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니엘의 체험

창세기
창세기 32:23~32, 브니엘의 체험
 

창세기 32:23~3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건널쌔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가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자손이 12 지파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기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본문의 브니엘 사건입니다.

 

야곱은 태어날때 장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옵니다. 늦게 나와서 장자가 되지 못하자 나중에 꾀를 내어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어거지로 받아냅니다.

그리고,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의 집으로 피난을 가서 20년 동안 종살이를 합니다. 아내를 얻기 위하여 보수 없이 14년을 일했고, 마지막 6년은 보수를 받아 일을 하는데 워낙 악착같으니 부자가 됩니다.

 

그러나, 외삼촌과 사촌들의 미움을 받아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자 아내, 자식, 재물을 가지고 도망합니다. 외삼촌이 쫓아오기는 했으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빠져 나옵니다. 그리고 고향인 가나안에 가까이 오자,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마중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인원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 에서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야곱은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영리한 계책을 짜냅니다. 

먼저 종과 가축 550마리를 몇 개의 떼로 나누어서 에서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에서에게 자신을 종으로 낮추면서 종이 주인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말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내와 자식을 얍복 나루에서 건너 보내는데, 이순간에도 첩의 자식을 먼저 보내고, 그 다음으로 정실인 레아를 두고, 맨 마지막에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을 보냅니다. 이때는 12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얍복나루를 건너 다시 돌아갑니다.

전형적인 야곱의 처세술입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지혜가 야곱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얍복’은 자신을 비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얍복은 물쌀이 빠른 요단강의 지류입니다. 하지만 ‘나루’라는 말이 건널수 있는 얕은 여울을 의미하므로 수심이 얕아서 쉽게 건널 수 있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은 홀로 남았고,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밤을 지새고 있습니다. 자기가 뿌린 그 동안의 거짓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죄악의 씨의 열매를 거두는 시간이 다가 온 것입니다.

   홀로 있다는 말은 고독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은 홀로 있는 순간에 가장 정직한 자기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이 기회를 포착하셨습니다. 이때야 말로 야곱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꿀 기회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때의 야곱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절대적 고독의 시간이 있습니다. 인생은 힘들고 그 인생에서 짊어져야 할 짐은 너무나도 무겁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방법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 순간에 야곱 인생에 전환점이 나타납니다.

 

이 씨름을 건 사람이 야곱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면, 누가 야곱에게 싸움을 겁니까? “어떤 사람이”

 

야곱은 아마도 ‘어떤 사람’이 에서가 보낸 수하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왔구나. 나를 죽이려고 에서가 자객을 보냈구나. 그러니 필사적으로 싸운 것입니다. 씨름이라고 했지만, 피가 튀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어떤 사람’은 누구입니까?

 보통 ‘어떤 사람’을 두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고 해석합니다

둘째로, 성육신 하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는 ‘하나님 자신의 간섭에 의해 나타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절,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이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는 표현은 그의 의도가 좌절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야곱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야곱을 땅에 쓸어 뜨리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씨름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자 야곱의 환도뼈, 즉 엉치뼈를 손으로 쳤고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됩니다.

 

사실 이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된 이스라엘 자손이라면, 이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경악스럽게 들릴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 사람이 손으로 자기의 환도뼈를 치는 것만으로도 환도뼈를 위골시킬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26절,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날이 새려고 할 때 이 사람이 떠나려고 합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뜻을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씨름은 끝났고 야곱은 새로운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환도뼈를 맞아 위골되었음에도 그 사람을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당시에는 씨름이나 격투에서 굴복한 사람은 이긴 사람의 종이 되어야 만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20년 종살이했습니다. 이제 자유인으로서 고향에 가는 길입니다. 다시 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야곱은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패배자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자에게 축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는 야곱이 그냥 축복을 구한 것이 아니라 울면서 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2: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야곱의 눈물은 가슴 속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던 연약한 부분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을 내놓고 은혜를 구하면서 터져 나온 눈물이었습니다.

 

27절~28절,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자기 이름을 밝히게 한 것은 야곱이 스스로 자신의 인격,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쥐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쌍둥이로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 뒷꿈치를 붙들었습니다. 먼저 나오려고 했고, 절대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린다’ 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은 몸부림치고 발버둥을 쳐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항복함으로 얻은 것입니다.
   내 부족함을 알고 내 연약함을 알고, 내 한계를 알고 내가 피조물임을 알고, 내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간임을 깨닫는데서 온 것입니다. 

 

이제 그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29절,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대답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알면서 왜 묻느냐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야곱의 마음 속에는 항상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러다가 언젠가 한번은 되게 맞아죽지’

 

그리고 얍복 나루에서 급소를 맞아 쓰러지면서 올 것이 왔다고 느꼈을 겁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믿습니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그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이 야곱으로 하여금 인간의 한계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에 대한 절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절망만 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누구를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이상 자신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30절,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이제 야곱은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야곱은 알고는 그 땅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의미입니다.

 

31~32절,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가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에게 해가 돋았습니다.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눈부신 새벽이었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야곱이 하나님께 급소를 맞아 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다리를 절면서도 희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야곱의 삶이 달라집니다.
 

   야곱은 브니엘의 체험이후 전과 달라졌습니다. 다리를 절었으니 몸에 표지를 가졌습니다. 그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이와같은 중요한 체험을 한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이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는 자기 위에 표지들을 얻게 되었고 새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강하게 믿던 야곱, 그 야곱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불구의 야곱, 이스라엘이 다리를 절뚝거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야곱과 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야곱의 생애에 계속 개입함으로써 무엇을 하십니까?
  
야곱이 욕심을 냈던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무가치한 것인가를 드러내심으로 야곱이 끝없이 가려고 하는 길을 완전히 좌절시켜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 깊이 나타내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야곱에게 수없이 속으셨습니다. 그래도 참고 또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실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원하시는 것은 몸만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믿음으로 이 땅에 사는 것입니다.

 

야곱의 문제는 형 에서가 아닙니다. 야곱은 자신이 깨지고 항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의지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바른 관계가 맺어질 때 상황이 저절로 내 편이 되는 놀라운 사실을 봅니다.

 

창세기 32장은 야곱의 생애에서 모든 인간들이 갖는 종교성에 대해 하나님의 간섭으로 기독교 신앙의 정도를 찾아가는 인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나루에서 에서의 마음만 누그러뜨리면 내 인생은 탄탄대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축들과 농작물, 처자식, 이것에 만족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날 밤 거기서 야곱을 만나 주시면서 야곱에게 엄청난 축복과 비전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뵈었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자신의 소원과 이상을 실현시키는 수단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그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옛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 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그리고 창 32:9~12 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기에 살려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고, 또 내가 처음 피난길에 들어섰을 때 벧엘에서 만나셔서 이런 축복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자손으로 바다의 모래 같게 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합니다.

 

위기를 당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것들이 생각이 나서 그것을 근거로 하여 기도가 힘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자기도 모르게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이 야곱의 생애입니다.

   

얍복나루에서 야곱의 모든 계획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여 야곱이 목적하는 생애와 소원과 목표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목적하시고 이루시려는 내용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위기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목적과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하시고 계획하신 것에 순종하는 자로 바뀌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브니엘의 체험을 하셨습니까
?
   혼자 격리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입니까? 
 

야곱의 생애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의 생애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깊이 간섭하시는 것이 씨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환도뼈를 쳐 위골 시켜서 항복을 시켰습니다.

 

신자의 인생을 보면, 비신자보다 그나마 하나님에 가깝게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신자의 인생이 비신자의 인생보다 더 형통하거나 더 잘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관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만일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면, 헛수고입니다. 복음의 기초도 모르는 분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사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과 힘을 제공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오래된 죄들을 정복하게 하시고, 우리의 과거를 못 쓰게 만들고 망쳐 놓은 것들을 제거해 버릴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 의와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사망과 무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십니다.

 

우리가 사망과 무덤을 보고 웃으면서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저것들을 다 통과했다. 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심판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라고 말할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소망을 주십니다.

 

이제 여기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 야곱처럼 ‘당신을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새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셨습니까?

사망과 무덤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까?

이전에 짓던 죄에 대해 이미 승리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삶속에는 새로운 능력이 있습니까?

 

앞으로 임할 저 영광스러운 시대를 바라보며 “나는 그 곳에 갈 것”이라고 말할수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정말 사실처럼 느껴집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 이렇게 큰소리로 부르짖으십시오.

“당신을 가지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당신을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정직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야곱을 축복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흙으로 돌아갈 피조물이면서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지혜와 방법에 매달렸습니다. 야곱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깨닫고 항복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옵소서. 하나님 만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