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창세기
창세기 35:1-15, 벧엘로 올라 가자
 

창세기 35:1-15,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신문을 읽다가 다시 한번 묘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싸이클론으로 수만명이 실종이라고 하고, 다른 모두 기사도 우울한 기사가 넘칩니다. 밝고 시원한 기사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내기 힘듭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신나는 일보다는 어둡고 힘든 사건이 넘치는 곳입니다.

야곱에게는 견딜수 없는 고통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34장에서는 아들들이 엄청난 살인을 저지르고 약탈을 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창세기 28장, 벧엘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하고, 돌을 세우고 다시 찾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2장,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은 다시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와 더불어 씨름을 하며, 환도뼈가 부러지고, 그의 삶이 극적인 전환점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히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이 자기의 몸을 다루사 자기를 넘어뜨리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 직후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장소가 바로 브니엘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만났다’ 해서 그가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했던 그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십년이 흘렀습니다. 십년 동안 야곱은 그 새로운 이름에 합당한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세겜으로 야곱을 찾아오십니다. 야곱은 아직도 세겜이라는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오래 전 벧엘의 땅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셨을 때, 하나님은 그가 벧엘로 다시 돌아와야 할 것을 명령하셨지만, 그의 발걸음은 아직도 세겜 땅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두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벧엘로 돌아가라, 거기서 단을 쌓으라. 야곱이 30년전에 한 약속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벧엘 근처 세겜에서 10년을 머물러 있었을뿐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제 약속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족들에게 세 가지 명령을 했습니다.

  첫째, 이방 신상을 버릴지어다.

  둘째,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자.

  셋째, 의복을 바꾸어 입자. 그리고 벧엘로 가자는 말입니다.

 

사실 야곱의 세 가지 지시는 우리가 응답해야 할 세 가지 지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직도 자기 가족들이 우상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라헬이 가지고 있었던 우상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어떤 우상입니까? 라헬이 남편 야곱과 함께 친정 집을 떠날 때 친정 아버지의 물건 하나를 도적질한 것입니다.

 

  31:19,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드라빔은 일종의 수호신입니다. 금이나 은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우상 신이었습니다. 라헬은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던 드라빔을 갖고 가면 자기 가족이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그것을 도적질해 갔을 것입니다. 아마도 야곱이 어느 날 그것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이미 이 세상은 어느때 보다도 머니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이 머니가 있어야 교회에서도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부인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머니에 대한 집착에서 결코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믿으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드라빔입니다.

이렇듯이 어떤 사람은 머니가, 어떤 사람은 지위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드라빔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서는 가장 강력한 우상을 탐심이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3:5절,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

내가 어떤 것에 욕심을 갖게 되면 내 생각과 사고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존재가 그 욕심의 대상입니다. 그것이 나를 지배합니다. 그것이 나의 우상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일서인데요. 요한일서의 전체 주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사귐을 잘 가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 1-3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태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그런데 하나님과 나 사이의 교제를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물은 뭡니까?

 

요한1  5: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이것이 요한일서의 마지막 교훈입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과의 사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상이 있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기 때문에 우상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라는 말은 몸을 물로 씻으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몸을 씻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고, 더렵혀진 마음을 세겜 땅에서 씻어버리고 이제는 벧엘로 가자는 의미입니다.

우상을 버리는 것이 소극적 결단이라면 이제 우리 내면을 정결케 하는 일은 적극적인 삶의 결단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깨끗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요단 강을 건너가야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요단 강을 건너갈 준비를 할 때 주께서 주셨던 말씀을 보십시오.

 

  수 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내일 너희 가운데서 기사를 행하시리라”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터인데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깨끗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같이 나를 쓰시는 특권을 누리길 원하시면, 깨끗하십시오.

기독교 역사에서 존귀하고 아름답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의 생애 속에는 기적이 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을 많이 체험한 사람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성자(Saint)라는 표현을 붙여주었습니다. 성 어거스틴, 성 프란체스코, 성 다니엘,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깨끗한 그릇이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한가지 조건,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이 쓰시지 못할 그릇이 없습니다. 어떤 그릇도 다 쓸 수가 있습니다.

 

  옳은 행실, 즉 의의 옷을 입으십시오

  

새로운 의복을 입어야 합니다. 의복은 사람의 행동을 규제하고 행동을 결정합니다. 의복이 라이프 스타일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군인이라면 군인의 옷, 경찰이라면 경찰 옷, 운동선수라면 운동복을 입고,이런 의복이 우리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으면 거룩하게 걷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도 옛사람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입어야 할 옷은 오직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 옷이 뭔지 아세요?

 

계 19: 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어린 양의 혼인잔치 때 우리의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부들을 위해서 이 예복을 준비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 그리스도인의 신부인 성도들을 위해서 주께서 준비하신 유일한 옷은 세마포입니다. 이 세마포옷은 뭘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성도들의 옳은 행실, 즉 의의 옷을 입으라는 말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더렵혀진 옷은 벗어야 합니다 의의 옷, 거룩한 옷을 입고 벧엘로 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두가지 결과를 약속하십니다.

 

35: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전엔 뭐라고 불렀습니까?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올라 갔을 땐 단어 하나를 덧붙여 엘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인데, 거기다가 엘을 붙였으니까 ‘하나님 집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서 다시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35: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얍복강의 나루터에서 이름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같이 행동하지 않고 야곱같이 행동하니까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시고도 이름을 안 불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세가지 결단을 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새로운 의복을 입고 벧엘에 올라온 순간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의 자녀여, 나의 성도여” 하고 부르실 것입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벧엘로 오기까지의 시간이 십년입니다. 거리상으로는 50km밖에 안 되는데도 말입니다.

성도다운 성도가 되기까지 우리가 앞으로 보내야 할 세월이 얼마나 될까요?

35:11-12,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

하나님이 스스로를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갱신하여 야곱과 다시 친히 언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들을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야곱의 후손 중에서 왕들이 나올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신앙의 출발점 벧엘로 올라갔던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 회복하고 벧엘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35:14-15,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우리도 적당히 세상의 악과 타협하고 있는 이 오염된 신앙에서 벗어나 에곱이 새로 도약했듯이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께서 벧엘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홍해 앞에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세가 지팡이를 든 것 같이, 베드로가 삼천명을 회개시키는 장면같이 그렇게 자신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끝날까지 신자인가? 아닌가? 고민하다가 생애를 헛되이 보낼 것입니다.

 

우리 생애가 피난 가는 중에 벧엘에 왔는지, 아니면 외삼촌 집에 가서 이제 막 라헬을 얻으려고 일하고 있는지, 아니면 양 떼를 부풀리려고 약 먹여서 목동 노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무슨 신앙적인 수준이 있었겠습니까? 눈앞에 있는 현실을 이용해서 자신의 삶을 살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그 삶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개입하지 않은 자와 전혀 다른 자가 됩니다.

 

우리의 실패, 이기심, 짧은 소견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그 헛된 것과 그 잘못된 것이 밑거름이 되어 하나님 앞에 더 많이 엎드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요, 우리가 성공하고 우리가 잘한 것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감사로 결과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실패는 하나님이 없으면 배째라로 나오고, 성공하면 기고만장함 밖에는 결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확인해야 할 곳은 여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에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리하고 계십니다. 큰 기적이 일어나야 사람이 깨우치는 것 아니며, 큰 사건이 일어나야 해결되는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지식과 능력이 있어야 신앙이 좋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구이시고,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도우심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과, 감사와 영광스러운 결과가 있느냐를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며,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며, 복음이며, 우리에게 지금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개입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비교할 것 없이 모두에게 개입하사 받아내신 항복과, 감격케 하신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모든 성도에게 약속되어 있고, 한 사람의 실패도 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생애에서, 성경 전체에서 주장하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과, 신앙고백에 대하여 감격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불만스럽고 미진해 보이는 신앙 조건은 현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능력의 개입이며, 우리는 하나님을 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도 한 순간도 우리를 잊지 않고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굳건한 믿음 위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 위에 여러분을 세우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2008.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