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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1-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1-9, 누가복음 8:4-15
오늘날은 설교의 위기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설교에 대해 특별한 기대감을 갖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던 부흥의 시절에는 설교가 특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설교가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싸움이 나서 언성이 높아지면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야 나한테 설교하지마”
왜 이런 위기가 되었을까요?
기본적으로는 설교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신뢰를 받지 못하는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설득력을 상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천박한 설교들이 그러한 위기를 몰고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청중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습니다.
코미디 같은 웃음거리를 좋아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청중에게 말씀 듣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4장 9절에 보면 예수님은 청중에게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귀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듣는 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어떻게 들을 것인가?” 하는 것이 본문에서 다루는 교훈의 핵심입니다.
계절은 아마도 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북적거리는 군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갈릴리 바닷가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배위에서 바닷가에 늘어선 무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음향학적으로 매우 이상적인 환경이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들판에는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농부를 보면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본문은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초점은 씨 뿌리는 자에 있지 않고 뿌려진 씨의 운명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씨가 어떤 땅에 떨어지는가의 상황으로 4가지 설명하셨습니다.
길가, 돌짝 밭, 가시떨기 땅, 좋은 땅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씨를 어떻게 뿌리기에 이런 땅에 떨어질 수 있을까요?
팔레스틴에서 씨 뿌리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방법은 씨 뿌리는 자가 밭을 오르내리면서 한웅큼씩 씨를 뿌리게 됩니다. 씨 뿌릴 때 바람에 날려서 여러 곳에 떨어지게 됩니다.
둘째 방법은 씨앗이 담긴 자루를 노새 등에 얹고 자루 한 귀퉁이를 조금찢어서 구멍을 낸 다음에 노새가 밭 아래 위를 걸어다니는 동안 씨가 흘러 나와서 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새가 길을 건너가면 엉뚱한 길에 흘러 떨어질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에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 씨앗, 열매입니다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씨앗은 천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천국복음입니다.
문제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땅입니다.
예수님은 4가지 땅을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의 마음 밭입니다. 4가지가 있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 같은 마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는, 네 명의 전형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기 위하여 씨 뿌리는 자, 씨, 토양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신 것은 너무나도 적합합니다.
창조의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흙으로 지으시고, 여기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 기사는 우리 인간은 흙이며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 인간의 토양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토양입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토양은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영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에 매우 적합한 토양입니다.
첫째, 길가에 뿌려진 씨입니다.
19절,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 운 자요”
길가란 팔레스틴에서는 밭과 밭 사이로 나 있는 작은 통행로입니다.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장소이니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불행히도 어떤 씨는 이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떨어진 이 씨를 쪼아 먹음으로 도무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4:15,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예수님은 새들을 사단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사단이 우리의 마음 속에 떨어진 이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갑니까?
누가복음 8:12에는 그 이유를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이 씨가 떨어지자마자 새들이 쪼아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길가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길가란 완악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깨닫고 싶어도 못깨닫는 사람이 아니라 깨닫지 않으려고 하는 사랍니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죄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인간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고 설명합니다(롬 1;18).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적 지식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악한 자가 와서 마음에 심겨 진 것을 빼앗아 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씨앗이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기도 전에 빼앗아 가 버립니다.
둘째, 돌밭에 뿌리운 씨입니다.
돌밭은 돌 투성이 밭입니다. 팔레스틴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땅으로서 석회암층이 기초를 이루고 그 위에 앏은 흙이 덮혀 있었습니다.
흙 깊이가 불과 10 cm만 들어가도 석회암층에 닿게 됩니다.
이런 땅에서는 씨앗이 발아하는 것이 더 빠릅니다. 태양열을 받아서 빨리 더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토양의 깊이가 없어서 영양분과 습기를 찾아 뿌리가 뻗어도 곧 암석에 부딪치게 되어 곧 말라 죽게 됩니다.
마 13:5-6,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는 타버려 뿌리가 없어지므로 말랐고”
돌밭은 처음에 즉시 기쁨으로 받았지만,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뿌리가 없어서 곧 넘어지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의 적은 누구일까요?
육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은 늘 편안한 것을 도모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전해질 지라도 육신이 힘들면 내게 세상적으로 도움이 안된다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합니다.
예수님은 마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분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오고 성경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단순히 잘 살기 위하여, 물질적인 축복을 위해서 입니까?
예수 믿고 부자된 사람보다 고난을 겪은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도덕적인 타협을 거절할 때 외로워지고, 이웃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수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또한 이런 마음은 얄팍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게 되면 교회의 외적인 화려함과 놀라운 음악에 쉽게 흥분하고 매료됩니다.
복음을 듣고 신앙고백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닥치거나 조금만 소흘히 하게 되면 쉽게 식어버립니다.
셋째, 가시밭에 뿌려진 씨입니다.
7절,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가시떨기 땅은 속이는 땅입니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는 그 땅은 아주 좋은 땅처럼 보입니다.
이 땅은 표면을 뒤집어 엎어서 깨끗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잡초의 잔 뿌리들이 다시 소생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잡초는 너무나 왕성하게 쉽게 자랍니다. 씨앗이 살아가는 기운을 뺏기고 잡초만 무성하게 됩니다.
22절,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가시밭 같은 마음 밭에 적이 있다면 이것은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3개 적은 “마귀, 육신, 세상”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 재물을 탐하는 돈에 대한 욕심이 그것입니다.
이런 가시밭의 주인공들은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간혹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저 사람이 교인이라니, 그런 교회라면 다닐 수 없어”
사실 이 정도가 되면 비극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됩니다.
에콰도르 정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은 짐 엘리웃이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어자피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을 붙들려고 몸부림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붙들기 위해 삶을 버리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어자피 붙들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살아가는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이 수단이 오히려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주의 구원”인데, 이것을 붙들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자갈밭 마음 밭은 말씀을 듣지만, 다른 관심사가 더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마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는 성경에서 주님을 떠난 인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데마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만난 디모데는 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데마는 이렇게 해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마음은 찌들린 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습니까?
마 19: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가기 어려우니라”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한번은 어떤 부자 청년이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떠났습니다.
그 청년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했으나, 예수님이 그에게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청년은 그렇게 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는 기름진 토양, 풍성한 삶을 약속하는 그런 토양이 있다면, 이는 잡초와 가시떨기가 씨앗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그런 토양입니다. 토양이 기름지기 때문에 잡초도 잘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질식시키는 잡초가 잘 자라는 토양은 또한 잘 보살피기만 한다면 놀랄 만큼 생산적인 그런 토양으로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영혼의 토양이 가장 생산성이 높을 때, 우리는 너무도 자주 다른 것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가장 위대한 것을 생산할 수 있을 때 우리 영혼의 토양은 우리의 부주의로 인해 잡초로 뒤덮여 버리는 것입니다.
넷째, 좋은 땅에 뿌려진 씨입니다.
앞에서 세 종류의 땅은 모두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의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어떻게 됩니까”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23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백배,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좋은 땅이란 깊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땅입니다. 여기서 씨앗이 싹이 터서 뿌리를 박고, 자양분을 얻어 자랍니다.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지키어가 중요합니다. 지키어 인내함으로 마침내 결실을 맺는 사람들의 마음은 좋은 땅과 같은 것입니다.
19세기 시인 조지 맥도널드가 쓴 시가 있습니다
“내 영혼은 척박한 땅, 기근의 땅,
여기저기 잡초가 가득하고
무엇인가 이룰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
맥도널드는 그 자신의 영혼의 토양에 대해서 소망이 없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은 세계적인 영성 기독교 학자 C. S. 루이스는 하나님을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영에 이처럼 가까이 있는 자, 그리고 이보다 더 가까이 있는 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루이스가 느낀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내 토양은 무엇인가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이라고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열린 마음입니다.
열린 마음만이 복음의 가르침이 주는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에게 환난 중에 도와주시겠다고 했지, 환난을 완전히 제거해주시겠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11세기 유럽의 헨리 3세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왕노릇하기가 싫어졌습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 수도사가 가장 부러웠습니다. 하루종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니 골치 아픈 일 안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리처드라는 수도원장을 찾아갔습니다.
수도원장이 가만히 보니 한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글쎄요 수도사가 되려면 한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킬수 있겠습니까?”
헨리 3세가 대답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지키겠습니다”
수도원장이 대답합니다. “수도원장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헨리 3세가 반드시 지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수도원장이 말합니다. “그럼 제가 첫번째 명령을 내립니다. 지금 당장 왕궁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백성들을 잘 섬기도록 하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배 드리고, 찬양했으니 이제 세상으로 돌아가서 가정, 직장, 사회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보내주신 일, 맡겨진 일을 잘 맡아서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삶의 터전에서 적용하며 천국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마음의 밑바탕을 아시고, 내 실수를 아시고, 오점과 죄악을 아시고, 내가 숨기고 있는 은밀한 죄를 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듣는 사람은 변합니다.
그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엎드려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처럼 말할 것입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 순간,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나를 통치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좋은 땅에 씨가 뿌리웠다는 것은 이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듣고, 깨닫고, 지키어 이 말씀을 내 삶 속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몸부림을 칠 때, 비로서 열매가 맺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변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삶을 뒤집기 시작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영광스런 통치와 하나님의 영광스런 새벽의 광명이 내 삶의 어두움에 임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영광스런 씨가 이 거룩한 말씀의 씨가 좋은 땅과 같은 당신의 마음 속에 떨어져, 당신의 삶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며 다스리시는 역사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리고 씨를 뿌린다는 것은 우선 좋은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
씨뿌리는 자는 씨앗을 만드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그대로 뿌리는 것입니다. 복음은 창작이 아닙니다.
전도자는 예수님 말씀 만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새들이 와서 빼앗아 버리는 반항적인 토양,씨앗은 자랐으나 곧 말라 버리는 흙이 얇은 토양, 인생의 여러가지 일과 같은 잡초에 뒤덮여 말씀의 씨앗을 막아 버리는 토양, 이런 토양도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토양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상황에 따라 다른 토양이 될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토양에 대해서도 소망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특히 전도자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토양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듯한 그런 시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선한 도구로 사용되는 그런 시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각기 다른 토양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영적 반응의 시기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이나 고난에서, 어떤 사람은 실패와 좌절에서, 어떤 사람은 육신의 고달픔에서, 어떤 사람은 노년에서, 어떤 사람은 한창 젊을 때 청년의 시기에서.
우리의 지문이 다르듯이 모든 사람이 영적 반응이 다릅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증거할 때, 우리는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누구의 영혼이 옥토의 상태에 처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고,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고, 복음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우리나 그들이 느끼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예수님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해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그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하실수 있느니라”(눅 18:26-27).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입니다.
오늘 우리는 좋은 땅처럼 말씀 앞에 반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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