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가상칠언
요한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요한복음 10:11, 십자가를 택하신 것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Wells는 소설 “소경의 나라”에서 한 여행객이 가파를 절벽에 의해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단절되어 있고 주민 모두가 소경인 한 이상한 마을에 도착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이상한 마을에서 지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곳의 주민들로부터 이상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주민들은 그 여행객에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뇌는 눈이라고 불리는 그 이상한 것에 의해 병이 들었소. 그것들이 뇌를 계속적인 흥분과 혼돈의 상태에 놔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눈이 제거되어지기 전에는 그는 결코 정상적으로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던 중 여행객은 한 눈이 먼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는 그들이 행복하게 함께 살도록 그의 눈을 제거하라고 탄원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동산 위로 해가 뜨는 것과 하얀 꽃들이 있는 아름다운 목초지를 보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그 암흑의 마을에서 만족할 수 없게 되고 빛 가운데서 걸어다니는 곳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죄로 저주받은 우리 세상의 어둠 속으로 다니셨을 때에 그분께 대한 인간들의 태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상식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애썼습니다. 그것이 실패하자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위 소설은 물론 세상의 어둠과 만나고 싸워 마침내 그 어둠을 정복하고 그것을 생명의 빛으로 바꾸어버리신 예수님의 태도와 그 힘을 묘사하는 데에는 역부족입니다.

 

자 그러면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이 독생자이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나중에 생각해 내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우발적으로 행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 13:8) 이었던 것입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행한 설교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다”(행 2:23)고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그곳에 있었으며 갈보리의 고난은 예수님에게 갑자기 닥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몇 년 후에 베드로는 첫번째 서신서를 쓰면서 예수님을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벧전 1:20) 어린 양이라 칭하였습니다.

바울도 베드로처럼,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미리 계획하신 일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딛 1:2) 우리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면, 그리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엡 1:4)해서 생명 책에 기록하셨다면(계 17:8), 우리를 구원하려는 계획도 이미 영원 전에 세우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면서 자신이 죽으러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 낙담해 있는 두 제자에게 성경을 풀어 자신에 대해서 설명을 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4;26).

 

인간들의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하신 일이었으며, 인간이선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었다. 같은 날 저녁에 예수님은 열 한 명의 사도에게 나타나셔서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 기록(눅 24:46)되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양떼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신 것입니다(요 10:15-18).

 

메시아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상징을 통해서 이미 예언되었으며,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요단강으로 오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효 1;29, 36)”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삭이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 라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가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니라”(창 22:8) 고 했던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 강에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면서 그의 희생적인 죽음을예언하였습니다(마 3:13-17, 막 1:9-11, 눅 3:21-23, 요 1:19-34)). 당시는 예수님만 그 의미를 알아채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세례주는 것을 망설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세례를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이 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그 말씀을 따라 강가로 갔으며, 성령 하나님이 비둘기 모습으로 예수님에게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생하게 묘사한 구절이 다섯 개 있습니다.

첫번째는 어린 양의 비유입니다

 

두번째는 허물어진 성전의 비유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처럼 주님은 여러 번 비유를 들어 자신을 설명하셨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육체는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악한 인간들은 그무법한 손으로 거룩한 성전되신 예수님의 육체를 마음대로 농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의 왕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세번째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한 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민수기 21:5-9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약속된 메시야가 그처럼 수치스럽게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벌레에 비유하기도 했지만(시 22;6), 어떻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기적을 행하는 위대한 선생이 자신을 사악한 뱀에 비유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유데인들은 약속된 메시아가 “영원히 계신다”(요 12:32-34)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배워왔기 때문에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무척 당황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은 최고의 굴욕이었으며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신 21:22-23) 고 기록된 것처럼 저주 아래 놓인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고,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된 것입니다(갈 3:13).

 

네번째는 예수님을 선한 목사로 비유하였습니다. 이는 어린 양과 성전, 뱀의 비유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승리자가 아닌 희생 제물로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잘못은 선한 목사 비유에서 다시 되 돌릴수가 있습니다. 즉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릴줄 압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

만약 여러분이 고속도로를 주행하다가 길 위에 있는 양 한마리를 보았다면, 어리석은 동물을 가여워하면서 그 양을 피해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양을 피하면 사고를 내게 되고 그러면 사람이 죽을수도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사람을 구하고 그 동물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도 동물보다 인간이 훨씬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11). 그러나 선한 목사이신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위해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라며 기꺼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다섯번째는 땅에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는 모습입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셔서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래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34)

 

주님의 죽음과 매장은 대적들이 승리하고 하나님이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예수님이 실패한 것 같지만, 실상은 이제까지의 그어떤 승리보다도 가장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하고 귀신들을 쫒아낸 것보다 훨씬 더 큰 승리였던 것입니다. 니고대모와 요셉이 무덤 속에 갖다놓은 예수님의 육체는 죽은 씨앗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삼일만에 그 육체는 권능과 영광 중에 다시 부활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 복음의 씨앗은 세계 곳곳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골 1;5-6)

 

이제까지 살펴본 다섯 가지 비유는 각각 독특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은 제단 위의 제물과 같은 예수님의 모습, 죽어 마땅한 우리를 대신해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 제사장은 가능한 한 그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예수님의 육체는 무너지는 성전과 같은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었으며, 잔혹한 죽임이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들림 받은 뱀처럼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자발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게 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찬양뿐입니다.

 

십자가 형이란 무엇입니까?

죄를 지은 사람 중에도 가장 극악한 죄인을 죽이기 위한 형 집행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사형제도는 너무 잔인해서 지배민족이던 로마인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형에 매달기 전에 채찍으로 매를 칩니다. 신약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그 채찍은 아홉 가닥의 가죽을 엮어 된 것으로서 끝에는 날까로운 쇠부치나 짐승의 뼈를 깍아 만든 뾰족한 물체들이 달려 있어서 몸에 채찍이 감길 때 살점이 찢어지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에 처형될 죄수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습니다.

수직 기둥이 땅에 고정됩니다. 그런 다음 가로놓여질 나무가 땅에 놓여지고 선고받은 사람의 팔이 거기에 묶여집니다. 못 하나가 오른손바닥을 뚫고 들어갑니다. 그 다음엔 왼쪽입니다. 다음 줄이나 사다리를 이용하여 횡대에 못 박힌 희생자가 들어 올려지고 수직 기둥에 고정됩니다. 원래는 못을 죄수의 손바닥에 박았는데 손이 찢어지니, 나중에는 손목 가까운 곳에 대못을 박았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썼습니다. 5~7센티미터에 이르는 가시들로이루어진 면류관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로마병정과 유대인들은 그분을 돌로 치고 주먹으로 때리는가 하면, 침 뱉고 욕설로 모욕했습니다.

희생자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주요 신체 기관들은 대개 손상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고통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느낄 기력이 남아 있는 한 모든 고통을 다 받게 하는 사형제도라는 데 이 십자가 형벌의 잔인함이 있습니다. 못박힌 손과 발에서 서서히 피가 빠져나가고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땡볕 아래서 고열과 함께 땀을 흘릴 때, 몸에서는 피와 수분이 같이 빠져나갑니다. 그 다음에 찾아 오는 신체적인 현상은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은 두통이라고 합니다. 온 몸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손과 발의 못박히 상처의 고통도 극심하지만, 출혈로 인한 체내의 통증은 가히 형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수들은 십자가에서 혼절하다가는 깨어나고 깨어났다가는 혼절하곤 하면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자 이렇게 십자가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제부터 설명할 십자가상에서 일곱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꼭 필요했으면,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말씀하였겠습니까?

 

골고다는 구세주의 은총과 인간의 반역 사이의 대조가 가장 강한 곳입니다. 골고다는 계시와 역사와 체험의 핵심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의 최선의 일을 하셨고 인간은 최악의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곳에서 믿음이 의롭다 여김을 받으며 소망이 보증되어지며, 사랑이 승리를 거둡니다.

 

갈보리에서의 모든 의미심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의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구세주의 일곱 마다 말씀은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인류에게 그분을 알게 합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은 7가지 입니다.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어둠이 그 비극적 장면 위로 내리기 전에 세번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 말씀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용서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말씀은 구세주의 긍휼 어린 마음을 보여 줍니다.

 

둘째,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눅23;43).” 이 말씀은 믿는 강도에게 하신 말씀인데, 구원의 확실한 약속이었습니다.

 

셋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어둠 속에서 모든 말씀 중 가장 이상한 말씀이 들려옵니다.

 

넷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마 27:46)” 이 말씀 속에는 속죄의 참된 본질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주님의 깊은 고뇌가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어둠이 지나고 난 후에 세 문장이 더 있었습니다.

 

다섯째,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이 요청은 주님의 참된 인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의 죽으심의 모든 국면들이 성경과 부합해야 한다는 당신의 소원을 보여 줍니다.

 

여섯째, “다 이루었다.”(요 19:30) 이 말씀은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완벽하고 모범적이던 그의 생애를 언급할 뿐만 아니라 죄를 위한 완전한 속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애를 끝까지 주장하셨음을 보여 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버림받을 때 끊어졌던 주님과 아버지의 관계(막 15:34)가 회복되었음을 지시합니다.

 

이 일곱 말씀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는 복음서는 없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각각 하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가와 요한이 각각 세 말씀을 포함합니다.

 

이런 혹독한 십자가의 과정를 거쳐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종교는 무능하며 무지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 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천국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을 향한 길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십자가가 갖고 있는 의미가 그대로 천국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려고 또한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각각 구속과 헌신, 그리고 찬송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 순례자로 살아가는 길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고 우리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시 23;6)을 알고 있습니다.

 

한 목사가 죽어가는 성도에게 “당신은 이제 곧 생명의 땅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 성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생명의 땅에 살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제 죽음의 땅을 떠나 곧 생명의 땅으로 갈 것입니다.”

 

그의 대답은 진실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구속을 받고 십자가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