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 38년된 병자 치유

이적
요한 5:1-9, 삼십팔년된 병자 치유
 

요한 5:1-9

 

병원에 가면 중증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경계통을 다치면 몇 년이고 병원에서 식물인간 같이 누워있기도 합니다. 암 선고를 받고 수술한 후에 재발되면 의사는 “이제 더 할 일이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집에 가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병에 걸리면 몸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병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병을 이겨내겠다고 결심도 합니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문안 오는 사람도 적어지면 소외감이 생기고, 자신을 돌보는 주위 사람들 마저 피곤하게 하곤 합니다. 비록 한 사람이 병이 걸리지만, 그 영향은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는데,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활동하실 때는 언제나 명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은 3개입니다. 유월절, 초림절, 오순절입니다. 그 중에서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는 민족 해방을 의미하는 최대의 경축일입니다.

 

본문에서 “유대인의 명절”은 논란은 있지만 유월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예루살렘 반경 22 Km 에 사는 성인남자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순례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2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예루살렘 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에 성문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그 성문을 통해 들어가면 성전입니다. 그 중에서 양 떼들이 드나드는 “양의 문”이 있었었습니다.

 

느혜미야 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기 시작한 때, 예루살렘 성을 재건했습니다. 망루를 세우고, 문을 세우고, 문과 문 사이의 성벽을 증수해 나가게 됩니다. 제일 처음에 세운 문이 양의 문이었고, 제일 나중에 세운 문이 함밉갓문입니다. 밉갓의 의미는 심판입니다. 아주 상징적입니다. 최초의 문으로 은혜의 문을 건축하고, 마지막으로 심판의 문을 재건한 것입니다. “양문”은 중요한 상징성을 갖습니다

 

“베데스다”는 집이라는 베이트와 은혜라는 헷세드의 합성어입니다.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이 베데스다 연못은 양을 씻는 장소였습니다. 여기서 양을 씻어서 양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행각이란 지붕 달린 정자 같은 것인데, 다섯 개라고 하니 그 연못의 규모가 상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섯이란 구약 종교에서 상징성이 있습니다. 자비와 긍휼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형제들과 재회하여 그들에게 음식을 줄 때 특별히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에게는 다른 형제들보다 다섯 배를 더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축사하셨습니다. 다섯 행각은 모세오경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3절,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 묘사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능한 자, 스스로 어쩔수 없는 자로 묘사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사람들의 불능이 세개의 어휘로 더 뚜렷이 드러납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자 입니다. 혈기 마른 자는 중풍병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모습입니다.

 

은혜란 성경적으로 이야기 할 때 행위와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행위는 자기의 결과에 대하여 자기의 조건과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는 말이고, 은혜는 자기가 얻는 결과에 대하여 자기 노력의 근거나 조건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은혜의 집에 와 있으면서도 은혜와 상반되는 것이 있습니다. 물이 동함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도 바로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행위라는 것은 성취하는 자에게는 상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어떤 선한 행위를 했다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베네스다에 오신 것은 이 은혜를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의 사건에서 율법과 은혜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과 상징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히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하게 될 때 누구든지 이 연못에 들어가면 병이낫습니다. 그러나 들어갈 방법과 힘이 없는 것이 율법을 손에 든 모든 인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적으로 제시해 놓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떤 사람도 방법을 몰라서 구원을 못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을 힘도 없고 또한 무엇이 구원인지 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사실을 거듭 말하고자 세가지 병명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소경이요, 절둑발이요, 중풍병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먼저 들어가야 할텐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중증 병자입니다. 해야 할 때 필요할 때, 뛰지도 못하고, 구를 수도 없습니다. 운이 좋아 누가 대신 들어주기만을 바라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포기하게 됩니다.

 

왜 포기했습니까?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4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본문에 ( )로 되어 있습니다. 이 ( ) 내용은 고대 주요 원문에는 없는 내용이 필사본으로 추정되는 자료에는 있기 때문에 별도로 표시한 것입니다. 또한 그 내용도 확실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동하면 그때 가장 먼저 연못에 뛰어드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소문이라는 것은 확인이 안된 것입니다. 하지만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사람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물의 동함은 무엇인가요?

 

‘동하게 함’은 헬라어로 에타랏산으로서 미완료시제입니다. ‘뒤흔들다, 뒤끊게 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에 계속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이것이 그들의 믿음대로 천사가 그리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연현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중증 병자들이었으므로, 물이 동한 후 그 못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절박한 바램이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병자들은 실낱 같은 환상을 안고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습니다.정말 천사가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왔는지, 연못 물이 동했는지, 가장 먼저 뛰어든 병자가 나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 비바람만 몰아쳐도 물이 동한 것으로 착각하고 모두 뛰어들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병자를 잘 보십시오. 소경, 절뚝발이, 중풍병자입니다. 그중에는 아무도 자력으로 물이 동하는 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말과 맞지 않습니다. 스스로 돕는 자가 되지 못하고 아무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이 도우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5절, “거기 38년 된 병자가 있더라”

 

38년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명기 2장 14절, “가네스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 이때에도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 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 걸렸는데 그들은 가데스바네아를 중심으로 해서 광야를 38년이나 방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38년이란 숫자는 광야의 고생스러웠던 기간을 상기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병자는 38년 동안 앓았으니 얼마나 희망이 없는 삶입니까?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자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가 병자들의 희망의 다툼에서도 낙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에 오셔서 병자들의 처절한 모습을 둘러보시고, 아무 희망도 없고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자비와 은혜를 베푸실 예수님이 찾아가셨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며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환자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거나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을 운명에 맡긴 채 목숨만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다가 가신 것입니다.

 

선택은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는 수많은 병자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중에서 특별히 이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주님은 당신을 선택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주님이 당신을 선택한 것은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당신이 먼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영광스러운 구원과 사랑을 체험한 일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당신의 공로로 선택 받지 않았습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향한 주님의 자비는 이러한 선택의 은혜로 시작되었습니다.

 

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많은 사람 중에서 38년 동안이나 병에 걸려 있던 한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씀에서 행동의 주체는 예수님입니다. 병자는 고쳐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현장에 주님이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동사가 있는데, “보시고” “아시고” 입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하고 고통스러워했는지를 보시고 아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우리의 형편을 미리 아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아뢰기 전에 주께서 먼저 우리의 아픔과 절망과 슬픔을 보시고 아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는 말씀은 구원의 주체는 주님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일방적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우리 삶의 장에 뛰어드셨습니다. 38년간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을 향한 주님의 자비가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자에 마음에 희망을 심어 주는 것으로 치유를 시작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치는 것을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38년 동안 병을 앓았으면 희망을 가지기 힘들 것입니다. 예수님이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 병자는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소망의 불꽃이 사그러진 그의 가슴에 작은 불씨를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완전히 좌절한 사람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병자는 주님의 질문에 뭐라고 답변했습니까?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이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이 병자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이 사람은 낫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낫지 못했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물이 실제로 움직이기는 했던 모양인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그 곳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상 나이보다 더 오랫동안 막연히 미신 같은 꿈을 붙들고 살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낫고자 하는 가냘픈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힘든 고비를 만날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여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38년된 병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병을 낫는 것이겠지만, 단순히 병이 낫는다고 해서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는 있을까요?

 

14절에 보면, 이 사람의 병의 원인을 그가 지닌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나은 후 다시 만나셔서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안헥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더 심한 것은 병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병이 죄의 탓은 아니겠지만, 이 사람의 무서운 병은 바로 죄의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내려갔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분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인줄 모르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고통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 때문 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처럼 여러 가지 변명거리를 늘어놓겠습니까? 거짓말로서 일단 상황을 면하려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우리의 죄성을 인정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치료하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직을 되찾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자기의 죄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치료받아야 할 가장 무서운 병은 교만입니다. 이 교만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영접하지 않습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자 병자의 변명거리 답변에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명쾌합니다. 설교하거나 설득하지 않습니다. 상처 난 사람에게 그 상처를 싸매는 말씀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능력에 찬 말씀입니까? 세가지 명령만 있습니다

 

첫째, ‘일어나라’ 입니다. 38년 동안 주저앉아 있던 사람에게 예수님의 명령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주십니다.

 

둘째, ‘자리를 들어라’ 입니다.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에게 자리는 보금자리입니다. 이탈리아의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항상 손수건을 갖고 다닙니다. 그 사람은 손수건이 없으면 노래를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38년된 병자는 항상 자리를 끼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 자리를 걷어치우라고 명령하십니다. 38년된 불가능의 벽을 깨고 나오라는 뜻입니다.

 

셋째, ‘걸어가라’ 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단절하고 미래의 희망을 향해 걸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에는 권위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병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하신 날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율법에따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할 일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들의 비난과 정죄와 고발을 감수하면서까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은혜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게하시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은혜의 집이라는 베데스다에서 주께서 사랑의 기적을 베푸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연못가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대신해 속죄의 제물로 죽어갈 양들이 그 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아주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을 치러야 할 양들이 그 문을 통과하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상징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사랑은 때로는 핍박과 수고의 짐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이 짐을 거부하지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사랑의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형틀입니다. 예수님 당시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이 받는 형벌이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이 그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값없이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값 비싼 대가를 치르고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윌리엄 비버리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더라도 죄를 짓습니다. 설교하더라도 죄를 짓습니다. 목회를 하며 거룩한 성례를 집행하더라도 죄를 짓습니다. 내가 회개한다 할지라도 그 회개는 회개할 또 다른 이유를 만듭니다. 내가 흘린 눈물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질 것을 요구합니다”

 

맞습니다. 본성상 사람은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일어서서 하나님을 전혀 맞을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내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처리되었으며,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