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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6:1-15, 오병이어의 표적
(마 14:15~21, 막 6:32~44, 눅 9:12~17)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이적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중에서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것은 본문의 오병이어의 이적 뿐입니다.
이 이적에 대해 복음서 기자마다 각각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나름으로 자기가 느낀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이적 자체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적을 묘사하면서 많은 수식을 붙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사랑스런 긍휼을 강조합니다. 그 수많은 무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주로 관심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때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시련의 시기였고 전환점을 맞는 시기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친히 영적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떡이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그 이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표적(sign)이라고 칭합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이적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1~2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님은 갈릴리 부근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워낙 넓으니 막혀 있는 호수이지만 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게네사렛 호수, 디베랴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디베랴 라는 이름은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작은 도시를 세운 서 유래한 것인데 당시에는 이 이름이 더 통용된 것 같습니다.
“그 후에”는 “이 일들 후에”라는 의미입니다. 4절에 보면, ‘유월절에 가까운지라” 라고 했습니다. 5장에 나오는 38년된 병자를 치유한 사건은 예수님이 공생애에 나오신지 1년이 지난 유월절 기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로 보건대 5장의 사건과 본장의 사건들 사이에는 1년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이에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눅 7:11-17), 12제자를 파송 하신 것(막 6:6~13) 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지만 요한은 이를 모두 생략하였습니다. 아마 요한이 가장 늦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다른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오병이어의 기적은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더라도, 더 상세한정보가 포함된 내용을 자신의 문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6:22~71 절에 나오는 생명의 떡에 대한 설교의 도입 역할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와 중복되더라도 다시 소개하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가운데 두고 서쪽의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면 동쪽은 뱃새다이며 거리는 약 4마일 정도로 25리 쯤 됩니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라고 했으니 갈릴리 바다를 가로질러 가신 것이 아니라 해안가로 가신 것이며 가신 이유도 잠깐 쉬시기 위해 한적안 곳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것을 따라서 육로로 앞서 뱃새다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 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다가 저녁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예기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5~6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은 뱃새다 사람입니다. 빌립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 지역에는 음식을 구할만한 곳이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생각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계획이 있으셨고, 친히 그들의 궁핍함을 채워 주실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하시지 않고 빌립의 생각이 어떠한지 물어 보셨습니다.
빌립이 생가하고 있던 것은 무엇입니까?
7절,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이 제한된 자원으로 계산해 봅니다. 일꾼 하루의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 이백 데나리온이면 7개월의 월급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씩 받게 된다고 계산했습니다. 빌립은 계산이 빠릅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말했습니다.
8~9절,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는 원래 빌립의 친구로서 한 고향인 뱃새다 사람입니다.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이 부족하다고 절망적인 계산을 하고 있는데,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안드레가 어떤 기적을 기대한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의 실정을 더 정확하게 알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말도 안되는 일인줄 알면서도 주님께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소년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이 소년은 가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리떡은 아주 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으로 그 당시 나귀에게도 먹였다고 합니다. 모든 떡 중에서 가장 하찮은 것입니다. 이 소년은 이 떡을 가지고 있었고, 이 떡을 먹을 때 메이지 않도록 두 마리의 절인 생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물고기도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물고기를 헬라어로 익두스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옵사리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단어는 마치 굴비와 조기와의 차이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익두스는 보통 물고기를 말하고, 옵사리온은 절인 물고기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으면 큰 고기는 잡아서 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가져오고 작은 물고기는 다시 물속에 집어 넣어 살리는 것이 그들의 풍습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가져가기도 물 속에 넣기도 어중간한 크기의 고기가 잡히면 그냥 바닷가에 버립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주워서 짜게 절여 자기들의 양식으로 삼았는데 이 고기가 바로 옵사리온입니다.
즉 지금 예수님 앞에 내놓은 고기가 바로 소금에 절인 작은 물고기 옵사리온입니다.
결국, 보리떡이나 물고기나 둘 다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입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음식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은 놀랍게도 이 보리떡과 물고기로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람 수효는 남자 어른들만 계산합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계산하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에 분명히 소년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략 1만명에서 2만명 가량 추정됩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이적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나타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이적은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아들 됨의 권능을 증명하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오늘 이 이적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첫째로,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곧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정말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뜨거운 마음으로 위하여 기도하면 이 기도에 응답이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안드레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두 마리를 발견해서 소개하는 소개자의 중요한 역할이 이 기적을 이루게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린 소년이 이 음식을 예수님께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내게 가져오라”(마 14:18) 말씀하셨을 때, 이 소년이 순종하고 바쳤습니다. 이것은 적고 보잘 것 없는 음식이었지만 예수님의 손에 들리워 질 때 큰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적은 하늘에서 그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 소년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적을 받을 만한 그릇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만한 수고, 이만한 믿음이 있어야 이적은 이루어 집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그릇에 이적이 담긴 것입니다.
11절,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축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사스입니다. 감사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앉혀 놓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식사 때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이때 주님은 이러한 일반적인 감사기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적 중의 이적이라고 할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이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12~13절,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버릴 것이 없게 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남으면 보관하는 것이 관습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님의 말씀은 이적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먹고 남은 것이 ‘열 두 바구니’입니다. 왜 열 두 바구니일까요?
이스라엘은 12지파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백성의 필요를 채우고도 남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지표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 난 후에도 처음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적의 결과는 의미있고 놀랍고 중요합니다.
다음에 나올 대화는 무엇이겠습니까?
14절,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이신 후에, 그 이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결심했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인들을 축출할 정치적인 메시야로 삼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기심 때문에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개념을 탁월하게 보유하고 있는 종교적인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하신 대로 어느날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일으키시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신 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에게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유월절 축제를 거행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열망에 고취된 이 무리들은 예수님 안에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는 말이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신명기 본문에서는 메시아적 왕보다는 한 예언자적 인물을 예언하고 있었는데 반해, 이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즉시 메시아적 왕의 역할을 맡겨 버린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랑하는 동안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내리신 만나로 그 분의 백성을 초자연적으로 먹이셨을 때 제정되었습니다. 그 배경은 또 광야 지역 곧 모세가 앞으로 올 선지자에 대해 말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분명 예수님은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해방자 곧 두번째 모세였습니다.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중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드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기 전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들을위한 대속물”로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막 410:45)
예수님은 이 진리를 아셨습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사건대로 있으면서 상징적인 의미로는 오천명에 대한 성만찬 예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요한복음 6장 전체에 대해 기록하면서 앞으로 이제 계속 사건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온 세계 만민이 그 분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데 조급도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떡 다 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떡과 피에 의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천명을 앞에 놓고 장엄한 성만찬을 행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적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 표적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이 표적은 오늘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표적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을 충만하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부족함이 없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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