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립보서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파킨슨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법인이 이 병에 걸리면 어느 관리들은 끈기있게 일하고 있으나 우둔하고, 어느 관리들은 서로를 중상하는 음모에 적극적이며, 어느 관리들은 하찮은 일에 열중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무능력과 투기심이 고도로 집약된 단계에서 전법인체가 독선과 냉담으로 특징 지워지는 단계까지 여러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아무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성취되는 것도 전혀 없다고 합니다. 파킨슨은 이 질병을 injelititis(마비 상태)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도 이런 류의 것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그 질병은 영적인 독선이나 영적인 냉담이 될 것입니다. 혹시 이런 질병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지만, 장차 있을 하나님의 영접을 잃어버렸다면, 진부한 일상의 한 과정이듯이 믿음에 열심이 사라졌다면, 이 병에 걸린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보기로 제시하면서 자신의 목표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독선 대신에 바울은 성화된 야망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앞에 마련해 주신 경주에 열심히 자신을 던졌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용어를 보겠습니다. 바울은 ‘좇아 가노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잡았다거나 완전함에 이르렀던 것이 아니라 좇아가고 있습니다. 12절과 14절에 좇아가노라가 있는데 12절은 follow after, 14절은 press toward 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가 있는데 여기서 핍박하고로 번역된 단어는 본문의 좇아가노라로 번역된 단어와 같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삶의 성격 또는 본질을 완전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의 회심 사건의 내용을 읽게 될 때 우리는 교회를 핍박함에 있어서 그의 열심과 열정을 명확하게 보게 됩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내려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권세 잡은 자들에게 가서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공문서를 요청했습니다. 자신의 일에 그보다 열정적이고 열심이었던 사람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했으며 그들을 핍박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기와 위협이 등등한 채로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는 전에 그리스도인들을 구석구석까지 추적하고 쫓아갔던 것처럼 이제는 자신이 잡힌 바 된 것을 좇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좇아가노라’ 이것이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정과 열의와 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또 하나의 단어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사실 잡으려고 라는 말은 좇아가노라는 말보다 더 강력한 말입니다. 그는 경주 중에 달리고 있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놀라운 묘사입니다.
여러분은 손을 앞으로 뻗친 채로 내닫는 사람을 눈에 보이듯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경주를 하고 있는 사람의 열망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이기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 줍니다. 그는 경승점에 이르기 전에 결승선을 건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손을 뻗고 있습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경주에 참여하고 어떻게 그 목표에 이르러야 합니까?
본문에는 그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기 반성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은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이것은 자기 반성을 의미합니다. 자기 반성은 쉽사리 오해할 여지가 있는 주제입니다. 자기 반성은 바울이 내성적인 사람이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언제나 자신의 영적인 맥박을 느끼고 자신의 영적인 체온을 재고 있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스스로에 관한 억측을 기초로 살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언제나 기준을 살피고 끊임없이 그 기준에 의거하여 자신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가장 커다란 위험 중 한 가지는 억측에 따라 사는데 만족하는 위험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위험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부당한 일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자기 만족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위험 중 하나가 아닙니까?
회심한데 만족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을 살피고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는지를 확실히 살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기 않았습니다. 그가 만족하기 못한 것은 바로 이 자기 반성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살피십시오. 믿음 안에 있는가 확인하십시오’ 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집중입니다.
‘오직 한 일’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신의 집중을 묘사하는 방법입니다. 경주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경주에 참여한 주자는 풍경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가 산과 산울타리에 핀 꽃들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면, 그는 경주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한 일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농학자가 농장을 방문하기 위해서 좁을 길을 따라 차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한 떼의 양무리와 한 마리의 양지기 개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양지기개가 양떼를 주시하고 앞뒤로 뛰어 다니면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냥개 한마리가 뛰어나와서 그 양지기 개에게 싸움을 걸었습니다. 이때 양지기 개는 이 사냥개를 무시가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당당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사냥개의 짖어댐과 방해를 무시하고 보다 중요한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양지기 개는 오직 한 일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일하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주위의 혼란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세상은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들 중 정당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일만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으로부터 마음을 빼앗아 갈 일들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목적하는 일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스스로를 살펴볼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대다수가 끊임없이 어떤 일을 시작하고 난 다음에 중간에서 멈춤니다. 우리는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한낮이 되기도 전에 우리가 주저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래가지 않고 변덕스러운 신앙 생활입니다. 사도는 오직 한일 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훈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제해야 합니다. 시간을 쪼개야 합닏. 이처럼 우리를 거스리는 세상에서 영적 생활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곤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세째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일부러 과거의 경험들을 잊어야 한다거나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 잊었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잊었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과거의 경험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스스로를 자랑하거나 우쭐대기 위해서 과거를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경주에 참여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얼마나 멀리 달려 왔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앞에 있는 결승점에 얼마나 가까이 이러렀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다 보는 것은 언제나 커다란 유혹이 됩니다.
뒤를 돌아보는 것이 합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 본 사람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산을 오를 때 정상을 쳐다보면 의기소침함을 느끼지만 뒤를 돌아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이미 이룬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서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가 경고하고 있는 바입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통주의적인 신앙도 자기 만족감에서 돌아보기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커다란 희생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을 잊으십시오. 그리고 여전히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바울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자화자찬하려는 생각에서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영적 진보를 위협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와 상급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당연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것이 바울의 최대의 비결이었습니다. 사도는 언제나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목표를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그는 목표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과거의 업적을 돌아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 업적들은 훌륭하고도 멋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그 목표를 바라볼 때, 그것들은 얼마나 작고 사소합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이라 여겨집니다. 목표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자신을 더 유리하게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안전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목표는 또한 시기와 질투를 물리쳐 줍니다. 그들은 돌아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목표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 목표에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는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오직 한 일’ 입니다.
14절이 푯대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에 대하여 말할 때, 자연하늘에서 받게 될 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13절은 바울이 하늘의 상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압니다. 그 상은 그 상 자체를 향하여 좇아감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장거리 경주 과정을 거쳐가면서 하나의 푯대에서 다른 푯대로 나아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그의 부르심의 이러한 면을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세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사실이 명백히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이 구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이 구절이 위로 올라감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언급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사용될 때에는 거의 언제나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을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현재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세째로, 바울이 그가 얻고자 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경주의 끝에 가서야 얻게 될 하나의 즉 상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길을 따라가며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와 같은 경주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경주를 달려감에 있어서 두 가지 면에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축복을 내리시리라는 믿음이 부족해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먼 미래 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지금 이생에서 마련해 주신 좀더 직접적인 축복들을 놓쳐 버리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습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는 구절가운데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이란 위로부터 임한 부름 또는 위를 향하라는 부름입니다. 그 부름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궁극적인 영광에 이르라는 부름인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비결입니다. 우리는 주위의 죄악된 세상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경주에서 우리보다 훨씬 뒤에 처진 그리스도인들과도 배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닮고 그와 영원히 함께 있도록 부름을 받고 붙잡힌 바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결코 잊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목표에 이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자신과 자신의 업적을 살핍으로써 그 목표에 전적으로 집중함으로써 그리고 이제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잊어버림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방법, 즉 신앙 생활의 훈련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단 하루도 이러한 것들을 신중하고 엄숙하게 상기하지 않고 보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얻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목표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알고 있습니까? 그 분을 닮았습니까? 그 분의 죽으심을 본받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목표를 위해서 그리스도께 붙잡힌 바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목표는 우리의 삶의 중심, 모든 야망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그 푯대를 바라보고 그것에 매혹될 수 있게 해주시고 그 상급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만을 주시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