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당신의 유익한 위로 입닊?

빌립보서
빌립보서 1:15-26, 무엇이 당신의 유일한 위로이십니까.
 

빌립보서 1:15-26, 무엇이 당신의 유일한 위로이십니까

 

오래 전에 일본에서 있던 일입니다. 일본 개혁 교회에서 봉사하던 일본인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사역하던 부인이 어느날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부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삶과 죽음 안에서 당신이 갖고 있는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그의 아내는 조용한 음성으로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문 1항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몸과 영혼이 살든지 죽든지, 나는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귀중한 피로써 나의 모든 죄 값을 온전히 갚아 주셨고 마귀의 폭정으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시는 나의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나의 머리털 하나라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은 나를 지켜 보호하십니다. 이 모든 일이 사실상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짐을 나는 확실히 믿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몇분 안되어 그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고결한 죽음인가요. 얼마나 아름다은 고백인가요. 너무나 무게있고 숭고한 고백인가요

 

-         아직 건강하다고 자신하는 사람들

-         삶의 양지만을 추구하고 살아온 사람들

-         울고 있는 양을 거짓으로 속이고 사정없이 짓밟는 악한 사람들

-         뻔한 죄를 궤변으로 덮으려 애쓰는 불쌍한 종들

 

무엇이 당신의 삶과 죽음 가운데 유일한 위로입니까. 왜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지. 이에대한 대답은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문서를 만들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신앙 고백서의 저자들은 번민과 초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속 번뇌의 시대를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번민과 고뇌는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착취하였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죽으면 당신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들이 이 세상에서 행한대로 판단할 것입니다. 그후에 지옥에 보내든지 연옥에 보내든지, 천국에 보내든지 당신들이 세상에서 행한대로 보응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았는가에 따라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옥과 연옥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무던히도 노력을 하였습니다. 무서운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죄 값을 갚으려고 힘썼던 것입니다

 

-         성지 순례를 감으로써

-         예수님이 걸었던 슬픔의 길을 고뇌하면서 걸음으로써

-         금욕적인 연습을 반복함으로써

-         각종 성물들을 숭배함으로써

-         값비싼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         그리고 더 많은 구제와 기도를 함으로써 그랬습니다

 

지옥과 연옥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번민하고 고뇌하게 만들었습니다.

 

-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수 있을까

-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와 죄사함을 받을수 있을까

 

종교 개혁 운동은 이러한 번뇌의 시대와 착취와 폭정에 종식을 내리려는 신적 운동이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노력해서 벌도록 하시지 않는다

-         하나님은 구원을 값없이 주신다

-         하나님은 용서의 은총을 돈이나 값으로 요구하지 않고 거저 주신다

 

바로 이 은총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바로 이 은총만이 우리가 삶과 죽음 안에서 바라는 유일한 위로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문은 16세기 당시의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만일 오늘날 당신에게 가장 심각한 질문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우리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는 위로(comfort)가 아니라 의미(meaning) 일 것입니다.

 

당신은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변할 것입니까.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의미성일 것입니다.

 

까뮤의 “칼리규라”에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절규섞인 질문을던집니다

 

“여기에 우리를 무섭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죽을 용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이 아무런 목적없이 허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 나의 인생이 이러 저리 분해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할때, 그리고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생존의 이유가 사라질 때, 이것은 견딜수 없는 고통이며 번뇌입니다. 사람은 의미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내릴 때
 - 하늘이 깜깜해져 올 때
 - 삶의 기반이 흔들릴때
 -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을 당했을때
 - 믿어야 했던 사람이 있을수 없는 일을 저질러 놓고는 거짓말로 속이고는 계속하니
   속이려 애쓸 때.

 

이럴때, 누가 소망과 위로를 줄 수 있겠는가. 누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줄 것인가. 우리의 처진 어째를 다독거려 줄 것인가. 이것이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살거나 죽거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나의 몸과 영혼이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이러한 질문과 답변은 하이델베르그 신앙 고백문에도 있지만, 이것은 사도 바울이 묻고 대답했던 것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때 바울에게 던져진 원초적인 질문은 “무엇이 당신의 가장 깊은 소원입니까” 였습니다. 바울은 확신에 찬 어조로 답변합니다. “나의 깊은 바램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으나 사나 내 몸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로 말하자면,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사실 이것은 말은 쉽지만, 그대로 살기는 가장 어려운 고백일 것입니다. 비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사는 일과 죽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점점 그의 문전에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삶의 여분은 매우 촉박해 보였습니다. 죽음을 목적에 둔 바울은 매우 조용히, 그러나 매우 확신에 찬 어조로 우리에게 말을 합니다. 사는 일이나 죽는 일이나 나에게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은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의 경험과는 동떨어진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중 누가 진정으로 정직하게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늘 내가 죽는다고 해도 좋습니다. 내게 있어서 사는 것도 유익하지만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은총은 하나님의 은총은 그러한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말을 있게끔 합니다.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합니다

 

“무엇이 당신의 유일한 위로입니까. 무엇이 당신의 궁극적 안전입니까.”


“
나는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이며 위안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