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식 성령

 문답식 성령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 관심을 갖지만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한 오해와 상반된 견해로인해 혼란을 겪는 경우가 더러 있다 .

문1-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시는가?

답-하나님은 편재, 내주 및 임재로 존재하신다.

 

문2-오늘날의 신자들도 성령을 다시 구해야 하는가?

믿는 자는 모두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닌가?

답-받았더라도 구하여서 다시 받을 필요가 있다.

 

문3-성령 체험하고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은 위험하고,

말썽을 부리고, 교회의 덕이 못되고있지 않은가?

답-위험하고, 말썽부리고, 교회의 덕이 되지 않는 것은 영적 체험 여부와는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신자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문4-신자는 믿을 때 성령 세례를 받았는데 또 받아야 하는가? 이것은 이중 구원이 아닌가?

답-단어는 같지만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문5-물 세례는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고

성령 세례는 그것을 실제화 하는 것이 아닌가?

 답-아니다 물 세례를 통한 회개도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이므로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문1-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시는가?

답-하나님은 편재, 내주 및 임재로 존재하신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성령-하나님-의 편재와 내주로만 이해하여 체험적, 능력적으로 임하는 임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오히려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신데 그곳에만 계신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자에게 이미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다시 구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연 그런가? 여기서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 살펴 보자.

성경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은 대충 세 가지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소부재 (또는 편재. omini presence).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천지에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하나님은 천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서는 거룩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도 교회를 떠나면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천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감찰하고 계신다.

 
-내주 (內住. indwelling presence). 내주는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만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 방식이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사람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신다(요 14:16-17; 고전 12:3). 성령은 신자의 몸을 성전으로 삼아 내주하신다(고전 3:16; 6:19). 성령만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도 내주하신다(고후 13:5; 빌 2:13).

성령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자 안에 신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다(요 14:20; 롬 8:1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요일 3:24 참조). 

 
성령이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여, 성경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는 것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성령의 내적 증거(internal testimony of the Holy Spirit)라고 한다.

내주하는 성령의 역사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구원이나 성화와 관련된 사역이다. 성령이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 몸 안에서 이루는 사역이다(고전 6:19-20; 롬 8:11; 딤후 1:14; 약 4:5; 요일 2:27).

내주하는 성령을 통해 신자는 말씀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고, 거룩해져 가고(성화), 마침내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한다. 내주하는 성령은 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부드럽고 비밀스럽고 은은하게 역사하시면서 우리가 끝까지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을 도와주신다. 내주하는 성령의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간다. 

 
-임재(臨在. manifest presence)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보수주의자들은 성령을 내주하는 성령으로만 이해해 왔다. 갑작스럽고 뜨겁게 임하는 성령에 대해서는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성령 하나님의 또 하나의 존재 방식인 하나님의 임재,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현(神顯)에는 무관심했다.

한편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 체험 즉 성령 체험이 있어야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성령 체험이 없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극단적으로 잘못 주장한 사람도 생긴 것이다. 그러나 비록 본인이 성령 체험이 없더라도 성령은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신다. 

 
내주하는 성령이 비둘기같은 성령이라면 임재하는 성령은 불같은 성령이다. 내주하는 성령이 은밀하게 역사한다면 임재하는 성령은 체험적으로 나타난다. 내주하는 성령이 성령의 열매와 관계가 있고 임재하는 성령은 성령의 은사나 황홀 체험과 관계가 있다.

   성경에서, 내주하는 성령은 주로 서신서에서 말하는 성령이며 임재하는 성령은 주로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보혜사 성령은 위로, 평강과 같은 관계적인 측면의 성령은 물론 가르침과 죄 책망과 같은 내주하는 성령, 기쁨 체험과 같은 임재하는 성령을 모두 카바한다고 할 수 있다. 

 
\"나타나다, 드러나다\"(manifest)의 헬라어 파네로는 \"숨겨졌던 것을 알게 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특히 숨겨졌거나 보이지 않던 것이 외적으로 감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성령의 은사가 외적으로 오관을 통해 감지할 수 있게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성경은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과 동의어로 사용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의 임재는 성령의 내주와는 또 다른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모든\' 신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감지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체험이 없거나 체험의 폭이 좁은 사람들은 많은 오해를 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기도 하고(출 3:2),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지만(출 3:2; 수 5:13-15), 많은 경우 지진, 뇌우, 번개, 폭풍과 같은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나시기도 한다(출 19:9-16; 삿 5:4; 시 114-5-8). 특히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불과 구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출 13:21).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manifestation of God 즉 theophany)라고 하며 아람어로 쉐끼나라고한다. 여기에서 임재(manifest presence)라는 말이 생겼다.

신약에도 이러한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그런데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현이 모두 현시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현현이란 것이 없다고 주장해 왔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하나님의 현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나타난 현상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주장이 기사와 표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기적종식론과 맞물려서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부정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임재의 대표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 체험이나 기적행하는 은사를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현현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제한하고 성령의 나타나심―특히 기적행하는 은사나 성령 체험―은 말씀 속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말씀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도구인데도 도구 속에 도구를 들어 사용하는 성령을 가두어 버린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한 체험을 강조하다 보면 말씀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내세우기 쉽고 더 신기한 체험을 추구하다 보면 성경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기 쉬우므로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이러한 우려는 정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 체험 곧 성령 체험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므로 신학적인 지식이 많고 신앙인격이 성숙된 신자보다는 초신자나 무학자(無學者)들에게 주시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이들은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2천년 동안 교회가 쌓아온 신학과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제한된 체험으로만 성경을 해석하고 현재의 신앙상태를 판단하기 쉽다. 

 
그러다 보니 말씀과 전통과 신앙생활의 일관성을 중시하는 개혁, 보수교회와 부딪치는 경우가 자주 있고 정도가 심하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잘못 정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체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위험하다. 오스왈드 체임버스가 말한 대로, 헌신, 사랑, 봉사, 자비 등 신앙의 열매는 정상의 황홀한 체험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골짜기에서의 일상적인 작은 일들을 통해 영글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체험이나 사적인 계시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성경을 해석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이성을 통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성경해석은 인간적인 방법이고 성경만 보고 깨달음을 얻은 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틀린 해석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면만 보고하는 말이다.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갖고 있다. 소위 말하는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에는 문제가 없는가? 성경 공부, 제자 훈련 등 대부분의 교회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에는 이런 취약점들이 없는가? 성경 공부 많이 하고 제자 훈련 많이 했다고 하여 지적으로 교만하여 염소 노릇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바른 교리, 바른 전통만 주장하면 냉랭한 죽은 정통으로 치우친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뜨겁고 신비한 체험도 필요하다\"는 사람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속에 한번이라도 들어간 사람에게 물어보라. \"나는 온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보다 차라리 성령이 내게 10분간 임재하신 것이 좋겠다\"는 스미스  위글워쓰 목사의 고백에 동의할 것이다. 위글워쓰 목사는 배관공 출신의 목사로서 성령 체험을 한 후 무명의 작은 교회 목사에서 온 세계를 무대로 치유의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는 복음전도자로 크게 쓰임을 받았

하나님의 임재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감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통해 신자는 말과 생각으로만 이해하던 하나님을 가까운 연인, 아버지, 친구로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너무나 강한 체험이기 때문에 체험한 사람은 확실히 하는 실상적인 것이다. 

 
절대자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속에 들어갈 때 신자들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죄를 회개하며 동시에 무한하게 자비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속에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함을 누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자 성령 체험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자신들이 체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영적부흥을 죄의 회개로만 이해하여 자녀들에게 사랑과 기쁨을 주시는 영적부흥을 오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기쁨과 평강이 회개와 마찬가지로 영적부흥기에 나타나는 또 다른  하나님의 임재라는 사실을 가장 강조한 사람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이다. (그의 [영적 부흥]이나 [성령 세례]를 보라).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도 영적부흥기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황홀 체험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어떤 사람들이 일종의 황홀경에 들어가서 자신을 잊어 버리고 강하고 유쾌한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 일종의 환상을 보고, 자신이 마치 하늘에 까지 올라간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하나님의 성령께 속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그러한 경우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마귀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조금도 없다. 그러한 것이 광신적이거나 병든 뇌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나는 내 뇌가 그러한 병에 오래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 만일 그것이 정신착란이라면 인간 세계가 이런  자비롭고 온유하고 덕스럽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착란으로 다 사로 잡힐 수 있기를 기도한다.\" 

 
20세기의 선지자로 불리는 A. W. 토저,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없는 높은 학위를 가진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중시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선지자들의 말을 외면하여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지 못한 결과 변두리에서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면 오늘날 신자들이 가진 수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 


문2-오늘날의 신자들도 성령을 다시 구해야 하는가? 믿는 자는 모두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닌가?

답-받았더라도 구하여서 다시 받을 필요가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신자는 성령을 다시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예수를 믿을 때 모두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물론 누구나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계속 받아야 하고, 계속 충만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받은 것으로 끝이고 다시 구하거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논거는 이렇다.

 첫째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령이 ‘이미’ 임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성령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론’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 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인해 성령이 어디에 계시는가? 이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저수지 이론\'을 도입했다. 즉 성령이 강림하여 어디엔가 계시는데 성령이 담겨 있는 저수지가 있다는 것이며, 그 결과 오순절 이후의 사마리아 부흥, 고넬료집의 부흥도 이미 임한 성령이 흘러넘쳐서 그쪽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오순절의 ‘확장’ 또는 ‘연장’이란 말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성경의 다른 구절과 심히 위배된다.

 첫째, 저수지 이론에 의하면 성령을 나누어주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 오순절에 이미 성령이 임했으므로, 그 성령이 오늘날의 교회나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 아니라 사람이 전하는 말씀, 기도 등을 통해서라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으로 성령의 강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물론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과 승천에 이은 약속의 일환으로서의 성령의 강림이며, 그것은 승천 후 성령 강림의 약속이 최초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단회적이지만, 말세에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다는 말씀처럼, 오순절 이후는 모든 육체에게 \'계속\' 부어지는 것이다(행 2:17-18).

 

 둘째, 저수지 이론을 자칫 잘못 이해하면 ‘교회가 성령을 나누어준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저수지 이론가들은 이미 임한 오순절의 성령이 교회로 흘러 넘친다고 하는데 어떻게 흘러넘치는가? 성령이 무슨 물질인가 그냥 흘러 넘치게.

 성령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지금도 나누어주시는 것이다(행 2;33). 과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성령이 어디로부터 나오는가에 대한 주장의 차이로 인해 서로 갈라졌다. 서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했지만 동방교회는 아버지로부터만 나온다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기록한다. “성부는 무슨 물질로 구성되거나 거기서 나오거나 그것에서 유출되는 것은 아니다. 성자는 영원토록 성부에게서 탄생하시고 성령은 영원토록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요 1;14, 18; 15:26; 갈 4:6)(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3절).

 그러므로 굳이 저수지 이론을 말하자면 어디에 존재하는가도 모르는상상이나 신학 속의 저수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성령의 저수지\'가 되신다.


 셋째 이런 주장의 일환으로 신자는 성령을 다시 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령은 오순절에 이미 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다시 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를 믿을 떄 성령이 그 사람 속에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다시 구할 필요가 없다.\"

 과연 그런가? 인간적,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이미 내주하시는 성령을 다시 구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이런 설명은 말 그대로 인간의 논리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미 받은 성령 또 다시 구하거나 받고,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한다.

 이런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은 구하면 성령을 주신다는 구절이다(눅 11;13), 믿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구절(행 2:39)은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하므로 오늘날의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구절이라고 한다.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란 무엇인가?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성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약속과 성취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해석 방법이다. 원래 구속사적 해석 방법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대속 사역을 부인하고 도덕적인 삶의 모범으로만 해석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을 대항하기 위해 생겨난 해석 방법이다.

 (*구속사적 성경해석 방법의 장단점에대해서는 신앙변증시리즈의 ‘기적은 지금도 계속된다’를 보기 바란다.)

 구속사적 해석은 그리스도나 성경이 인물이 구원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독특성과 비반복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쳐서 기사와 이적, 신령한 체험은 모두 비반복적이고 특수한 현상으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쉽게 말하면 그런 것들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나 행하는 것들이지 오늘날의 우리가 본 받을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구속사적이다. 어느 누구도 문자적으로 본을 받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신자라면 이 말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독특한 사건이며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해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고 성령 체험하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만 독특하고 비반복적이 것들이므로 오늘날의 우리의 본이 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주로 성경의 가르침과 명령만 준수하면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들은 구속사적 해석을 지나치게 확장하여 건전한 성경 해석조차 왜곡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체험을 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완성된 성경이 있으므로, 더 이상 기사와 이적이나 신령한 체험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누가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신령한 체험을 주장하면 마치 완성된 성경에 무엇을 더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완성된 성경으로 충분한데 기사와 이적이나 체험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기적종식론의 허구에 대해서는 신앙변증시리즈의 ‘기적은 지금도 계속된다’를 보기 바란다.)  

 
 과연 그런가? 필자는 감히 말하건대,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무체험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와 변명에 불과하다. 이들의 논거는 이럴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기사와 이적이나 신령한 체험이 없다. 내가 속한 공동체도 이런 체험을 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개혁 신학과 같은 정통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교회 시대의 기사와 이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끔 이런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정통 신학-개혁 신학 또는 세대주위 신학-의 바탕 위에 서 있지 않다. 교리적으로 오류가 많은 로마 교회도 기사와 이적을 인정한다.

 이런 것을 볼 때 그들이 체험했다는 기사와 이적이나 신령한 체험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면 말세에 역사하는 마귀들이 저지르는 기사와 이적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기사와 이적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성경의 기록은 무오하다. 그러므로 성경 시대에는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사와 이적을 신화나 전설이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그러면 성경 시대에는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는데 교회 시대에는 왜 일어나지 않는가? (바로 여기에 자기들의 무체험을 변명하기 위한 논리가 개입된다).

 그것은 성경 시대에는 성경 기록이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기사와 이적이 필요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완성된 성경을 갖고 있으므로 더 이상 기사와 이적이 필요 없다.

 우리는 그런 체험보다는 이제 완성된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 

 
 이런 논리로 그들은 신령한 체험을 했다거나 체험을 구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신학적 바탕이 잘못된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과연 그런가? [교회가기 싫은 이유 77 가지]라는 책이 있다. 불신자들이 교회 가지 않고 예수 믿지 않는 이유를 77 가지로 정리한 책이다. (이유가 77 가지만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사도시대에 기사와 이적이 끝났고, 또한 오늘날의 신자는 성령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자위한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소위 말하는 기적종식론이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체험한 사람은 그런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성경적인 인간의 신학이었나를 실감한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기사와 이적은 사도 시대에 끝났고, 또한 성령이 오순절에 이미 임했으므로 구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자기는 물론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무체험으로 인해, 자신들의 무체험이나 일부의 나쁜 체험을 변명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잘못된 신학에 불과하다.


사도들도 오순절 이후에도 성령을 구했고, 성경에도 성령을 구하라고 명령한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눅 11:13).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신다(행 2:39).

-사도나 120문도들도 구하여서 받고 또 받았다(행 1:14; 4;31).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기록한다(고전 14;1).

(*여기서 말하는 사모하다의 헬라어는 젤로인데 ‘간절히 구하다’는 뜻이다).

-방언하기를 구하고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구하라고 한다(고전 14;12-13, 18).

-성령 충만을 계속 받아야 한다(엡 5:18)

 

 어떤 사람은 이것은 신자들에게 내주하는 성령을 활성화하는 것이지 새로 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도 결국은 ‘저수지 이론’의 아류에 불과하다.

 성령을 누가 활성화시키는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나 우리의 기도, 또는 안수를 통해 활성화시켜야 하는데, 결국 주체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이 활성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활성화시키는 방법은 내주하시는 성령을 활성화시키기도 하지만 위에서 부어주시기도 하신다.

 우리는 성경이 기록한 대로 이해해야 한다. 나의 신학이나 논리로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면 오히려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게 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분은 차영배, \"성령강림을 위한 기도의 타당성을 부인한 A. Kuyper(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 비평,\" [성령론-구원론 부교재], pp. 242-49를 보기 바란다.)*  

 문3-성령 체험하고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은 위험하고, 말썽을 부리고, 교회의 덕이 되지 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답-위험하고, 말썽부리고, 교회의 덕이 되지 않는 것은 체험 여부와는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신자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그러면 체험 없는 사람은 모두 착실하고 덕이 되는가? 이것은 낯간지러운 변명이다. 고백 바르고 전통 바른 교파에 속한 신자들 중에, 더 위험하고, 더 말썽부리고, 더 덕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목사를 월급쟁이 취급하며 수시로 갈아치우는 장로들, 교단의 총회장이나 임원이 되기 위해 부정선거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정통주의자들, 교단의 위세를 배경에 업고 목사 안수나 강도사의 성직을 매매하는 자들, 한국의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한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옷로비, 삼풍 사건, 모 기독교 재벌 기업 등-은 대부분이 소위 말하는 정통 교파 출신들이다.

 

 교회의 덕이 되지 않는다? 물로 교인의 영적 체험이나 수준이 목사 수준보다 높으면 교회의 덕(?)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 말하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라 ‘목사님의 교회,’ ‘교단의 교회’를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그런 은사나 체험을 허용하는데 사람이 부인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영적으로 미성숙한 신자가 은사 자랑, 체험 자랑하여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목회자의 영적 체험이 없어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도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방적인 문제가 아니라 양방적이 문제일 수도 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 축사, 예언의 은사를 받은 교인이 그런 것들을 부인하는 교회에 다닐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본인만 알고 있고 내색하지 않는다. 비슷한 체험을 가진 신자들과 비공식적인 교제는 하지만 교회에 드러내지는 않는다. 목사도 교회 전체에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 한 묵인한다.

 이런 경우가 많다. 

 
-자신의 은사나 체험을 드러내어 다른 교인은 물론 목회자와 부딪친다. 이런 경우 목회자는 공개적인 강단이나 비공개적인 접촉을 통해 그 사람을 공격한다. 한 두 번 부딪치다가 그 사람은 결국 맞는 교회를 찾아 떠난다. 

 
-은사 체험자들이 교단 내의 교회에 많거나 그로 인해 교인 이탈이 많아지면, 교단적인 차원에서 그들의 주모자를 사이비나 이단으로 정죄하여 자기들의 울타리를 지킨다. 하나님의 왕국 확장인지 교파의 왕국 방어인지 구분이 모호할 때가 많다. *

 
문4-신자는 믿을 때 성령 세례를 받았는데 또 받아야 하는가? 이것은 이중 구원이 아닌가?

답-단어는 같지만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들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이것은 이런 뜻이다, 저것은 저런 뜻이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더욱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는 사역을 위한 능력성령세례이고 고린도전서의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 되는 구원성령세례이다. 같은 단어이지만 문맥이 다르고 용법이 다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 구원성령세례를 받았더라도 능력적인 사역을 위한 능력성령세례를 다시 받을 필요가 있다.

 또한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은 사역을 위한 능력성령충만이고 에베소서의 성령 충만은 성품이나 인격의 일부가 된 생활성령충만을 말한다. 원어는 단어도 다르고 시제도 다르다. 이는 다른 성령이 아니라 성령의 서로 다른 사역의 국면을 말하는 것이다. 

 
1.혼동하는 이유

 필자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주된 이유는,


-한 단어에는 한 가지 뜻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나,
-실제적인 성령 체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 한 단어에는 한 가지 뜻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오류

 어떤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지만 문장 속에서는(문맥상으로는)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정신병에 들린 사람이거나 무엇에 열심인 사람의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이것을 판별하는 방법은 말한 사람의 의도나 정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더라도 성경 저자의 기록 목적이나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도행전은 성령의 외적 능력으로 인한 영적 체험과 교회의 성장을, 서신서는 성령의 내적 능력으로 인한 성화와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원칙으로 성령에 관한 단어들을 살펴보자.


(1) 성령 세례

ㄱ. 서신서-고린도전서의 성령 세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여기서 말하는 성령 세례는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는 성령 세례를 말한다. 즉 모든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을 말한다.


ㄴ.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행 11:14-16).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5-46).

 여기서 말하는 성령 세례는 외적 능력이나 체험으로서의 성령 세례를 말한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내려오셔서 그 사람들이 방언을 말했다(행 10:46). 베드로는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이 사실을 설명하면서 그들이 방언하는 것을 성령 세례라는 말로 표현했다(행 11;15-17).


ㄷ. 정리

 같은 단어지만 고린도전서는 구원 받는 성령 세례]로, 사도행전은 외적 능력을 받는 성령 세례로 사용했다.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를 구분하기 위해 고린도전서의 성령 세례는 [구원성령세례],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는 [능력성령세례]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비록 구원성령세례를 받았더라도 능력성령세례를 다시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이중 성령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의 서로 다른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성령세례를 받았더라도 능력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것은 개스 레인지의 조그만 불꽃에 비유할 수 있다. 개스 레인지에는 항상 조그만 불꽃이 있다. 그러나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불을 확 올려야 한다.
 마찬가지도 구원성령세례만 받은 사람은 개스 레인지의 조그만 불꽃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꽃만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불꽃씨을 확 올리는 능력성령세례를 받아야 예수를 담대하게 전파하지 않겠는가?


(2) 성령 충만

ㄱ. 서신서-에베소서의 성령 충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여기서의 성령 충만은 신자들의 생활이나 성품을 나타내는 성령 충만이다.


ㄴ.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여기서의 성령 충만은 외적인 능력이나 은사를 받는 성령 충만이다.


ㄷ. 정리

 서신서의 성령 충만과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은, 영어나 한글은 같은 단어로 번역했지만 원어는 다르다.
 에베소서에서는 플레로(현재형: 계속적, 습관적인 의미)를 사용했고, 사도행전에서는 핌플레미(과거형.즉흥적, 일시적인 의미)를 사용했다.

 이는 댐에 담긴 물을 생각할 수 있다. 댐 문을 열어 물을 방출하면 낙차로 인해 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생산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물이 논에 들어가서 곡식이 열매를 맺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사역을 위한 외적 능력으로 임하는 것은 즉흥적이고 순간적이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성품의 열매를 맺는 것은 반복적이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두 가지 성령 충만은 이처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에베소서의 성령충만은 [생활성령충만], 사도행전의 것은 [능력성령충만]이라고 부른다. 결국 [능력성령세례]나 [능력성령충만]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체험을 [능력성령세례]라고 부르고 최초나 그 다음부터는 [능력성령충만]이란 말을 사용했다(행 2:4; 4:8, 31 등).


(3) 기름부음

 복잡하다! 그래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성령 세례나 성령 충만 같은 복잡한 용어 보다는 기름부음이란 단어 사용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 단어도 두 가지 뜻이 있다.

ㄱ. 서신서-요한일서의 기름부음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6).

 여기서 말하는 기름부음은 내주하시는 성령, 구원성령세례, 생활성령충만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름부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여기서 말하는 기름부음은 체험적인 임재로서의 기름부음, 사역을 위한 능력으로서의 기름부음, 능력성령세례, 능력성령충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ㄷ. 정리

 서신서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은 임재하시는 성령을 말한다.


나. 총 정리

 위의 세 가지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저 자
         누            가
        주로 사도 바울

 기록성경
누가복음, 사도행전
서신서들

 성령세례
사역을 위한 외적인 능력으로서의(능력)성령 세례(행 1:5, 11:16).

 
구원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구원) 성령세례(고전 12;13)

 
성령충만

       단어
헬라어 핌플레미

 
헬라어 플레로-

 
시제
부정과거형: 일시적, 즉흥적
현재형: 계속적, 습관적

       의미
초기의 성령 체험(행 2:4) 또는 반복을 의미하며(행 4:8, 31), 주로 사역을 위한 외적 능력을 받는 (능력) 성령충만을 말한다.
성화를 위한 (생활) 성령충만을 말한다(엡 5:18).

 
기름부음
사역을 위한 외적 능력을 입는 것을 말한다(눅 4;18; 행 10:38).
신자로서의 신분(고후 1;21) 및 성화를 위한 사역을 말한다(요일 2;20, 27).


   복잡하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기름부음, 또는 기름부음이란 단어로 내주하시는 성령과 임재하시는 성령의 두 가지 의미를 살리고 있다.

 

다. 기타 다른 용어들

 

누가복음, 사도행전에는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의 기름부음이란 단어 외의 다른 단어들도 사용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느 특정한 한 두 단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음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성령이 임하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5). 

 
-성령을 부어주심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행 10:45). 

 
-성령을 받음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행 8:15).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7).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행 8:1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행 10:47). 

 
-성령이 내려오심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행 8:16).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 사도행전의 성령과 서신서의 성령의 사역의 서로 다른 측면을 이해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사도행전은 성령의 외적 능력을 입어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파하고 전도하는 것에 역점을 둔다. 서신서는 성령의 내적 능력을 입어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에 역점을 둔다.

 전자는 은사에 후자는 열매에 역점을 둔다.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사역과 은사에 역점을 두는 성령 체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 


문5-물 세례는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고 성령 세례는 그것을 실제화 하는 것이 아닌가?

답-아니다 물 세례를 통한 회개도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이므로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미국 캐나다 교회 연감](1990-96)은 지난 30년간 여러 교단의 교세 증감을 기록한 책이다.

이 연감에 보면 주의를 끄는 한 가지 통계가 있다. 요한의 물 세례는 상징이며,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 세례는 이것을 실제화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전통적인 주류 교단—침례교, 감리교,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의 교세는 감소했다.

그러나 두 가지 성령 세례를 구분하여, 비록 신자가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구원 받는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사도행전이 말하는 ‘능력 받는 성령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해석한 교회들은 급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요한의 물 세례는 상징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는 이것을 실제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요한의 물 세례는 상징이  아니라 실제으로 구원을 얻는 세례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에 대한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 3:16; 평행구절 마 3:11; 막 1:8; 요 1:33).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님의 성령 세례의 차이 

 
전통적으로 요한의 물 세례는 눈에 보이는 씻음을 상징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상징적인 물 세례를 실제화 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요한의 물 세례는 회개를 위한 예비적, 상징적, 예표적인 것이요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물 세례의 성취이자 실체요 완성이다. 따라서 물 세례가 외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라면 성령 세례는 내적이고 실질적인 것이므로 이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의 물 세례만 받은 사람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이며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받아야 구원이 실질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의 세례(행 2, 8, 9, 10, 19)는 상징적으로 행해진 요한의 세례를 성령의 세례를 통해 실질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임스 던이 대표적인 주장자이며 아직도 한국에서는 이런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James D. G.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0).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D. A. 카슨은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회개(구원)를 동반하는 세례라고 주장한다(D. A. Carson, “Matthew,”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Zondervan, 984, pp. 104-105).  

그 이유는 첫째 막 1:4 및 눅 3:3이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둘째 예수님도 회개를 촉구했다(마 4:17). 다만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인 메시아인 예수의 도래를 예비(신약 시대의 도래)한다는 점에서는 예비적이지만 그것이 예비적이라고 해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한의 세례가 실질적 구원이 아니며 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의 여러 군데에 명시되어 있는 기록과 상반된다.

예수님의 12제자는 물로 칠십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이미 구원 받았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이미) 기록되었다”(눅 10:20). 삭개오도 구원을 받았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눅 19:9).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는 물론(마 16:16) 다른 제자들도 모두 구원을 받았다(요 15:3). 더군다나 구약의 의인들도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모두 구원을 받았다(히 11장).

 그러므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있기 전의 사람들(따라서 요한의 세례만 받은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의 결과, 요한의 세례를 상징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실질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를 고전 12:13의 성령 세례와 동일시하여 결과적으로 사도행전의 역동적이고 활발한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차영배 교수도 요한의 세례가 상징이라는 주장을 일축한다 (차영배, “요한의 세례와 중생 및 성령의 세례,” [성령론](경향문화사, 1987), pp. 146-68).

그는 요한의 세례, 요한의 이름으로의 세례 및 예수님의 이름으로의 세례 모두 회개를 위한 세례라고 말한다. 요한의 세례는 “단순히 회개케 하는데 그치지 않고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였다.” 그래서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행 2:38에서 베드로도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했으며 예수님도 제자들이나 요한의 세례의 차이를 인정하시지 않으셨다(요 3:22, 23; 4:1, 2). 그러면서 차 교수는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를 구분한다.

 차 교수에 의하면 예수님의 이름의 세례는 오순절의 성령 세례가 아니다. 차 교수는 구원을 받게 하는 요한의 세례와 충만하게 은사를 받는 성령 세례는 다른 것이라는 헤르만 바빙크(H. Barvinck)의 견해를 지지한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이 내리신다”는 말은 오순절과 같이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것을 말하며 “성령의 세례”는 곧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도 사도들이 오순절 이후에 성령을 받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및 승귀에 이르는 구속사가 완성되는 특수한 시기에 살았기 때문이지 그것이 그들의 구원의 실질성과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요한의 세례는 상징이고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그것을 실제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의도는,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신자들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으며.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 세례(?)도 결국은 ‘회심 체험’이며, 결론적으로 신자들은 믿을 때 모두 성령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성령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거하려는 복선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구원성령세례와 능력성령세례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멀마나 애석할 일인가. 자기들의 무체험을 근거로 성경을 잘못 해석해 놓고 오히려 성경이 분명히 구분하는 것을 제대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차 교수는 중생과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 세례가 동일하다는 주장의 위험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중생과의 관계도 적은 문제가 아니다. 만약 성령의 세례를 중생(좁은 의미—거듭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게ㅐ 되면 걷 잡을 수 없는 불안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반 교인들은 순진하여 성령의 세례를 오순절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기는 아직 중생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여 구원을 얻지 못한 것으로 판단할 우려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구원론
], p.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