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를 살리시니

이적
요한 11:1-6, 나사로를 살리시니
 

요한 11:1-6,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이 이적을 많이 보이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최고의 이적이라 할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은 복음서에 세번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의 과부의 아들, 마태복음 9장(마가복음 5장, 누가복음 8장)의 야이로로 딸,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이적중의 이적이 왜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을까? 그것은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이 기록해 주고 있는 이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주장에 초점이 맞추어 있습니다.

나사로의 이야기는 요한이 이것을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궁극적인 능력에 대한 표적과 다가오는 예수님 자신의 부활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이적이 7가지가 기록되어 있고, 지금까지 6가지가 설명되었으며, 이제 마지막 이적이 11장에서 설명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통보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적이 행해진 것입니다.

 

자 이제 본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초막절과 수전절을 예루살렘에 지내시고, 요단강을 건너 세례받으신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불과 2~3개월이면 십자가를 향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셔야 합니다.

 

요 11:1-2절,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나사로가 있는 곳은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남동쪽 3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감람산 동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병든 나사로는 마리아의 오라비라고 하면서 마리아에 대해 “향유를 붓고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요한복음 12장 1-7절에 나옵니다(마 26:6-13, 막 14:3-9). 그런데 이렇게 설명해야 하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 등 복음서에 나오는 다른 마리아들과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향유 붓는 사건이 설명된 적은 없지만 이렇게 간결하게 언급한 것은 이 복음서를 기록할 시기인 주후 1세기에는 이 사건이 이미 잘 알려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과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나 유숙할 곳이 마땅치 않을 정도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곳곳에서 바리새인들이 잡으려 하고 돌로 치려했고 책을 잡아 로마군인들에게 넘기려 했습니다.

 

눅 9:58,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이 얼마나 외롭고 고적한 모습인지 잘 나타낸 구절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있는 예루살렘 부근의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서만은 편하게 유숙하신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실 때마다 베다니에 들리셨고,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갈릴리로 내려가실 때도 들리시어 이 집에서만은 편히 쉬신듯 합니다.

 

나사로 가정을 보겠습니다. 부모님이 안계시고 삼남매가 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아버지가 안계신다는 것은 큰 결손입니다. 그리고 이 삼남매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데 결혼도 아직 안했습니다. 무언가 사연이 많습니다.

다만, 생활 형편은 그런대로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값비싼 향후 옥합을 깨뜨렸을 때 그 향유가 든 옥합은 요즘 시가로 5~6백만원 정도로 추산할 수 있는데 당시에도 고가의 패물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배경이 되는 시점에는 나사로 형제들의 이야기는 아마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복음서 마다 기록된 마르다, 나사로, 마리아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이들의 변화 과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찾아가신 것은 누가복음 10:38~4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많은 일로분주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분을 냅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예수님이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가지만 하든지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설교하면서 저녁 준비보다 예수님 말씀 듣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 단순합니다.

 

마르다가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다른 이들에 대하여 불친절하였다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혼자 두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마리아가 말씀을 듣고 잘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베다니에 잔치가벌어졌습니다. 그 집은 시몬의 집이었는데 마가는 그 사람을 문둥이라고 했으니 아마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듯 합니다. 그때 저녁 잔치였습니다.

 

요 12:1~2,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배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

 

큰 잔치였으니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일을 보면서 밝은 심령으로 봉사하는 모습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불평했는데, 불평없이 봉사합니다. 왜 그렇게 변했을까요?

11장에서 나사로 사건으로 주님 따르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이제 나사로를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신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2:0~11,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나사로는 증인의 역할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에 장례는 누구나 다 보는 자리에서 치루어졌고,또 장례식에 사람들이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사로 때문에 울 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읽습니다.

나사로가 분명히 죽어서 장례를 치렀고, 나사로가 살아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몬의 집에 차려진 저녁 잔치 이야기 속에서 나사로를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말합니다.

 

이제 마리아를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 발 앞에 있었습니다.

 

눅 10:39, “예수의 발 아래 앉아서 그의 말씀을 듣더라”

 

우리는 이 모습만 보더라도 그녀의 살아 움직이며 행동하는 믿음을 볼 수있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는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리고 다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붓고 발을 그녀의 머리털로 씻어냅니다.(요 12:3)

마리아는 어째서 그리스도께 기름을 부어드렸는가 하는 의문이 들수 있습니다.

앞으로 그가 당할 죽음을 내다보고 그런 일을 하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요 12:7).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몇 달 동안의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마리아 만이 예수님께서 죄를 위해서 죽으실 것을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기름을 사용했다는 것은 마리아가 예수께서 하실 일을 이해했고, 그 일 때문에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은 가장 값진 소유를 드리되, 그 값진 것을 남김없이전부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한 일을 “기념하여” 온 세계에 기억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4:9)

 

이렇게 세 인물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 인물에게 난제가 발생합니다.

 

3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이 난제는 누구나 부딪치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겪을 수밖에 없는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가장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들 마저도 병들어 급기야는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매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는 것을 기초로 예수님께 그 병든 사실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는 병들었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 ‘병들었나이다’는 그가 죽을 병이거나 죽어가고 있었다는 걸 함축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신자가 병든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신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몸에 질병을 앓게 될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사랑은 우리에게서 인간 삶의 일상적인 필요와 연약함을 제거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전히 사람입니다.

 

욥기 5: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아픔이 하나의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을 위하여 사용 하셨던 하나의 시련이었습니다.

 

4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사람은 누구나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 일도 모르는데 내일 일은 더욱이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나사로가 죽은 것이 무슨 영광이 되었을까요?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은 어느 것이든지 예수님께도 영광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최초의 이적 기사를 결론 짓는 구절인 요한복음 2:11절과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을 요약적으로 함축하는 구절인 요한복음 11:’40절을 비교해 보면 명백해집니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며”

요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리라 하지 않았느냐?”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사로가 죽어 다시 살아난 일이 예수님이야말로 어떤 상황이든지 대처하실수 있는 분임을 드러냈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광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어 장사한지 나흘이 된 후에 베다니에 늦게 오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아닌 누가 이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나사로는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지도자들의 적대감이 더욱 더 가중되도록 작용하는 마지막 불똥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일의 귀추를 내다보시면서 그걸 향하여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머물르셨습니다.

 

5~6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알려드렸을 때, 병이 낫거나 최소한 예수님이 달려오실 줄 알았습니다. 하루 길에서 즉시 오지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동안 얼마나 예수님을 기다렸고 애를 태웠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일부러 지체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늘의 시기는 우리의 시기와 다릅니다. 우리의 한 날이 하나님께는 천날이고, 우리의 천날이 하나님께는 잠시입니다.

사도행전에서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보고를 죽이고, 베드로 마저 죽이려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했으나 상황이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처형당하기 전날 그 밤에 천사가 베드로를 구출했습니다.

천사는 베드로에게 신발을 신으라고 하고, 겉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서두르지 않습니다. 이때가 하나님이 베드로를 구출하는 시기였다고 보여집니다.

   나사로의 이야기로 부터 하나님의 지체하심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그러한 지체가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당연히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그 사건들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를 대체로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방식으로 오실 것입니다.
 
분명 그때는 우리가 택한 때보다 더 늦을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신적 관점에서 보면 그 때야말로 적당한 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때에 맞추어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