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의 비유

비유
누가 15:1-7, 마 18:12-14, 잃은 양의 비유
 

누가 15:1-7, 마 18:12-14

 

눅 15:1-7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마 18: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양 무리들 수십 마리가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에서 한 목자가 어린 양 하나를 어깨에 메고 서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본 문은 이 그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 되는 이 잃은 양 비유는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그 깊은 뜻을 계시해 주는데 있어서 가장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잃은 양의 비유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가는 목자,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누가복음의 이 비유는 어떤 상황에서 시작되었는지 보겠습니다

 

1-3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합니다. 왜 세리나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은 원어로 보면 “경멸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아마유대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고수하지 않았고 그로 이냏 사회에서 외면당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세리는 로마 정부가 고용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동족들에게 로마에 바칠 세금을 징수하고 로마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로마정부는 이들에게 자신들이 먹고 살만큼의 별도의 징수를 허락했으므로 이들은 자신의 엄청난 치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매국노로 간주하였으며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도덕적 부랑자들과 같은 부류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다가가고자 하신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을 믿지만 성분으로 분류해 보면, 전문 종교인과 민중의 평범한 종교인이 있습니다. 전문 종교인들은 신앙생활의 규범을 너무도 까다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보통 민중들은 이 법대로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것만도 917가지 규례가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불을 끄거나 켜서는 안됩니다.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등 미슈나라는 율법에 매이게 됩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조금 따라 하다가 그만두고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정도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지키는 전문 종교인들은 이것을 지킴으로 해서 교만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하고 그대로 못하는 사람을 멸시합니다.

이들 중에 가장 심한 무리가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선별된 의식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헬라어로 파리사이오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구별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전문 종교인들의 외식주의, 형식주의, 율법주의를 책망하시곤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여도 잘못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연대 의식과 환영의 의미가 내포된 행위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경멸하고 멸시하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같이 식탁에 앉는 것을 험담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잃은 양의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옛날 그 당시의 목자들은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중동지역은 풀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농사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양을 치게 되는데 조금이라도 풀을 있는 곳을 찾아서 여기저기 헤매게 됩니다.

목자와 양은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험준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고 또 어떤 때에는 맹수를 만나고 강도를 만나게도 됩니다. 이런 때에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내 놓고 맹수와 싸우고 강도와 싸우게 됩니다.

더 무서운 것은 폭풍과 벼락인데, 이런 위험으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위험가운데 목자와 양을 가까워 지고 아주 사랑하게 됩니다.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백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논리라면 남아있는 99마리를 잘 돌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가 나머지 99마리를 돌볼 수가 없게 됩니다.

물론 한 마리를 찾아 나설 때 99마리를 무보호로 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땅히 보호 울타리에 넣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마리를 찾아 나섰을때 99마리 돌보는 것을 소흘히 할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이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그 양의 생명 때문입니다.

‘저 양이 길을 잃었으니 어디선가 맹수에 찢겨 죽겠구나. 낭떨어지기에 떨어졌는가?’ 오직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둘째,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갖가지 위험과 고통스러운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나서게 됩니다. 어디선가 길을 잃고 쓰러져 있을 것을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를 못 견디게 합니다. 양은 뒤집어지면 스스로 다시 뒤집지도 못합니다.

 

셋째, 양은 제 발로 찾아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양은 돌아올 능력이 없습니다. 길을 조금만 벗어나도 옆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양은 순하기는 하지만 갔던 길을 찾지도 못하고 멋대로 갑니다. 또한 때로는 양은 무리에서 길을 이탈하게 되면 갈팡질팡하다가 지치면 움직이지 않고 누워 목자를 기다립니다.

 

이 목자는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으로 계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양을 자기 생명으로 돌보고 지킵니다.

 

5절,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목자가 양을 발견하고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단숨에 남은 양 무리에게도 돌아옵니다.

어깨는 복수형입니다. 양 어깨에 편안히 메는 모습니다.

잃은 양은 안식을 취합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세리와 죄인에게 비유하신 것입니다. 양은 일단 무리에서 이탈하게 되면 목자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못합니다. 그 양은 제 멋대로 가고 지쳐서 쓰러집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자가 찾아서 어깨에 메고 와야 합니다.

이때 목자는 찾은 것으로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 합니다.

사실 이 순간 가장 기뻐해야 할 대상은 잃은 양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뻐한 것은 양이 아니라 목자입니다.

 

6절,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이 비유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수많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목자는 탕자의 비유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비유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은 늘 집 나간 아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행위를 탓하며 잘못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기다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은 하나님이 개개인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두가 필요한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잃어 버린 양 한마리는 어떻게 보면 이미 찢기고 병신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목자는 이 자체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찾아나서야 했고, 찾은 다음에는 기뻐합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은 의인들의 회개보다는 죄인의 회개입니다. 도덕적 부랑자들의 회개를 더욱 기뻐하십니다.

잃은 양 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면 기뻐하십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가 다시 찾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하늘 나라에서는 잔치가 베풀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복음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의할 것은 이 비유는 죄인이 길 잃은 상태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양의 비참함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양을 잃어버리셨다는 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한편, 이 비유를 바리새인들의 반대에서 기회를 삼아 설명하셨다는 점에서보면,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죄인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은 언제나 구원받은 자로 여깁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죄인을 찾아 오셨다고 했습니다. 건강한 자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미 철옹성 같이 자기 체면에 빠져 있는 바리새인 같은 전문 종교인들이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찾아오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전문 종교인들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잃은 양을 찾을 시간이 없습니다. 남아 있는 양을 관리하기에도 바쁩니다. 또한 남아 있는 양은 털을 공급하고 고기를 공급해 주니 잘 돌봐야 하고 눈치도 봐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100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을때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를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한편, 마태복음에도 이와 유사한 잃은 양 비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큰 자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어린아이를 세우고 “저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나를 믿는 이 소자들(마 18:6)을 죄를 짓게 하거나 그들을 멸시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이런 문맥에서 예수님은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것을 어린아이들에게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마 18: 12-13절,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소자들이란 표현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단순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만일 이들 중에 한 사람이 방황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를 다시 찾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자들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세리나 죄인들에게 둘러싸이고 이들과 식탁에 같이 있는 것을 비난하는 것에서 비유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의 상황은 다릅니다. 하지만, 본질의 내용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