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역사서
열왕기상 19:9-13,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9-13,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물리치는 통쾌한 승리를 얻었지만,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여 홀로 도망하는 신세가 된 상태입니다. 깊은 좌절과 패배감,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 홀로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도 바닥날 지경에 이른 그런 상태입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업적과 성취 지향적인 결과 중심적인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엘리야의 이야기는 실패가 성공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성공의 결과일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실패는 성공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성공의 결과일수 있음을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야가 성공했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불의 사자가 어디에 있으며, 그보다 더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메시지는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용암같았고 대낮의 하늘을 가로질러 비취는 섬광과도 같았습니다. 그가 일구어 낸 업적은 모든 예언자들이 그렇게도 성취하고 싶어했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는 기근과 한발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3년 6개월동안 온 땅이 바싹 말랐습니다. 그는 바알의 예언자들과 갈멜산 정상에서 한판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결에서 그는 천추에 영원히 기억되는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는 또한 기근을 물리칠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바싹 마른 대지를 흠뻑 적시는 비가 온 것입니다. 그는 예언 사역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이세벨 왕후에게 쌍시옷으로 시작되는 욕을 대담하게 퍼부을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마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은 후련함과 통쾌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큰 만족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정도면 충분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은퇴하여 자서전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엘리야는 그런 엘리야가 아닙니다. 두려움과 자기 연민, 의심과 무력감에 압도되고 있는 왜소하고 초라한 엘리야입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삶의 의욕도, 자신감도, 사역에 대한 열정도, 헌신도 없습니다.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바싹 마른 개울처럼 고갈된 상태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이대로는 살수없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도망하는 도주자 신분으로 그리고 자기 자산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도망자 신세로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는 숨어 지내기 위해 이 동굴로 왔습니다.

 

그러나, 간혹 침울한 상태에 있는 것, 처해있는 불행이나 좌절들, 두려움과 걱정들을 생각하고 기억해 내는 것은 필요할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가장 훌륭했을때는 그가 우울증에 시달릴 때 였고, 마틴 루터의 천재성은 그가 침울하고 심적 압박 때문에 병에 걸렸을 때 드러났다고 합니다. 천재들에게 있어서 침울함은 종종 그들에게 능력과 삶의 목적 의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합니다. 고통처럼, 우울이나 의기소침함도 때때로 구속적일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침울했을때, 하나님이 다가가서 질문을 던집니다. “엘리야야 너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물론 하나님은 앨리야가 동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패배와 도피, 좌절과 허탈 속에 숨어 지내는 엘리야를 하나님이 모르실리가 없잖습니까.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4절)”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고,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있게 아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뒤에 승리감과 영광과 자긍심이 생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엘리야는 지쳤습니다. 성공에 지쳤던 것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지친 것이며, 너무도 심히 탈진해 버렸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19:9-13 “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이 묻습니다. “엘리야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실패는 성공 후에 지불하는 값”이라는 것을 교훈으로 배웠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 즉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신실함의 궁극적인 징표라는 것”을 또 배우게 됩니다

 

수 많은 일을, 그것고 너무나 잘 해댔던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할수 없는 지경에 놓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동굴 어귀에 세우셨습니다. 그가 할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사람이 침체에 빠졌을 때 스스로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침체라고 불리는 동국 어귀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행동만 있을뿐입니다. 강한 바람, 폭풍, 지진, 광풍, 격렬한 진동, 맹렬한 불이 지나갑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자연을 만드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라, 광야로 가는 길을 따라 다메섹으로 가라. 거기서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너의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 있다. 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엘리야는 자기의 일터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비천함을 통해서 강해졌습니다. 자신이 새로운 힘을 발견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새롭게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엘리야의 동굴은 예배에 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주 예배합니다. 혹은 자주 교회에 갑니다. 우리는 상처입은 사람들, 다친 사람들, 궁핍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삶의 거친 표면을 고르게 하는 장소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 온종일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깥으로 나가서 일을 해야 된다는 것도 잘 압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발견하기를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 생존을 위한 처방전, 용기의 영적 형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발견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힘과 능력과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천둥이나 번개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듣게될 것이라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을때, 우리는 동굴속에 있는 엘리야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제 가라, 내 은혜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