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속에서 걸어 오신 예수님

이적
요한 6:16-21, 폭풍 속에 걸어오신 예수님
 

요한 6:16-21, (마태 14:22-33, 마가 6:45-52)

 

들어가면서

 

지난 40년간,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번영 신학’입니다. 이 신학은 성경 말씀 중에서 특별히 축복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너무 한쪽으로 편협하게 본다고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이 번영 신학이 한국 사회에 강한 영향을 미칠수 있었던 것은, 토착신앙인 기복신앙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전도현장에 가면 늘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라고 합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경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보다, 예수 믿고 더 힘들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예수 믿고 삶이 더 어려워질 때가 있다면, 힘든 상황에 처할 때,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 현실에 직면해야 하겠습니까?

 

본문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이어진 일입니다. 마가복음 6장 45절에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아시고 배를 타고 갈리리 바다를 건너가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소문처럼 정말 메시아 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기적의 놀라움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그분에게 압도당했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여 배를 타고 건너갑니다.

 

폭풍을 만난 제자들

 

제자들이 배를 타고 출발한 시간은, 날이 어둑할 때 였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폭풍이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마가와 마태는 그 바람이 “그들을 거스려” 불었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18절)”고 덧붙였습니다. 이 풍랑은 위험스러웠습니다.

 

밤 세시가 될 때까지 풍랑을 겪으면서 노를 저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자기들을 도울 힘이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자기들이 예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걸 의식했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지만, 이 상황은 다르다. 예수님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모른다. 이제 큰일이다.’

이런 정도의 생각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제자들은 이미 노도하는 물결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5천명의 사람들을 먹이기 전에 갈리리 바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설교로 지쳐서 배 밑창에서 주무셨습니다. 이때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울부짖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3~27, 막 4;35~41, 눅 8:22~25.)

 

제자들은, 다시 한번, 갈리리 바다를 노저어 가면서 이 새로운 폭풍을 만났던 것입니다.

깜깜한 밤, 바다, 폭풍 속에서, 본능적으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에서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꼴이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것은 왜 일까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가 없다(마 10:29)고 하신 주께서, 제자들이 고난을 겪도록 만드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축복과 영광에 심취된 제자들에게, 폭풍우와 거센 고난의 바다를 보여주셔야 했던 것입니다. 고난의 삶이 더 자주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셔야 했던 것입니다.

고난이 있는 때에, 보이지 않던 예수님이 찾아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오시는 주님

 

마가복음 6장 48절.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산 정상에서 갈리리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밤 사경이면 새벽 3시입니다.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12시간을 사 등분하여, 사경은 새벽 3시-6시가 됩니다. 어둠의 절정인 새벽 3시이니,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을 수 있는 그런 시간입니다.

 

제자들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절망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오셔서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19절을 보면, 제자들은 의외의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워 합니다.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령인가 해서, 더 깊은 좌절과 불안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뒤, 모든 희망을 잃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체험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의 옛 생활로 돌아가는 제자들의 마음은 처량했습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고독하고 고통스러웠던 엠마오로 가는 길에, 어떤 나그네 한 사람이 동행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께서 그 눈을 열어 줄 때까지, 주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눅 24;13-31).

 

본문에서, 제자들은 바로 전날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던 주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져서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있던 것입니다.

 

사람은 다급한 상황을 만나면, 일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은혜와 축복, 기적을 잊고, 오직 현실에 발목이 잡혀, 절망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희망을 잃어버리고, 가능성을 닫아 버립니다.

 

출애굽기 16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도착하여 절망하다가 기적이 임하여 그 홍해를 통과했을 때,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까? 그러나 광야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것이 떨어지자 애굽의 노예생활이 더 낫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도 먹을 것 때문에 불평을 하였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요한복은 6장 20절, ‘내니 두려워 말라’.

‘내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아주 중요하고 독특한 표현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능력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이 함께 가시니,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이때 하나님은 독특한 자신의 존재를 계시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I am that I am.)”

하나님이 하나님임을 밝힐 때,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그로라”

예수님이 친히 ”나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때,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마태복음 14장 28절.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적을 본다고 해서 반드시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을 사람은 믿지만, 안 믿을 사람은 절대로 안 믿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고 해서 믿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적을 보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에 기적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생겼을 때, 기적은 의미가 있고,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베드로에 주신 응답은 “오라” 입니다(마 14:29).

그러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가 믿음이 없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약하고, 겁도 많고, 호언장담도 잘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실수를 통하여, 참 믿음을 가르쳐 주시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믿음이 불안하고, 허물이 많고, 근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이 말씀을 보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라 하시면서, 우리를 영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응답에 대해, 베드로는 어떤 행동을 하였습니까?

 

베드로의 물위 걸음과 빠짐

 

마태복음 14장 29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물 위를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말씀의 능력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근거하여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걸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물 위로 발을 옮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생각이나 신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노도폭풍을 보지 않고 물위에 서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에 베드로는 환경보다도 예수님이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사탄을 이기고 죄와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신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도 예수님과 똑 같은 기적과 축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태복음 14장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물 속에 빠진 것입니다.

왜 베드로는 물에 빠졌을까요?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예수님 말씀을 듣고 정신 없이 예수님 앞에 뛰어들어 갔고, 물 위에 서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걷다가, 거센 파도와 폭풍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정상이 아니고, 물에 빠진 것이 정상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 거센 파도, 무서운 바람이 우리 주위에 끊임없이 불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이 파도와 바람에 휩쓸려 갈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쳤을 때는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마태복음 14장 30절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이 순간 베드로는 얼마나 놀랐고,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질렀을 것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이런 간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늘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응답이 안됩니다. 왜 그럴까요?

불신자가 하듯이 할 것 다하고, 죄 지을 것 다 짓고, 습관적으로 앵무새 처럼 입을 열기 때문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긴급하게, 진실하게, 절대 절명의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심각한 기도를 해 본적이 있습니까?

이 순간 베드로의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찾을 때, 구주께서는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손을 잡아주시는 주님

 

주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31절.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그런데,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고 믿음이 적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어느 날 영적인 회의와 좌절이 마음에 생기거든, 그것은 주님과 당신 사이에 맺어진 관계가 흔들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임을 아십시오.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실 때는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겼으나, 고난의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와 성난 파도를 만날 때는, 변함없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주님을 믿는 큰 믿음이 없습니다. 그것이 좌절과 고통의 원인입니다

 

구주께서는 즉시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건져 주시면서,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51절.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우리는 매일, 바람이 부는 바다에서 삽니다. 배 안에 있다 하더라도, 그 배가 흔들립니다. 배가 우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배에 올라오시면, 바람이 그칩니다.

 

마무리

 

풍랑이 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작은 배에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오신 것입니다. 풍랑이 일고 있는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그가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타고 있는 인생이라는 이 작은 배, 눈물짓고 고통스러워하는 내 인생의 뱃전에 기꺼이 오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함께 있느니라.”

 

여러분, 고해 같은 인생, 거센 생활고에 좌절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시계와 톱밥이야기를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톱밥이 많은 곳에서 놀다가 귀한 시계를 잃어버렸습니다. 톱밥을 아무리 뒤져도 시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계를 찾아 주는 사람에게 후사하겠다고 제안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톱밥을 헤집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시계를 찾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잠시 쉬려고 밖으로 나왔을 때, 이때 한 어린아이가 들어가더니 금방 시계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찾았느냐고 묻자, 어린아이가 대답합니다. ‘쉬워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째각째각 소리가 나거든요.”

 이렇듯이 우리가 가만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주님이 예비해 두신 큰 복이 임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고, 스스로 영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풍랑 속에 있는 제자들을 보십시오. 잠시의 환경 변화 속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험한 길, 환난, 고통, 무거운 짐. 누가 이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육신, 누가 영생을 주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께 나를 맡깁니다. 몸과 혼과 영을 다 맡기나이다. 당신께서 내 생명을 받아주기를 원합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풍랑 속에 있는 제자들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만을 보게 하시고, 주님 말씀만을 듣게 하옵소서. 주님만 의지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일어나겠습니다.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