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의 혼인 잔치

이적
요한 2:1~11, 가나의 혼인잔치
 

요한 2:1~11
 

 

들어가면서

 

예수님이 결혼식에 참석하셨습니다. 결혼식이 행해진 곳은 가나라는 곳입니다. 가나는 예수님이 자란 나사렛 동네에서 건너다 보이는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 결혼식에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참석하였는데, 마리아는 그 혼인 잔치에서 중요한 일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혼인 잔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이 없습니다만,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외경에 의하면 잔치가 벌어진 이 집은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여동생 살로메의 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자신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알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과 가까운 집안이었다는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게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1~2절)’

 

‘사흘되던 날’(1절)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설명하는 연대기에 따르면, 이 날은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획기적인 첫 주간 중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첫째 날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보낸 대표단을 세례 요한이 맞았던 날이었습니다. 둘째 날은 요한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던 날입니다. 셋째 날은 안드레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제자(요한으로 추정하고 있음)가 예수님을 따른 날입니다. 넷째 날은 안드레가 자기 형 시몬을 불러온 것과 관련되어 일어난 사건들이 있은 날입니다. 다섯째 날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어디를 가시느라고 하루를 다 보냅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예수님께서는 가나에 도착하시고 그 제자들과 함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공적 생애를 공식적으로 시작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나이다

 

유대인들은 혼인을 수요일에 합니다. 우리의 결혼은 식을 올리고 잔치를 하지만, 유대인들은 낮에 먼저 먹고 마시는 잔치를 하고 저녁에 식을 올립니다. 그러니 결혼식 전에 진행되는 잔치가 손님들에게 중요한 절차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 혼인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도주였습니다. 이미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도록 미리 준비합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모자라 걱정할 일은 별로 없지만 갑자기 불청객들이 들이닥치거나 초청받은 손님들이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 버리면 모자라는 경우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손님 대접을 제대로 못한 집안으로 낙인이 찍혀 주인이 매우 난처한 처지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포도주나 떨어졌음을 알게 되었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서 무언가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신비스런 요청을 합니다. 마리아가 왜 예수님을 찾아갔는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때만 해도 예수님은 복음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라 아직 예수님이 무슨 표적을 행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가서 포도주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무엇이 마리아로 하여금 이렇게 하도록 하였을까요?

 

마리아는 30년간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아버지 없는 집안의 장자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목수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보는 마리아의 눈은 특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특별한 증거들을 잊지 않았고, 예수님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남다른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을 떠날 때부터 예수님의 생애 속에 일어나는 변화를 간파하였음에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최소한 다섯 명의 제자와 함께 돌아왔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아마 그녀는 ‘바로 이 때다 이제 그는 공적으로 자신을 선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자여’

 

마리아로부터 설명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여자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여 입니다.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말씀은 분명하게도 우리 귀에 거슬리게 들립니다.

 

그러나 원어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라는 말은 부인이라는 의미의 존칭이었습니다. 아무리 존경하는 투의 호칭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아들이 어머니를 그렇게 부른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고 합니다. 문헌에도 없고 관습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왜 그런 호칭을 사용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한 집안에서 살던 사생활은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는 마리아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세상의 죄를 짊어질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마당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위상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분수령에 서 계셨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마리아 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해 여자여 라는 호칭을 상요하신 것입니다. 지금부터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마리아는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

 

4절 후반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이 말씀을 하실때는 대개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십자가를 질 때가 아직 안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잔칫집에서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할 때가 아직 아니다라는 말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마리아의 요청을 사실상 거절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포도주를 당장 내놓으려면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언제 포도주를 따와서 만듭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어떤 이적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 이런 이적을 행할 만한 때가 안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때가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는 걸 아셨습니다. 그 분은 재촉이나 상황에 의해 다루어질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본체로서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간표는 예수님에게 추호도 빈틈없이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언제라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시면 언제라도 그것은 때가 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28 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하나님의 지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에서 놀라운 부분이 전개됩니다. 예수님은 그 혼인 잔치에 기쁨이 없어지고 당황한 빛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움직이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분명히 마리아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이것을 거절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조금후 예수님께서는 하인들을 불러서 마당에 있는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마당에는 여섯개의 돌 항아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한 개 당 6갤런, 대략 23리터 정도 들어가는 큰 항아리였습니다.

 

웬 만큼 사는 유대 사람들의 집안에는 항상 마당 구석에 항아리가 있고 물이 가득히 담겨 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샌들을 신고 먼지 나는 길을 걸어 다니다 보면, 여자고 남자고 발이 더러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물을 떠와서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항상 마당에는 물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의 유전을 따라 음식을 먹을 때 마다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 의식을 위해서는 마당에는 언제든지 물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물이 가득 채워지자 주님께서는 이제 떠서 잔치를 책임지고 있는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뭐가 뭔지도 모른채 마리아가 시킨 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 항아리에서 떠서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회장은 사회자나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연회장이 그 포도주 맛을 보고 신랑에게 말했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마시고 너무나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뒤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10절).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다가 나중에 취하면 값싼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인데, 어떻게 이 집은 나중에 더 좋은 포도주를 내놓느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처음으로 갈릴리 가나에서 하나님이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첫째로, 이 표적은 긍휼어린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신랑이 부끄러움을 당할 각오를 하며두려워 하는 그 시점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 궁핍이 하나의 복락이 되었습니다. 만일 충분한 포도주가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표적을 행하지 아니하셨을 것이고 이 가장 순전하고 가장 좋은 포도주를 맛보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자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이끌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무런 궁핍도 없이 지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독한 곤궁에 처해 있다면, 그리스도의 손이 여러분에게 뻗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영혼이 그 비었던 항아리가 아구까지 물이 가득 찼던 것처럼 슬픔이 물로 가득차 있다면, 예수님이 당신의 아름다운 의지로 말미암아 그 모든 물을 포도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표적은 겸비한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행해진 것이라는 말을 두번이나 듣습니다. 주님이 첫번째 표적을 행하신 것은 예루살렘이나 주목받는 도시가 아니라 척박한 이방인의 땅 갈릴리의 작은 마을입니다. 멸시 받는 땅입니다. 그리고 첫번째 표적을 행하신 장소는 거룩한 지혜 속에서도 아니었고, 교회 성직자들 앞에서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이 바로 교회나 성당에서 행해져야 된다는 공상어린 생각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표적은 개인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기도모임이나 성경을 일고 있는 모임이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가난한 비둘기 같은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행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생의 고통의 장소에까지 낮아지심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에까지 낮아지셔서 우리 존재의 세속적인 부분에도 복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잔치를 배설했던 사람들은 다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 부자였다면, 포도주가 그렇게 금방 떨어지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사람들보다 일곱명의 손님이 더 그 잔치에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유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첫번째 표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나 율법사들 같이 단순히 스스로 존귀함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표적을 행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겸비한 자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영적 교훈입니다


이 본문으로부터 우리가 배울수 있는 영적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인격의 질을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앞으로 예수님을 만날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실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면 본질적인 변화를 체험합니다. 물처럼 무미건조한 것이 포도주로 바뀌듯이 맛있고 향기로운 인격으로 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땅의 것만 생각하던 수준 낮은 사람이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수준 높은 사람이 됩니다. 죄악의 종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뀝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새 마음으로 바뀝니다. 주님을 만나면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우리의 모든 것이 바뀝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가운데서 아직도 이런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 인격이 질적으로 바뀌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파트 큰 평수로 이사 갔다고 우쭐대고, 남보다 공부 좀했다고 다른 사람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인격이 아직 변화받지 못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건조하고 메마른 인격이 풍성하고 기름진 인격으로 바뀝니다. 마리아처럼 믿고 하인들처럼 순종하면 예수님 앞앞에서는 누구든지 물이 포도주가 됩니다. 물과 같은 내 인격이 포도주와 같은 인격이 되고 물과 같은 내 삶이 포도주와 같은 삶이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베풀어 주시는 포도주를 받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특이한 것이 없습니다.

 

매우 단순하고 쉬운 것이 있을 뿐입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인가 좀 큰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있는 그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고 주 예수께서 명하시는 대로 행하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물로만 채워져 있던 그 자리에 포도주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시어 여러분의 마음을 바실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심령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본성적인 생각이 자리하고 있던 그곳에 영적인 생명과 느낌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더 좋은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연회장은 처음보다 나중의 포도주가 더 나은 것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는 처음보다 그 다음이 낫고 그 다음보다 또 그 다음이 낫습니다.

 

예수를 믿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갈수록 어제보다 오늘이 좋고 오늘보다 내일이 좋고 점점 좋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처음 믿는 사람들에 비해 신앙생활의 매력을 덜 느낀다거나 혹은 그 매력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더 좋은 은혜를 주십니다. 시간적으로 따져도 구약 시대에 은혜 받았던 사람들보다 신약시대 성도들이 얼마나 더 넘치는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구약시대 사람들은 약속을 바라보고 살았지만, 우리는 그 약속의 성취를 누리면서 삽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율법 아래 살았지만, 신약시대는 은혜 아래서 삽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께 나와서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할 때 여러분 자신에게 기쁨이 없고 절망적인 상태에 빠질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으로 실패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많은 양의 포도주를 만드시고 보리떡과 고기들을 넘치도록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리(요 6:15)’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무리

 

요한은 이야기를 끝내면서,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리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느니라(11절).’ 고 부연합니다. 이적은 표적이라는 말입니다. 이 표적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이 완성하셨으니 유대인의 종교는 어느 의미에서 주님이 하신 일로 대치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민감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유대인의 가정에서 물 항아리들을 사용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그 항아리들은 유대인들의 정결케 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유대 사람들의 눈멃, 특히 지도자들의 눈멂에 대해서 설명한 바가 있는데, 물 항아리가 비워 있으며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종교의 공허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철두철미하게 그 중심에 서 있지 않으면 기계적인 고정관념으로 타락되어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이 메말라 있습니다. 생명의원천이시요 스스로 생명이신 그 분을 떠나서 종교란 싸늘하고 생명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기쁨을 떠나서는 종교는 기쁨이 없고 인격적인 성품을 완고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습니까? 그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마음의 주림과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만이 천사들 마저도 부를 수 없었던 노래를 여러분이 입에 두실 수 있습니다. 그 분만이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요구를 거절하시다가도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격과 삶의 질을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더 좋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한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순간부터 이런 은혜가 흘러나옵니다. 왜냐고요?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