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종의 비유

비유
마태 18:21-35, 무자비한 종의 비유
 

마태 18:21-35, 무자비한 종의 비유

 

본문은 주님이 천국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그러므로 천국은” 이라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두 가지 유형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현재적인 개념입니다.

본문의 천국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시작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강화를 하셨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의 사역이 끝나갈 때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당한 배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21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유대인 관습을 알고 있었고, 랍비들의 의견을 들었을 것입니다.

요마논집에 랍비 요세 벤 유ek(AD 180년경)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어떤 형제가 너에게 한번 죄를 지으면 용서하라. 두번 지어도 용서하라. 세번 지어도 용서하라. 네번째는 용서하지 마라”

 

베드로는 용서의 한계를 생각해 보고 예수님은 일곱번 정도 말씀하실 것으로 예상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관대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번까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7번 혹은 490번으로 해석합니다.

이 수치는 한계를 두지 않고 계속적으로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23-24절,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무제한의 용서가 필요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이미 천국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왕은 빚진 자를 불렀습니다. 종이라 번역했지만 이들도 상당한 관리였을 것입니다. 빚진 금액은 만 달란트 입니다. 천문학적인 돈입니다.

다윗 왕은 성전 건축을 위해 그만큼을 봉헌했고(대상 29:4), 하만은 유대인들을 멸하기 위해 바사 왕에게 그만큼의 돈을 바쳤습니다(에 3:9).

오늘날의 화폐단위로 약 240억원(2천만불) 정도 됩니다.

 

25절,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이 사람은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고대의 관습에 따라 재산 뿐만 아니라 가족을 통틀어서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합니다.

왕의 진노가 보입니다.

 

26-27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은 겸손하게 엎드려 참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자비로운 왕은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28-30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왕의 탕감을 받고 나온 그 종은 자신에게 빚진 자를 찾아갔습니다. 자기보다 낮은 직급이었을 것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20불(48천원) 정도로서 당시 수준으로는 큰 돈입니디.

하지만 수천만 불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액수입니다.

그 종은 자기에게 빚을 진 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사실 그 종이 빚진 자를 옥에 가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닙니다.

당시 관습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31절,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동료들이 이것을 보고 주인에게 이를 일렀습니다.

남몰래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32-33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수백억원을 탕감받은 종은 불과 몇 만원을 자기에게 빚진 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토록 자비하였던 왕은 크게 탕감을 받고도 남에게 작은 탕감을 하지 않는 종에게 수사학적으로 질문을 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34절,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왕은 화가 나서 그 종을 옥졸들에게 넘겼습니다.

유대 율법에 의하면 고문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고대 사회에서 고문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35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비유에서 왕은 천부를 나타내고 재판장으로서 그분의 역할을 묘사합니다.

이 비유는 신약성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교훈을 설명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후, 기도의 넓은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이 비유는 세가지 요점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래에 심판이 있습니다.

악한 종은 자기가 진 빛을 모두 갚을 때까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심판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르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내려집니다.

 

둘째, 용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용서의기초가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증거는 변화된 마음과 생활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실생활 영역에까지 적용시켜서 우리가 대접 받은 대로 남을 대접할 수 있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사악한 죄인인가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의 죽으심을 통해용서함을 받은 죄인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자비와 함께 공의가 중시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자와 동정을 베풀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시 101:1).

출애굽기 52:25-27절에도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채주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비와 공의가 분리되어 취급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설명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공의를 동시적 적용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공의가 희생된 자비를 강조해 왔습니다.

범죄자를 응석받이로 키우는 것은 범죄자의 권리가 엄격히 준수되고 피해자의 권리는 전적으로 무시되는 것으로 지켜져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비는 공의를 배제한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공의가 자비를 무효화시킨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이웃을 무수히 용서해야 함을 어떻게 보여 주셨는가?

예수님은 엄청난 빚을 지고 또한 공의가 집행될 때 자비를 간청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의 주인은 빚을 탕감해 주고 그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반복적으로 짓는 죄에 대해 용서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주인 앞에 날마다 반복하여 엎드려야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에게 진 우리의 빚을 표현하기 위해 그의 주인에게 엄청난 빚을 진 사람의 이야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호와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3-4).

 

그 종은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것은 자비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그 종은 자신에게 빚을 진 자에게는 공의만을 적용하였습니다.

코리 텐 붐은 2차대적 기간 중에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보초병에게 고통을 당하여 지냈습니다.

종전이 지난 후 어느날 그녀는 독일의 어떤 모임에서 주님 안에서 체험했던 그녀의 기쁨을 간증했습니다.

그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그녀에게 고통을 준 독일 보초병이 자기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녀는 보초병을 다시 보는 순간 포로 수용소에서 당했던 그 고통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용서를 했습니다.

결국 자비가 승리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재판이 있으리라”(약 2;1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에서 용서하지 않은 종은 성난 그의 주인에게 불려갑니다. 그 종은 영원한 비극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인간이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한 것처럼 여기시고 죄인을 영접하심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죄인의 죄를 사해 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도 않으십니다(시 103:12,렘 31:34).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죄는 측량이 불가능한 수치의 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용서받은 종이 똑같이 용서해 주기를 기대하십니다.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받으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원래 빚은 다 갚았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빚입니까?

우리들이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도덕적인 부채입니다.

그리고 그 부채는 우리의 노력으로는 상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고 자비를 구합니다.

이때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빚은 내가 다 탕감했다”

 

빚을 탕감받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소한 빚을 따지지 말고 내가 탕감받았듯이 탕감해 주라는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정적 한명이 있었습니다. 늘 링컨에게 수모와 모욕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링컨을 모욕한 이야기 중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릴라를 보기 위하여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오리지날 고릴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링컨이 턱수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링컨에 대통령이 되고 내각을 조직하면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국방장관에 이 사람을 임명했습니다.

참모들이 반대했습니다.

이때 링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선되었으니 그 사람은 내게 적이 아니고, 국방장관에 임명하면 반대자 하나가 줄게 되었으며, 그 사람이 나를 돕게 되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잃었단 말인가요?”

 

주님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악한 자가 뉘우침이 없이 계속 자기 핑계만 합리화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용서하라 하십니다.

주님은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힘들겠지만 용서하는 것으로 당신의 할 일은 완성됩니다.
  
그 사람이 죄를 깨닫고 무릎 끓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의 메시지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용서였습니다.

“너희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너희는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