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 하며

빌립보서
빌립보서 2:5~11,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빌립보서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 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울이 있던 당시의 빌립보는 국제도시였습니다. 교회의 구성도 다양한 배경과 삶의 방식을 지닌 사람들로 커다란 다양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는 아시아 출신의 유대인 회심자이며 부유한여성 사업자인 루디아가 있었고(행 16:14), 그리스 태생의 여종, 로마인으로서 식민지를 위해 일하던 간수가 있었습니다. 구성원들의 배경이 이처럼 많이 달랐으므로 하나 됨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열을 낳을 수 있는 이기심이나 편견, 질투는 어떤 것이든 경계하라고 권면합니다.

1~4절에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모두가 마음을 같이하여 공통적인 애정을 함께 나누라고 합니다. 허영과 사리사욕과 당파심을 버리고 남을 자기보다 높이 평가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조화롭게 살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겸손과 헌신의 최고의 모범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입니다. 교리적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생활상의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서신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11절은 기독교회 초기 찬송가의 본보기입니다.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여러분 다미안 신부를 아십니까?

다미안 신부는 벨기에 사람으로서 1865년 33살일 때, 나환자를 격리 수용한 하와이 군도 몰로이카 섬을 찾아갔습니다. 그 누구도 지원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이 신부가 그 섬에 가서 교회를 짓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그곳의 나환자들은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같은 성한 사람이 사치로 돕는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문을 열지 않자 이 신부는 기도했습니다.

“저들과 같은 문둥병을 주십시오.”

그리고 나병이 걸리자, 이 신부는 주교에게 “드디어 하나님의 은총이 나에게 내렸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섬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고, 생지옥이던 그 섬은 평화의 섬으로 바뀌었습니다. 벨기에서는 2005년에는 역대 가장 위대한 벨기에인으로 다미안 신부를 선정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하늘 나라에서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야 했던 것은 그렇지 않고는 사람의 죄를 다스릴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위치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본체는 헬라어로 모르테인데, 사물의 외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본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나타내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으로부터 보게 됩니다.

  동등함은 헬라어로 이소스인데, 같다는 의미입니다.

모르테와 이소스의 두가지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신앙고백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신성이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인간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7~8절,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비어’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근본은 하나님이신데 그 형체를 벗으셨다는뜻입니다. ‘자기를 비어’입니다. ‘자기’라는 단어가 강조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이 ‘비우는’ 행위가 창세 전에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행하신 행위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해 줍니다.

 

그러면,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      그는 자기의 영광을 비웠다

-      근자기의 독자적인 권위의 행사를 비웟다

-      신성, 전지전능, 무소부재 등을 비웠다

-      하나님과 동등됨을 비웠다

 

‘종의 형체를 가져’라는 말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자기를 비우셨다’는 의미는 이사야의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했다’(사 53:12)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는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떤 큰 업적을 이루려 애쓰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빌립보의 백성들이 서 있던 곳에 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명예와 권리와 신용을 얻기 위한 싸움이 있는 곳에 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의 전 생애는 자기 부인과 자기 헌신과 자기 희생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 간결한 어구는 그리스도의 겸손의 위대성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못박는 사형 제도는 페르시아인에게서 유래되었고 로마인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아주 잔인하고도 모욕적인 것이었습니다. 노예, 강도, 암살자, 반역자에게 가해지는 사형방법입니다.

유대인은 특히 십자가의 처형을 혐오했는데, 그것은 이 처형이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렇게 처형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신 21:22,23; 고전 1:23)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인간으로 가장 비천하게 떨어진 것입니다.

 

9~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이러므로’는 ‘결과적으로, 따라서’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자기 희생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그의 겸손으로 인한 자연적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낮추는 것이 자기를 높여 주는 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일어난 역사상의 순간을 가리키기 위한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형태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정도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기를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최고의 권위 있는 자리로 높아지셨습니다.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는 1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의 성격을 부여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은 피조물 전체를 의미합니다. 즉 천사, 인간, 마귀를 일컫는 말입니다.

모든 지력있는 생명체들이 세단계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것입니다.

첫째는 천사들에 의해 신앙고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시록 4장과 5장에서 수만의 천사들이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소리높여 찬송드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는 인류에 의해 신앙고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회의 시대 중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상징하는 24장로들이 있었습니다. 큰 재난중에는 그리스도를 믿는ㅁ 144,000명의 유대의 회심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있습니다.

셋째는 또한 땅아래 있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 신앙 고백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과 마귀가 똑 같으며 그들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 45:23 “내게 모든 무릎이 끓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를 인용한 것입니다. 또한 이 인용문은 이사야 45:22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에서 나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는 헬라어로 큐리오스입니다. 로마인들이 그들의 황제를 주라 호칭하라고 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해서 처형당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는 하나님의 다른 호칭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적인 이름인 여호와라는 이름을 감히 호칭할 수가 없어서 아도나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는 주이시다”라고 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여호와 이며,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도나이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개인적인 측면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마리아는 정원에서 예수님에게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도마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의 절정에서 사용한 그 말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권위는 이어받은 권위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높여 주셨고, 하나님이 그를 보좌에 앉히셨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최고의 칭호를 붙여 주셨고, 하나님이 피조물들로 하역금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순종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는 주”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13-17 과 빌립보서 2:6-11은 사상과 행동의 진행에서 유사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요한이나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3:4 “예수께서 식탁에서 일어나 그의 겉옷을 벗으신다”는, 빌 2:7 ”자기를 비어(그는 그것을 벗으신다로 번역하기도 함)”

요한복음 13:5 “예수께서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시기 시작하신다”는, 빌립보서 2:7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요한복은 13:2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후 겉옷을 다시 입으시소이전에 앉으셨던 자리에 다시 앉으신다”는, 빌립보서 6: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요한복음 13:13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는, 빌립보서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에 있어 때때로 복음의 원수들은 그것을 숙명론이라고 부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숙명론이나 운명론을 믿는 것은 이슬람교로, 거기서는 운명을 의미하고 있는 키스매트란 말을 사용합니다. 운명이란 이스람교에 의하면 개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영향을 끼치는 우주의 힘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의 온전하고 바람직한 뜻과 조화를 이루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규제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삶에 있어 어려움이 오거나 힘들 때 유혹이 올 때, 그것은 비극이 아닙니다. 의미없이 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당신 안에서 당신을 위해 무엇을 이루시려고 그것을 허용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어떤 순간에 이러한 일들이 당신에게 닥쳐오게 되면, 당신은 다른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그분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할 때 당신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에게 목적하신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만들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주”라는 호칭은 또 한가지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4:13-18절에서 데살로니가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죽음에 대해서 말하며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신 것에 대해서 논증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그에게 연합한 자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시대의 종말에 살고 있는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어쨌든 그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그는 그 이름들을 변형시키는데, 즉 더 이상 예수로서 예수를 말하지 않고 예수를 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살전 4:15-17,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때가지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니라”

 

바울은 그리스도가 주이시라는 사실과 재림을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십니까?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의 재림을 기다렸는데, 그것은 그들이 곤경에 있을때, 심지어는 순교 당할 때도 그들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소망을 표현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전서의 끝 부분에 아람어로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은 “마라나타”라고 합니다.

사실상 그 단어는 두 개의 아람어 단어인 “임한다” “주”라는 말을 혼합한 것이며, 두 가지로 사용되면서 각기 다른 의미를 띄우게 됩니다.

기도할 때 사람들은 “마란-아타”라고 읽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우리 주가 강림하신다”는 것이며, 다른 식으로 “마라나-타”라고 읽을 때는 “주게서 임하시느니라”고 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절에 그것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쓰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도 역시 이와 같습니까?

그분을 알기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분이 오실 때 이 세상의 일들이 완성되는 것을 보기 위해 또 세상이 심판받는 것을 보기 위해 기도합니까?

그래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의 커다란 소망이며 위로가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