경이 끊을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하나됨. 그것을 누리고 살아가며 그 속에서 숨쉬는 아들됨의 영적 생활, 죄악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 갈 힘이 오직 거기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의 음침한 골짜지와 같은 고난의 계곡을 지나면서도 노래를 부를 심이 거리로부터 나옵니다.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시련의 때에도 시온의 노래를 잊지 않을수 있게 하는 힘이 거기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어떻게 영혼 깊은 곳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이토록 친밀하게 부를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이 고난이 당신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하시는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명 의식은 확고부동합니다. ‘아버지여 나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점없는 어린양이었으며 세상의 죄를 위하여 완전하게 내어 준바 되셨습니다.
그의 첫 번째 생각은 그에게 가해지는 상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는 상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의 기도는 헬라어원어를 통해서만 잘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는 헬라어 원어로 보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니’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동사가 과거시점에서 계속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장면으로 구성이 가능합니다. 해골이라는 곳에 도착한 후 예수님은 주위를 둘러보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
백부장이 그를 땅에 밀치고 그의 팔을 가로대에 묶었을 때, 예리한 못이 떨리는 양 손바닥을 뚫어 찢을 때, 십자가에 올릴 때, 군중들이 저주하며 욕할 때, 군병들이 그의 옷을 제비 뽑을 때, 똑같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날 얼마나 여러 번 그 기도가 하늘의 슬픔 한 가운데를 관통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확신이 불타는 호소의 포화처럼 은혜의 보좌에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본문의 의미를 몇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바로 그날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성령님은주님의 수난을 모든 주변 상황들까지도 함께 완벽한 그림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에 구주가 ‘범죄자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예언(사 53:12)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하시는 현재의 사역을 언급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 주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행위를 언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적을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것은 이사야 53장에 있는 놀라운 예언 중 하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구속자의 굴욕과 수난에 대해 적어도 열 가지는 말하고 있습니다.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고, 간고를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이다. 상하고 찔리고 채찍에 맞으며 순순히 도수장으로 끌려간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하다. 사람의 손에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상처받는다. 영혼을 죽음에게 내어 준다. 부자의 무덤에 묻힌다. 그리고 덧붙여서 범죄자와 같이 헤아려지고 마지막으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는 자신의 살인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간구하셨습니다.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마태복음 9:6에는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고 하셨으며, 그는 더 이상 땅에 서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땅에 들리어’(요 12:32) 계셨습니다. 게다가 십자가 위에서 그는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분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앞에서 간구하는 자의 자세를 취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외칠 때 그분은 온전히 자기 백성들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이나 권리를 갖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죄인들을 위해 중보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죄와 그 죄의 결과를 심판하십니다.
죄는 우리가 그것을 알고 지었든 모르고 지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눈에는항상 죄입니다. 알고 지은 죄가 그렇듯이 모르고 지은 죄도 확실한 속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우리의 무지의 수준에 맞추어 자신의 의의 기준을 낮추지 않으십니다. 무지는 무죄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지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고도 충분히 자신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모르고 지은 죄도 주님의 기도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넷째, 인간의 마음이 눈멀었습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는 주님의 기도는 무슨 뜻 이었을까요?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것인지를 몰랐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구주를 죽인 것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무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사잉 왜 이 귀한 십자가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합니까? 세상이 왜 멸망받을 자신들의 영원한 운명을 외면한채 살아갈수 있습니까? 이는 모두 무지때문입니다.
그들은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눈이 멀어 보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성취하셨던 구약의 예언들은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에 충분히 분명했습니다. 그이 가르침은 독특했습니다. 그를 정면으로 비난하던 자들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만족을 구하지 않으셨으며, 선한 일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시정일관 자기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하늘의 인정을 받은 삶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실천하는 모범이 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르침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습니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진리이신 그 자신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에서의 가르침을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예증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에서 모범을 남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게인적으로 적들을 용서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44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용서하라고 권고하지 않으시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말아야 할까요? 성경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칩니까?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3-4)
여기에서 우리는 용서를 말하기 전에 잘못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분명히 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판단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슬픔을 증거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잘못한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회개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증오나 적개심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삶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것처럼 대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그 잘못을 묵과하여 의의 명령을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의의 명령은 믿는 자 가 항상 준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가 없는데도 항상 용서해 주실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선포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어떤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뉘우치지 않으면 나는 용서 할 수도 없고 그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것처럼 대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하여 마음에 앙심을 품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온전한 모범의 가치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께 그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사람에게는 크고 우선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선 필요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며 죄인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숭고한 이상을 선택하고 훌륭한 결단을 내리며 탁월한 삶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들이 다 헛됩니다. 죄 사함의 문제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이며 극히 중대한 것입니다. 아직 죄가운데 있다면, 수많은 동료들의 존경을 받아보아야 별 거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라면 아무리 일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해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 있는 가입니다.
또 필요한 것은 죄사함을 얻는 방법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여기에서 하나님의 죄 사함과 대부분의 인간의 용서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게 중요합니다. 대체적으로 인간의 용서는 관대함, 흔히 느슨함의 문제입니다. 용서는 정의와 의로움을 희생할 때 나타납니다. 세상의 법정에서 재판장은 두가지 대안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합니다. 재판관은 법대로 형을 집행하든가 아니면 법의 명령을 묵살해야 합니다. 전자는 정의이고, 후자는 자비입니다. 재판관이 법대로 집행하면서 자비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3의 인물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의 형을 대신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정의를 저버리면서 자비를 베풀지는 않으십니다. 온 세상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요? 하나님의 진노의 법을 온전히 만족시키는 한 분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나무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사람들의 죄를 지심으로써 가능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기도는 그들이 하는 일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때까지 그들의 죄에 대한 선고를 유보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의 소멸 요청이 아니라 결과의 연기 요청입니다.
여기서 ‘용서하다’ 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신약 용법은 이점을 포함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일한 단어가 마태복음 19:14, ‘용납하다’로 번역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을 용서하라고 지시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그대로 놔두소서, 용납하소서, 지금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를 따르는 적은 무리들을 그의 증거자로서 보낼 준비를하고 계셨습니다. 그의 부활이후 그리고 오순절 이후, 그의 죽음과 장례와 부활의 참 의미를 전할 증인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죄인들에게 회개를 가져다 줄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까지 이 불쌍한 죄의 무리를 죽이지 마소서. 그들은 이 비극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퍼지면 그들은 진리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회개하며 지혜롭게 선택하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처벌이 보류된 잠시 동안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황금의 기회가 있습니다.인간은 그가 원한다면 빚을 청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기가 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예수께로 돌이키지 않는 한 그 연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구주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외치신 것은 그가 흘리신 피 때문이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께서 드린 속제의 희생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적들의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바로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직접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는가? 죄사함을 받았는가? 은혜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죄 사함은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 를 다 포함합니다.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믿는 우리들의 죄를 지지 않으셨는가? 주께서 돌아가셨을 때 당신의 모든 죄는 미래의 죄가 아니었는가? 그리스도는 당신의 과거의 죄만큼이나 미래의 죄도 지셨습니다. 나는 영원히 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곳에서 벗어났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면, 어떻게 정죄함이 있을 수 있을까? 믿는 자들은 영원히 모든 것을 죄사함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여 심판을 미루소서.” 우리는 그 분의 인내가 더 오래 지속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자비를 받아들이십시오! 지금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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