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누가 10:25-37,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 10:25-37

 

최근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세 살과 여섯 살짜리 아이 둘이 술과 치킨을 먹다 숨진 어미의 주검 옆에서, 나흘씩이나 과자 부스러기와 날 옥수수를 씹어가며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이웃사람이 문 열 때까지 바퀴벌레 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 내용을 접하고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본문은 성경에 있는 비유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 충격 받고 전 세계의 수많은 병원 사역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자선사업 기관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 앞에 도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봉사와 선교와 헌신의 장으로 그들의 생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 비유가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비유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이 비유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어려운 이웃을 사마리아인 같이 도와주라’는 가장 빨리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내용이지만, 반면에 가장 해석하기가 어려운 비유입니다.

본문은 자선을 가르치는 표본이나 인도주의를 말하는 교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복음적인 의도가 계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말씀의 핵심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지를 보겠습니다.

 

우선 이 비유는 두개의 이야기입니다. 질문하는 율법사의 이야기가 있고 이로부터 유발된 비유가 있습니다. 율법사의 이야기는 구원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 이야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가 시작한 배경은 이렇습니다.

 

25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사의 질문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습니다.

이 무식한 갈릴리 촌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보자는 속셈입니다.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지 않으시고, 성경에 있는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율법사가 대답합니다.

 

27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인용문에서 첫번째 것은 신명기 6:5 말씀이며, 두번째 것은 레위기 19:8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전반적인 의무를 요약 한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이고, 후자는 이웃에 대한 의무입니다.

 

예수님이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28절)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사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복음으로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29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율법사는 교묘하게 자기의 의를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이 율법사는 자기 의에 상당히 도취해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첫번째 계명은 넘어가고 두번째 계명에 대해 애매한 질문을 합니다.

 

29절,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을 깨우쳐 주시려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30절,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27Km 정도이고, 예루살렘이 고지대에 있고 여리고는 요단강 옆에 있으므로 1,200m 정도 되는 내리막길입니다.

이 여리고 지역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고 나무와 풀도 없고 도로 양쪽에는 석회암으로 낭떨어지기와 협곡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순례자와 상인들이 다시는 길으로서 때때로 여행자들은 석회암 바위 사이에 숨어 있던 강도로부터 약탈을 당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하고, 강도들은 이 사람을 반죽음을 만들어 놓고 떠났습니다.

 

31-32절,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가 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본문에 설명은 없지만 강도 당한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같은 민족의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갑니다.

이들은 동정심이 많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강도가 출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반 죽은 사람을 피합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수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만 거론된 것은 굉장한 문제의 발언이며 당시의 유대 종교에 대한 강한 도전의 말씀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이 비유는 발생한지 얼마 안된 사례로 추정됩니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집행하는 성별된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레위기 2:4-7절에 보면, 시체를 만지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피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9)

 

레위인은 성전에 속한 일만 합니다. 제사장과 달리 성전의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성전 봉사자입니다.

이 구제는 다른 사람이 할 일이니 내가 책임질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복음서에 사마리아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주전 8세기에 솔로몬이 죽은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으로 분리됩니다. 북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인데, 앗수르에게 멸망합니다. 그리고 100년 후에 남 유다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게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인종 말살정책을 써서 사마리아에 있던 인구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다른 나라에 있던 인종을 사마리아에 배치합니다. 사마리아에 일부 남아 있던 유대인과 이주해온 사마리아들이 통혼함으로서 혼합 종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가장 경멸받은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 후에도 주전 6세기에 남왕국 유대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는데 이때 유대인들이 이 계획에 참여하려는 사마리아인들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혼혈인이라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별도로 성전을 세웠는데 유대인들이이를 주전 128년에 파괴시켰습니다.

또한 주후 1세기에는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 경계에 있는 마을에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던 유대인이 살해당하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로 몰려가서 주민을 대량학살한 일이 있었으며, 사마리아 인들은 유월절에 죽은 사람의 뼈를 성전 뜰에 뿌려 놓아 성전을 모독하여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하였고,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그들의 성전을 짓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지역을 가려면 중간에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는데유대인들은 이 지경을 통과하는 것도 싫어서 요단강을 건너 동쪽으로 우회하여 다니곤 합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상호간의 미움과 적개심의 배경에서 볼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인종적으로 소외 당하고 배척당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33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어떤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유대인과는 교제를 나누거나 아는 사이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깁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하여 지나간것과 비교가 됩니다.

사실 강도 당한 유대인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 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것은 예수님이 신분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사나 장로라는 사실 때문에 감동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테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보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리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사마리아인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려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짐승을 사용했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두 데나리온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나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고, 만약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지불하겠다고 부탁을 합니다.

사실 여행객의 약속은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약속이 통하는 것은 사마리아인이 주막 주인에게 그동안 신뢰를 쌓았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36절,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8절) 라고 대답합니다.

율법사는 강도 당한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이 이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의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압력을 다른 데로 돌린 것입니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그는 이웃을 자기 백성과 동족의 일원으로 한정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엄격하게 말해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사는 이웃을 객체로 하는 질문을 물은 데 반해, 예수님은 이를 주체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답하신 것이 아니라 누가 이웃답게 행동하는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이웃으로서 행동하고 있느냐?”

 

우리는 우리의 의무에 한계를 짓고 싶어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게 사랑이 있느냐? 그러면, 누구를 사랑해야 할지 걱정하지 말아라. 만약 네게 사랑이 있다면, 네가 궁핍에 처한 자를 만날 때 마다 너의 사랑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게 만들 것이다.”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도 말하기 싫어서 “자비를 베푼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어느 대학에서 학생 한 명이 자살했습니다. 그가 남긴 편지에는 “교회에 나가도 아무도 나를 돌봐 주는 사람이 없다”라는 글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잘 알면서도, 무시를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공은 사마리아인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구약의 두 사건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첫째, 역대하 28장에 있는 사건입니다. 주전 734년 아하스 왕 통치기간 동안 예루살렘과 유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포로되어 갔던 기사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중에서 옷을 취하여 벗은 자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우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 형제에게 돌린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대하 28;15)

 

여기에 나타난 핵심적인 어휘들이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타나 있습니다.

 

둘째, 호세아 6장에 있는 본문입니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호 6:9)

 

잘 알려져 있는 구약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는 비유를 가르치심으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이 구약의 계속이며, 동시에 율법과 선지서에 대한 해석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는 예수님 말슴은 신명기 5:33, 6;24, 레 18:5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산상설교에 보면 예수님 말씀은 이웃으로 끝나지 않고 원수도 포함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비유에 나타나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 입장에서 볼 때, 이웃이란 말은 신분을 확실히 할 수 있는 유대인에게만 해당될 수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 매를 맞고 옷이 벗겨져 거반 죽은 상태가 되어 신분을 알아 볼 수 없게 된 자는 이웃으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율법사에게 있어서 관심사는 어디에 선을 긋느냐를 아는 것입니다.

그는 사랑이 한계를 가졌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이 비유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사랑과 자선을 베풀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비유를 말하게 한 율법사에게 준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여기서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사마리아인입니다.

만약 유대인이 감기쯤이 간단한 병이었다고 사마리아이이 도와주려고 했다면 에이 부정하다고 핀잔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극한의 고통의 상태가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잊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의 진실된 사랑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거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으며, 영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거에 어떻게 현재가 어떻고 하는 것을 문제 삼을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 서로 돕고 사랑하는 거기에 이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이끌어 갑니다.

25절,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는 살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은혜를 통해 영생을 주었다. 네 안에 있는 이 새 삶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며, 이를 실천 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가서 내가 네게 주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과 동료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계속해 나가라”

 

강도당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나를 구해준 사람이 이왕이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하필이면 사마리아인 인가? 하는 불평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마리아인께서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셨을때, 우리도 뒤로 물러섰었습니다.

우리가 절박한 상황에 처할 때에, 우리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할 때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때에 그 분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유대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피부색도 틀리고 모습도 틀립니다.

그런데 이 분이 내 삶의 눈물과 고통과 고독과 모든 질병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병고침, 기적, 말씀의 권위 등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메시아인가?” “갈릴리의 촌사람, 죄인들의 친구,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비난을 받는 사람, 저 사람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강도 만난 것과 같은 너희들을 돕고 있는데 무엇이 그리도 가릴 것이 많으냐?”

“내가 너희의 이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도대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냐?”

기어이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을 때 되어야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영생을 알게 됩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비난받고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으로 동일시되시면서 또한 강도 만난 자를 돕는 주인공임을 친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래도 내가 너희의 이웃이 아니냐?”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이웃으로 영접할 때에 비로소 영생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러면 영생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