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때부터 소경된자의 비유

이적
요한 9:5-12, 날때 부터 소경인 자의 치유
 

요한 9:5-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역경을 극복한 사람 하면, 누구보다도 생각나는 사람이 ‘헬렌 켈러’입니다. 그 헬렌켈러가 ‘듣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지만,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보지 못하는 소경 가운데서도, 날 때부터 소경이라면 더 불쌍합니다. 왜냐하면, 날 때부터 소경은 상상할 수 있는 근원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본 일이 없으니 상상할 능력이 없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거지이고, 소망없이 하루 하루를 지내는 더 버릴 것이 없는 고난의 삶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이 소경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을 내려다 보십니다. 소경은 누군가 왔다고 생각은 했겠지만, 이 분이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소경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고,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가늠할 수도 없습니다.

 

이 소경은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조건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고 이를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 가능하지 않은 일을 구걸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경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려 하는 이적을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소경을 만나던 순간에, 이 소경에게 있어서 한가지 다행스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니실 만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소경이 계획해 낸 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있던 길은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소경을 보고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복음을 처음 들을 때 처음부터 영적인 진리를 볼 수는 없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듣기는 들었어도,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예수님도 볼 수 없었습니다. 영적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감을 잡기도 곤란합니다.

이 결과, 그 영적 진리들을 이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때 여러분 모두는 영적으로 ‘잃어버린 자’이고 ‘소경’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다니기 쉬운 곳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이 자리에 와 있고, 이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아주 선한 조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여러분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흩어보시면서, 여러분을 어떻게 사용하실까 생각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소경에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6절,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소경이 주께 고침을 받으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 다른 물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십니다.

사실 눈에 진흙을 바르면 보이던 눈도 안보이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 안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을 빚어 만드셨습니다(창 2:7).

예수님이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신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계시한 것입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이 소경을 고치고 새롭게 하실 수 있음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우리를 지으신 분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침을 뱉아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셨습니다.

혹시 꺼림칙한 느낌을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까?

이상해 보이고 미련해 보이기까지 합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영적인 빛과 시력을 회복시키는데, 그 복음은 회심치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영락없이 그와 같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말할 때, 형편없이 오래된 구식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복음이 적절치 못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한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하였습니다.

진흙이 뭐냐구요? 그러나 그 진흙은 예수님에 의해서 빚어진 진흙입니다.

침이 뭐냐구요? 그러나 그 침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침입니다. 복음을 말씀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 악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인격을 손상시킨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마치 진흙으로 그 소경의 눈을 바른 것이 그 시력을 도와주기보다는 방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소식은 죄를 더 조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시대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짓자”고 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정반대로, 복음은 모든 참된 신자가 알듯이 인간의 삶을 정화시키는 가장 큰 능력입니다.

이 단순한 방편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왔습니다.

 

여러분, 이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만이 문둥병에 걸려서 엘리사를 찾아왔을때, 엘리사가 요단강물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안들어 갑니다.(열왕기하 5장). 왜 안들어 갔습니까? 나만은 요단강물이 자기를 비하시키는 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복음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면, 나만 같이 현재 처해 있는 곤경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 진상을 알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처럼 자기가 절망적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에 오셔서, 이적을 행하지 않는 한 아무 소망이 없음을 인식하였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약속하든지 다 받아들일 것이고, 말씀하는 대로 행할 것입니다.

 

 

여러분, 기드온의 양털을 아실 것입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7년동안 전쟁에서 패하고 약탈을 당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사로 택하여 나가서 싸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하나님께 제안을 합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을 마르면 믿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기드온이 다시 한번,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또 그렇게 되됩니다(삿 6장)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못 믿겠으니 물질적인 표징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 소경에게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물질적인 상징을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요?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에 그의 고침은 치료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나타난 10명의 문둥병자의 경우를 상기시켜줍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진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소경이 어떻게 순종하였습니까?

 

  7절,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예수님이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성전 남쪽에 있는 못으로, 성전 바깥에 있던 기혼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 유다의 히스기야왕이 기혼 샘의 물이 수로를 통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실로암까지 흘러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기혼 샘에서 실로암까지 샘물이 보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로암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유래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경을 실로암으로 보내면서, 그 뜻이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18절,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시고, 동시에 구세주가 되기 위해 ‘보냄을 받은’ 분입니다.

실로암 못은, 바로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것은 간단한 명령입니다.  

그런데 소경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이 명령은 순종을 테스트하는 시금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소경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전달되는 복음도 단순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예수를 믿을 것인가? 라는 질문형태가 아닙니다.

만일 이 명령을 받고 머뭇거리고 있다면, 이 소경보다 훨씬 더 눈이 멀어있는 것입니다.

 

소경은 어떻게 했습니까? 소경은 눈이 멀었지만 그리스도께 복종했습니다.

그는 복종의 결과로 육신의 시력을 부여 받았고, 급기야 참된 영적 시력을 받게 되는 오솔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을 위해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직 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복종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시력을 주실 것이고, 그 다음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9장 3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말씀은 소경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소경이 눈에 진흙을 발라서 실로암으로 가는 모습은 하나의 시위였습니다.

누가 그가 소경인 것을 모릅니까? 그가 눈을 감은 것이나 지팡이를 잡고 가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그가 소경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눈에 진흙까지 바랐습니다.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더 드러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흥미있는 일입니까?

소경이 눈에 진흙을 바르고 가는 모습은 마치 자기가 소경인 것을 자랑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본문에는 두 종류의 소경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날 때부터 소경이 되어서 예수께 고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창조주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던 영적인 소경입니다.

눈에 진흙을 발라서 자기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채 보냄 받은 사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간 사람은, 달라져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였습니다.

 

9장 39-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소경 외의 사람들은 모두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자기들을 찾아왔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소경인 줄도 깨닫지 못하는 소경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소경일수 있습니다.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십니까?

당신이 죄인이며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방황이 보이십니까?

당신이 소경임을 깨닫습니까?

 

영적으로 소경이라면 삶 역시 가난하고 비굴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그분의 자녀로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삶이 있는데, 구세주를 알지 못하므로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9-10절, “이웃 사람들과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소경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눈만 떴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그가 눈을 뜬 것은 큰 변화입니다.

그러나 더 큰 변화가 이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육신으로 우리를 만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셔서 실로암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얼마나 보 잘것 없고 초라합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통하여 병든 심령이 치료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귀한 것은 우리에게 말씀이 있고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암 못을 화려하게 하고, 사람들을 많이 모은다고 해서 병이 치료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내셔야 합니다. 주님이 만나주시고, 그의 눈에 주님의 침으로 이긴 진흙을 바르고 보낸 자들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으로 갑시다.

우리 스스로 완전한 체 하지 말고 아직도 마음에 가득차 있는 양심을 속이는 일, 불신과 탐욕, 거짓, 정욕을 이마에 써 붙이고 주님의 존전으로 나아갑시다.

마음의 병든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십시오. 이를 우리 입으로 고백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능가하는 주님의 축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11절,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내고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소경이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셨는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자기가 보게 되었다는 것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을 만나서 고백합니다.

38절, “주여 내가 믿나이다”

 

사실 소경이 단순히 눈을 떴다는 사실이 기적이 아닙니다.

소경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지자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그가 예수님을 보게 된 사건입니다.

 

이제 당신이 영적인 소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빛 되신 주님을 향해 돌아서십시오.

 

5절,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어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창조자이시며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에 의해서 발견되었다면, 여러분에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그 결과로 영원토록 예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그 영적 역사를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헬렌 켈러는 “당신은 때때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두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주께서는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화니 크로스비 여사는 9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생을 장님으로 살면서 찬송시를 8천 여편을 썼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도 24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204장도 크로비 여사가 작성한 가사입니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화니 크로스비의 행복은 주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는 불행한 처지에 있었지만, 그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따라가는 감격으로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영혼의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나,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게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소경이 눈을 뜬 것이 기적이 아니라 주님을 보게 된 것이 기적이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옵시고, 빛 되신 주님을 따르며, 끊임없이 주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