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지금도 계속된다
기적은 지금도 계속된다
신앙변증 시리즈 ①
기적은 지금도 계속된다
-사도시대에 기사와 이적이 끝났다는 기적종식론은 건전한 체험의 결핍과 인간의 논리가 낳은 잘못된 주장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지금도 기적을 행하신다>
기적은 과연 끝났는가?
어느 자매와 신유의 은사를 가진 어느 목사와의 대화이다.
\"목사님, 저는 기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네, 맞습니다. 자매님이 기적을 간절하게 필요로 할 때까지 자매님에게 기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칼 조지는 미국 유수신학교의 교회성장학 교수이다. 청교도 신앙과 보수주의를 견지하는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신유에 대한 관심은 각계각층의 환자들의 관심을 끈다. 오랫동안 나는 그런 집회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아왔다. 그러던 중 1983년 말경에 나는 암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암 덩어리가 보입니까라면서 의사는 나에게 퉁명스럽게 X레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번 화요일에 수술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수술하기 전 날 마지막 검사를 앞두고 나는 간호원에게 \"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저도 크리스천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압니다\"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의사로 하여금 암 덩어리를 제거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의사는 운이 좋다고 했지만 내가 치유 받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석했다.
나는 주님께서 때로는 의사의 도움이 없이도 인간의 질병을 고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동시에 의사를 통해서도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라도 치명적인 병에 걸려 있을 경우, 나같이 이성적인 사람도, 신유를 강조하는 교회나 단체를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집회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건전한 체험의 결핍으로 인한 기적 종식론
필자가 신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담당 교수가 강의 시간에 기적, 예언, 방언은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체험이 있는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주저하지 않고 \"그것 틀린 주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체험이 없는 많은 학생들은 너무나 논리가 정교하기 때문에 상당히 설득되어 있었다.
일부 초신자들이나 신학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만 체험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한국선교사 출신이자 개혁신학자인 간하배 박사도 필자의 질문에 대해 \"내가 귀신 쫓는 것을 봤기 때문에 축귀(또는 축사, 귀신 쫓는 것)를 믿는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기적이나 축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직접적인 경험이 없거나(무경험에 의한 주장), 좋지 않은 소문이나 경험(나쁜 경험에 의한 주장)으로 인해 그런 주장을 한다. 이런 주장들도 어떻든 경험에 의한 주장이다.
\"내가 방언 받으려고 노력했는데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의 외적 증거는 방언이라는 주장은 틀렸다\"(무경험에 의한 주장).
\"은사 받았다는 사람들이 말썽만 부리더라. 그래서 나는 구하지 않기로 했다\"(나쁜 경험에 의한 주장).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경험 또는 나쁜 경험에 의해 기사와 표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면서도 자기들의 주장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가?
기적 종식론(cessationism)이란 기사와 표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주장이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기적 종식론자(cessationist)라고 부른다. 오늘날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은 물론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도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기적 종식론을 따르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록이며 따라서 오류가 많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부정한다.
이들은 성경의 기록을 심리적인 과대망상,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설이나 신화로 \'설명해 버린다\'(explain away).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도덕적인 가르침만을 강조한다.
한편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부정할 때 온갖 논리와 변증으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변호한다.
그러다가도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면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부정하는 그 논리―심리적 과대망상, 무속 신앙으로 설명해 버린다 .
하나님의 존재 방식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시는가? 이에 대한 이해가 기적 행하는 은사에 대한 이해를 도우므로 잠시 살펴보자. 성경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은 대충 세 가지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소부재 (또는 편재. omini presence).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천지에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하나님은 천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서는 거룩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도 교회를 떠나면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천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감찰하고 계신다.
내주 (內住. indwelling presence). 내주는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만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 방식이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사람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신다(요 14:16-17; 고전 12:3).
성령은 신자의 몸을 성전으로 삼아 내주하신다(고전 3:16; 6:19). 성령만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도 내주하신다(고후 13:5; 빌 2:13).
성령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자 안에 신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다(요 14:20; 롬 8:1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요일 3:24 참조)
성령이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여, 성경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는 것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성령의 내적 증거(internal testimony of the Holy Spirit)라고 한다.
내주하는 성령의 역사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구원이나 성화와 관련된 사역이다. 성령이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 몸 안에서 이루는 사역이다(고전 6:19-20; 롬 8:11; 딤후 1:14; 약 4:5; 요일 2:27).
내주하는 성령을 통해 신자는 말씀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고, 거룩해져 가고(성화), 마침내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한다.
내주하는 성령은 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부드럽고 비밀스럽고 은은하게 역사하시면서 우리가 끝까지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을 도와주신다. 내주하는 성령의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간다.
임재(臨在. manifest presence).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보수주의자들은 성령을 내주하는 성령으로만 이해해 왔다. 갑작스럽고 뜨겁게 임하는 성령에 대해서는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성령 하나님의 또 하나의 존재 방식인 하나님의 임재,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현(神顯)에는 무관심했다.
한편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 체험 즉 성령 체험이 있어야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성령 체험이 없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극단적으로 잘못 주장한 사람도 생긴 것이다. 그러나 비록 본인이 성령 체험이 없더라도 성령은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신다.
내주하는 성령이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면 임재하는 성령은 불 같은 성령이다. 내주하는 성령이 은밀하게 역사한다면 임재하는 성령은 체험적으로 나타난다. 내주하는 성령이 성령의 열매와 관계가 있고 임재하는 성령은 성령의 은사나 황홀 체험과 관계가 있다.
성경에서, 내주하는 성령은 주로 서신서에서 말하는 성령이며 임재하는 성령은 주로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보혜사 성령은 위로, 평강과 같은 관계적인 측면의 성령은 물론 가르침과 죄 책망과 같은 내주하는 성령, 기쁨 체험과 같은 임재하는 성령을 모두 카바한다고 할 수 있다.
\"나타나다, 드러나다\"(manifest)의 헬라어 파네로는 \"숨겨졌던 것을 알게 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특히 숨겨졌거나 보이지 않던 것이 외적으로 감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성령의 은사가 외적으로 오관을 통해 감지할 수 있게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성경은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과 동의어로 사용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의 임재는 성령의 내주와는 또 다른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모든\' 신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감지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체험이 없거나 체험의 폭이 좁은 사람들은 많은 오해를 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기도 하고(출 3:2),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지만(출 3:2; 수 5:13-15), 많은 경우 지진, 뇌우, 번개, 폭풍과 같은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나시기도 한다(출 19:9-16; 삿 5:4; 시 114-5-8).
특히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불과 구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출 13:21).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manifestation of God 즉 theophany)라고 하며 아람어로 쉐끼나라고 한다. 여기에서 임재(manifest presence)라는 말이 생겼다.
신약에도 이러한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그런데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현이 모두 현시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현현이란 것이 없다고 주장해 왔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하나님의 현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나타난 현상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주장이 기사와 표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기적종식론과 맞물려서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부정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임재의 대표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 체험이나 기적 행하는 은사를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현현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제한하고 성령의 나타나심―특히 기적 행하는 은사나 성령 체험―은 말씀 속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말씀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도구인데도 도구 속에 도구를 들어 사용하는 성령을 가두어 버린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한 체험을 강조하다 보면 말씀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내세우기 쉽고 더 신기한 체험을 추구하다 보면 성경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기 쉬우므로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정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 체험 곧 성령 체험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므로 신학적인 지식이 많고 신앙인격이 성숙된 신자보다는 초신자나 무학자(無學者)들에게 주시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이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2천년 동안 교회가 쌓아온 신학과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제한된 체험으로만 성경을 해석하고 현재의 신앙상태를 판단하기 쉽다.
그러다 보니 말씀과 전통과 신앙생활의 일관성을 중시하는 개혁, 보수교회와 부딪치는 경우가 자주 있고 정도가 심하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잘못 정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체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위험하다. 오스왈드 체임버스가 말한 대로, 헌신, 사랑, 봉사, 자비 등 신앙의 열매는 정상의 황홀한 체험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골짜기에서의 일상적인 작은 일들을 통해 영글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체험이나 사적인 계시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성경을 해석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이성을 통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성경해석은 인간적인 방법이고 성경만 보고 깨달음을 얻은 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틀린 해석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면만 보고하는 말이다.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갖고 있다.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에는 문제가 없는가?
성경 공부, 제자 훈련 등 대부분의 교회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에는 이런 취약점들이 없는가? 성경 공부 많이 하고 제자 훈련 많이 했다고 하여 지적으로 교만하여 염소 노릇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바른 교리, 바른 전통만 주장하면 냉랭한 죽은 정통으로 치우친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뜨겁고 신비한 체험도 필요하다\"는 사람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속에 한번이라도 들어간 사람에게 물어보라. \"나는 온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보다 차라리 성령이 내게 10분간 임재하신 것이 좋겠다\"는 스미스 위글워쓰 목사의 고백에 동의할 것이다.
위글워쓰 목사는 배관공 출신의 목사로서 성령 체험을 한 후 무명의 작은 교회 목사에서 온 세계를 무대로 치유의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는 복음전도자로 크게 쓰임을 받았다.
하나님의 임재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감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통해 신자는 말과 생각으로만 이해하던 하나님을 가까운 연인, 아버지, 친구로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너무나 강한 체험이기 때문에 체험한 사람은 확실히 하는 실상적인 것이다.
절대자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속에 들어갈 때 신자들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죄를 회개하며 동시에 무한하게 자비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속에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함을 누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자 성령 체험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자신들이 체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영적부흥을 죄의 회개로만 이해하여 자녀들에게 사랑과 기쁨을 주시는 영적부흥을 오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기쁨과 평강이 회개와 마찬가지로 영적부흥기에 나타나는 또 다른 하나님의 임재라는 사실을 가장 강조한 사람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이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도 영적부흥기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황홀 체험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어떤 사람들이 일종의 황홀경에 들어가서 자신을 잊어 버리고 강하고 유쾌한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 일종의 환상을 보고, 자신이 마치 하늘에 까지 올라간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하나님의 성령께 속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그러한 경우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마귀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조금도 없다. 그러한 것이 광신적이거나 병든 뇌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나는 내 뇌가 그러한 병에 오래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
만일 그것이 정신착란이라면 인간 세계가 이런 자비롭고 온유하고 덕스럽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착란으로 다 사로 잡힐 수 있기를 기도한다.
20세기의 선지자로 불리는 A. W. 토저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없는 높은 학위를 가진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중시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선지자들의 말을 외면하여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지 못한 결과 변두리에서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면 오늘날 신자들이 가진 수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기적 행하는 은사란?
성령의 사역이 신자들의 생활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성령이 어떠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느냐에 대한 견해는 서로 같지 않다.
특히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 개혁, 보수주의자와 은사주의자간에 아직도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를 광범위하게 해석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 믿음, 사람의 자연적인 재능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은사(선물)이다.
성령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선물)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여기서는 성령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선물인 성령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신다(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은사, 은사들, 선물이란 무슨 뜻인가? 신약에는 대표적인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하나는 도레아로서 신약에서 11번 사용되는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 또는 선물을 말한다.
도레아는 무료 또는 하사금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그저 주시는 구원(롬 5:15, 17), 그냥 선물(고후 9:15), 성령의 선물(행 2:38), 온전한 선물(약 1:17)을 말한다.
또 하나는 카리스마(복수는 카리스마타)이다. 이 말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나타내는데도 사용되지만(롬 6:23), 대부분의 경우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성령의 은사(들)로 사용된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갖고 있지만(벧전 4:10),
사람에 따라 다른 종류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고전 12:30). 또한 이런 은사들을 가진 개인들 자체가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시는 \'선물들\'이다(엡 4:7 이하).
구원과 성령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값진 선물이며 개별적인 은사들은 이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때의 은사(들)의 좁은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되신 교회의 사역을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은사들\"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은사들은 성령이 그 뜻대로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이 은사들은 고전 12장8-10절 및 28-31절, 로마서 12장3-8절, 에베소서 4장11절 및 베드로전서 4장10-11절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런 것들을 성령의 은사(들)라고 부르지만 성령의 은사라고 구체적으로 부른 곳은 고린도전서 12장 뿐이고, 로마서 12장의 은사들은 하나님이 주셨고, 에베소서 4장의 은사들―또는 직분―들은 승천하신 예수님이 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은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시는 것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논란의 핵심은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기적행하는 은사(들)(miraculous gifts), 또는 표적 은사(들)(sign gifts)과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사도, 선지자5) 및 전도자의 은사(또는 직분)이다. 그 외의 은사들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기적은 성령의 기적 행하는 은사들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기적의 지속성은 곧 성령의 기적 행하는 은사의 지속성과 연결된다.
기적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대표적인 두 정의를 간단히 살펴보자. 번 포이트레스는, \"기적은 그의 백성을 건져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증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활동이다\"라고 정의한다.
웨인 그루뎀은 \"기적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두려움과 놀라움을 일으키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통상적이 아닌 하나님의 활동이다\"라고 정의한다.
이상의 두 정의를 종합해 보면 기적은, 특별하거나 또는 통상적이 아닌, 하나님의 활동으로서, 사람들의 두려움이나 놀라움을 자아내면서, 그의 백성을 건지고, 말씀 또는 하나님―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적인 정의를 사용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이런 정의는 비록 기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는 하지만 너무나 추상적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의에 얽매여 성경이 말하는 기적의 다양한 측면을 무시하기 쉽기 때문이다.
때로는 불충분한 정의 자체가 성경의 기록을 통제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명제적이고 논리적인 교리의 위험이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원에 대해서도 다양한 단어―예를 들어, 영생, 거듭남, 이신칭의 등―를 사용하고,
다양한 측면을 제시하는데 \"오, 구원은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가는 것\"이라고 해버리면 이로 인해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다양한 측면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적의 동어로는 기사(wonders), 표적(signs) 또는 권능(power)이 있는데 하나님의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적의 동기, 목적 또는 기능
그러면 문제는 과연 고전 12장의 은사들이 사도시대에 종식되었가?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 즉 기적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 동기 또는 기적의 기능은 무엇인가?
기적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한다(요 3:2; 9:32-33; 10:25; 14:11; 행 2:22).
사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사실을 증거한다(고전 2:4; 고후 12:12; 히 2:4; 롬 15:18). 오늘날 사역의 현장에 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믿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기적이 필요하지 않은가? 인본주의와 이성주의로 무장된 서구 사회는 물론 제 3세계에서, 기사와 표적이 일어날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인정하고 그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였다는 간증은 무수히 많다.
예수―성령―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마 12:28). 헤르만 리델보스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의 증거는, 악한 자가 정복되어 귀신이 쫓겨나고, 이적을 행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구원을 현재적으로 소유하고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하나님 나라는 한 번 임함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임해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여기서 \"가까웠느니라\"는 현재 완료형의 계속적인 용법으로 사용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초림으로 그 당시 임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임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하나님 나라의 임함으로 인한 5가지 증거가 계속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 기적을 베푸신다. 하나님이 타락한 죄인을 구하신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자비와 긍휼 때문이다.
신약의 도처에서 예수님은 자비, 긍휼 때문에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고 죽은 자를 살리셔서 그들을 건져내셨다고 기록한다(마 14:14; 15:32; 20:34; 막 1:41; 5:19 등).
이것은 실제로 사역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죄와 마귀의 멍에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언젠가 미국의 이름있는 어느 신학교에서는 신학 교수들 사이에 기적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기적 계속론자들은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 때문에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신다고 주장한 반면 반대자들은 성경에도 없는 논리적인 기적 종식론을 내세웠다. 학자들이 성경이 아니라 신학 논리로 하나님의 기적을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이다(출 14:4; 요 11:4; 2:11; 행 3:12-13; 마 5:30-31; 눅 17:17-18).
어떤 사람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행하시지 않기로 작정하셨다고 한다. 성경 어디에 이런 말이 있는가? 영광 받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믿음에 대한 반응으로(마 9:22; 15:28; 행 14:8-10). 물론 기사와 이적은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도구로 들어쓰시기 때문에 수혜자의 믿음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왕상 17:1-16; 17-24; 18:41-46 등). 문명사회에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는 기적을 통하여 필요를 채우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약속에 응하시거나 또는 기도의 응답으로(약 4:2하; 5:14-16).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 응답하신다.
전파하는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기 위해(막 16:20; 행 14:3). 많은 기적 종식론자들은 \"기적은 기록된 성경 말씀을 증거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다.
성경에 의하면. 기적은 \'성경의 기록\'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말씀\'을 증거한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믿게 하기 위하여(출 14:31; 왕상 18:39; 요 2:11; 7:31; 11:45 등). 말로 전하는 복음을 잘 믿지 않던 사람도 실제로 자기가 기적을 직접 체험하면 하나님을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기적은 강퍅한 자를 더욱 강퍅하게 하기도 한다(출 7:12, 13; 요 9:35-41).
오늘날의 기적을 반대하는 어떤 지도자는 예수님이나 사도시대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의 무리들도 그들이 행한 기적을 인정했을 정도로 진정한 것들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자신과 같은 지도자가 인정하지 않으므로 진정한 기적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글쎄, 그는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강퍅하고 못된 사람이 아닐까.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은 핍박은 하더라도 인정해 줄 것은 인정해 주었지만 그는 아예 그런 순진함이나 아량조차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을 모아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마 4:24-25; 행 3:9-10).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복음을 전하려고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베드로가 날 때부터 사십 년간 앉은뱅이인 사람을 일으키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여 남자만 오천 명을 회심시켰다(행 3-4장).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그러면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의 배교 때문에(시 74; 77:7-14).
율법주의(사 1:11-13; 29:10-13)와 미지근한 신앙 때문에(계 3:16-17).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마 13:58; 막 6:5-6).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 13:58).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막 6:5-6).
예수님은 불신앙의 사람들에게는 기적을 잘 행하지 않으신다. 기적은 어느 정도 행하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의 상호 교감에 의해 일어난다. 기적행하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불신앙의 사람들이 마음 문을 닫고 \"잘 해봐라. 나는 그런 것 믿지 않는다\"는 자세로 버티고 있으면 기적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기적에 대한 불신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아이처럼 순진하게 말씀대로 구하고 믿으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
그 외에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 이유로는,
고난의 구속사적 가치를 위해(고후 12:8-10; 벧후 1:6-7).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셔서 당장의 문제나 고통을 해결해주시는 것보다 자녀들이 고난과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더 원하시기 때문에 기적을 지연시키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주권. 요 5:1-15에서 왜 예수님은 단지 한 명의 앉은뱅이만 치유하셨을까?
이처럼 기적의 기능은 다양하며 하나님은 지금도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신다. 기적 종식론자들이 주장하듯, 기적이 끝난다는 교리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하나님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하지 않으셨는가?
위에서 성경을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이나 기능은 다양하며 그 목적이나 동기 또한 성경에 명시적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적 종식론자들은 이런 것들은 전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성경에도 없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신학 이론으로 성경의 분명한 기록을 외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치 자기들만이 성경의 수호자인 양 행세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번 포이트레스는 성경적 근거도 없이 기적의 기능을,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의 진정성(眞正性)을 증거하는 것으로만 국한시키는 조직 신학자들의 횡포를 책망한다.
기적 행하는 은사는 언제까지 지속되는가?
성경에는 은사가 지속되는 기간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다른 것과 연관하여 은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은사가 부족함이 없기를 기도한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재림)을 기다림이라\"(고전 1:7).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 계속된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각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8-10).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것이 성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봐야 하지 않는가? 온전한 것은 성경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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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는 모든 은사가 필요하다(고전 12:14-27).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20절). 그런데 기적종식론자들은 기적행하는 은사들은 이제 쓸데가 없다고 잘못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모든 은사는 어느 특정한 시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알 수 있다.
은사의 목적
필자는 여러 가지 기적 종식론을 연구해 본 결과 \"그 사람들이 차라리 그 시간에 하나님께 간구했다면 얼마나 많은 능력을 받았을 것이며 그 이후 교회사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쓸데 없는 변증에 시간을 소비하여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인간의 논리인 기적 종식론에 현혹되어 능력을 구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사의 기능은 무엇인가? 은사의 긍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이 계시는 증거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고전 12:7, 현대인의 성경).
교회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 1:11, 개역성경).
\". . .여러분을 굳세게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
\". . .여러분의 믿음을 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훈련시키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온전케하다로 번역된 온전케함을 말하는 카타르티모스는 완전하게 준비시킨다는 뜻이다. 온전하게하다(킹제임스번역, KJV), 준비시키다(신국제번역, NIV), 구비시키다 (신미국표준번역, NASV)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은사의 목적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준비시키고, 훈련시키고, 구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은사를 교회에 주시는 목적은, 전체의 유익을 위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하며, 성도들을 훈련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해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식 방법의 차이
기적에 대한 체험도 없고 또한 기적이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기적 체험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광신자들의 심리적 현상\"이라고 말하고, 기적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 \"나는 그 구절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서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이들의 성경해석 패러다임이나 기적에 대한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의 성경해석 패러다임이 변하지 않고 기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전제가 바뀌어지지 않는 한 어떤 경험적 증거도 이들에게는 효력을 지니지 못한다. 오히려 더 나쁜 쪽으로 전개되기 쉽다.
2차 대전 후에 몇 명의 서구학자가 동서양인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중국인들에게 삼단논법을 이용한 간단한 질문을 했다.
영국은 추운 지방이다.
면화는 추운 지방에서 자라지 않는다.
영국에서 면화가 자라는가?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아니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식 논리적 교육을 받지 않은 상당수의 중국인들은 \"아니오\"라는 대답 대신 \"영국에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19세기경에 한대지방에 사는 갑씨가 열대지방으로 여행을 갔다. 갑씨가 그곳 주민 을씨와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화제가 호수로 바꾸어졌다. 갑씨가 자기 나라에서는 겨울이 되면 물이 얼고 단단해져서 그 위로 사람이나 마차가 다닐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열대지방에 사는 을씨는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디있소? 해도 너무하지 않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는 실화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똑같은 질문에 대해 중국 사람들은 서양인들과 다른 대답을 할까? 왜 열대지방의 을씨는 한대지방 갑씨의 말을 믿지 못할까?
왜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가? 왜 어떤 사람은 귀신의 존재와의 전투를 강력히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역겨워 하고 거부 반응을 일으킬까?
대학생선교회(CCC)가 누가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하여 제작한 [예수]라는 영화를 제3세계에서 상영했을 때 영화를 본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대로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자를 치유하여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셨으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단순한 믿음으로 실제로 행한 결과 비슷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문명국의 신학교나 교회에서는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것보다는 왜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동일한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방법이나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관의 차이. 세상을 보는 눈을 세계관(World View)이라고 한다. 세계관이란 \'실상에 대해 형성된 기본적인 이해들 (예, 가정, 믿음 등)\'을 말하며 사람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들을 기준으로 그들의 생활을 조직하고 영위해 나간다.
쉽게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환경과 교육의 영향을 받은 대로 여러 현상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며 이에 따라 행동한다는 말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굳이 나의 세계관이 이렇다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자신이 사물을 보는 독특한 안목이 있다.
앞의 예에서 보듯 서구인들은 훈련 받은 대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중국인들은 경험적인 측면에서 한 대답이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하다. 한대 지방에 사는 사람에게 겨울에 물이 어느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열대 지방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고 마음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늘 액체인 물만 보아 왔고 그런 식으로 물에 대한 자기들의 견해나 문화가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씨의 이야기가 을씨에게는 비정상이 되어 버린다.
사람은 사고방식의 차이에 따라 동일한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주어진 사고방식 또는 사물을 해석하는 일정한 시각을 패러다임(Paradigm, 범례 또는 모범)이라고 한다.
패러다임은 교육이나 습관을 통해 사물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일련의 원칙들이나 믿음 또는 표준화된 연구 방법을 말한다. 동일한 사건이나 사물을 두고 견해가 다른 것은 패러다임의 차이 때문이다.
세계관이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이라면 패러다임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안과 관계되는 개념이다. 사람은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교육에 따라 일정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개인마다 시각의 차이가 있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으며 학자들이나 정치인들도 서로 시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학파나 정당이 조성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존의 이론이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일 때는 믿음과 감정의 요소마저 곁들여지기 때문에 더욱 예각적으로 대립한다.
성경해석의 여러 패러다임. 한때 성경해석에 있어 해석자가 주체이고 성경은 객체이며 목표는 주체(해석자)가 기술과 직감(feel)을 개발하여 객체(성경)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러한 방법은 물론 유익만 점이 많지만 성경의 해석자 자신이 바로 성경해석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다.
\"새로운 해석학\"은 바로 이러한 결함을 지적한다. 새로운 해석학은 이전의 해석학의 특징인 주체(해석자)와 객체(성경)의 완전한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의 신학적, 문화적, 언어적 및 윤리적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체계에 맞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쳇바퀴 도는 \"성경해석의 순환\"(hermeneutical circle)이 만들어진다.
해석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수평(선입견)을 본문의 그것과 구별해야 한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자라온 문화적, 종교적, 신학적 환경의 영향을 받은 색안경을 끼고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증학자 반 틸은 \"죄로 얼룩진 인간의 논리는 하나님의 논리에 비해 궁극적으로 비논리적일 수밖에 없다\"고 갈파했다.
죄로 얼룩진 인간에게 순수하고 \'객관적 사실\'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이 자기 위주로 \'해석된 사실\'이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무엇, 무엇은 이렇다\'고 말하는 자체가 이미 말하는 사람의 해석이 가미된 진술이라는 뜻이다.
구속사적 해석과 모범적 해석. 보수주의자들은 주로 구속사적으로(redemptive-
historical) 성경을 해석하고 은사주의자들은 주로 모범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구속사적 해석이란 성경의 모든 사건이나 기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및 부활을 지향한다는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 방법을 말한다. 성경의 모든 계시는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그리스도에 이르러 완전히 꽃을 피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지향하고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며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었으므로 기적은 끝났다고 주장한다.
둘째 사도들이 행한 기적은 그 당시 신약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계시가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 이상 기적은 필요 없고 메시지만 제대로 전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주로 이 두 가지 패러다임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기적이 계속된다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을 일언지하에 일축한다. 보수주의자들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기적은 예수님이나 사도시대에 일어난 이야기이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일어날 수가 없다.
한편 은사주의자들도 보수주의자들과 같이 성경의 무오성 및 기독교의 역사적 기본 신앙고백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들은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오늘날에도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행한 기적이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행한 그대로 오늘날의 신자들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우리의 모범, 모델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이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우리가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자들이 비성경적이라고 부정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조차 부정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참된 신앙인인가하고 의심조차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자기들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기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는데 은사주의자들이 지금도 계속된다고 하니 이들이 주장하는 기적은 모두 사단의 소행이 아니면 심리적인 현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두 패러다임의 장, 단점은 무엇인가? 먼저 구속론자들이 모범적 성경해석방법을 비판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모범적 성경해석은 구속사라는 넓은 문맥의 중심인 그리스도와 단절되어 성경의 통일성을 해친다.
둘째 문맥에 주의하지 않는다. 성경의 그때, 그 장소는 지금 이곳으로 바로 연결된다. 그래서 성경 해석이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기 보다는 인간중심이 되기 쉽다.
셋째 모범을 중시하다 보니 구속의 전진적 특징을 간과한다. 그 결과 각 시대마다 계속되는 계시의 연속성과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구별되는 특징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교의 깊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넷째 그 결과 성경 계시를 도덕화, 심리화, 풍유화 한다. 성경의 인물에 대한 서술이 오늘의 우리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도덕적 규범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기적을 문화적, 역사적 계시의 전진적 여과 과정이 없이 바로 오늘의 우리에 대한 규범이 되어 버린다.
다섯째 이 모든 결과 하나님 중심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성경해석이 되어 버릴 공산이 크다.
그러면 구속사적인 성경해석에는 어떤 단점이 있는가?
첫째 도식주의 (Schematicism)이다. 다양하고 풍부한 성경의 여러 기록을 몇 개의 도식으로 이해한다. 그 결과 성경의 다양하고 다각도적인 측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은 단지 어떤 역사의 기록이 아니다. 성경은 구속사는 물론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에는 구속사적인 기록과 해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 시편, 율법 및 복음서에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은 구속사적인 접근도 있어야 하지만 다른 것도 감안해야 한다.
성경의 내용은 우리들에게 어떤 역사적인 정보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 단지 구속사적인 정보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강화시켜야 한다.
둘째 사변(speculation)적이다. 계시의 점진성에 매혹된 나머지 \'침묵에 의한 논쟁\'(argument from silence)을 주저 없이 늘어놓는다. 쉽게 말하면 신학 논리가 성경의 기록을 앞선다.
은사주의자들이 성경보다 경험을 앞세우는 실수를 저지르는 만큼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의 논리를 성경보다 앞세우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기적 종식론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째 객관주의이다. 구속사적으로 발생한 것들을 정확하게 다루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오늘의 청중들과의 실존적인 관련성이 결여된다.
구속사의 객관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모든 사건이 \'비반복적,\' \'단회적,\' \'독특한\'이라는 주장을 심심치 않게 되풀이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행한 기적은 모두 \'비반복적이고 독특하므로\'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넷째 신학이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배타적이 되어서 자기들과 같은 의미의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무조건 배격하는 학자적인 편견이 심하다.
그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잘 이해도 하지 못하는 언약, 이미와 아직, 준 종말론적 등의 전문 술어를 즐겨 사용한다. 많은 경우 이러한 전문용어는 개념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는 무해한 것들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용어를 모르는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멸시하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일어나는 일부 이단이나 사이비 시비도 이런 관점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러면 상반되는 두 가지 패러다임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첫째 성경이 말하는 모범의 기능을 인정해야 한다. 모범주의는 반대하지만 구속사의 범주 안에 있는 모범에 대한 정당한 위치는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길을 갔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범도 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니라 심령과 골수를 쪼갠다. 성경 말씀에는 교회의 순수성, 오직 은혜, 오직 칭의도 있지만 개인의 신앙생활, 성령의 임하심, 성화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면도 있다.
구속사의 전진만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오심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도 구속사에 포함되어 있다.
셋째 구속사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는 것과 그리스도를 역사의 중심으로 보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고공에서 내려다보듯이 성경 전체의 파노라마는 펼쳐주지만 지상의 부요―실생활에의 적용―는 주지 못하니 궁극적으로 열매가 없기 마련이다.
넷째 모범적 해석론자들은 역사적 본문의 고유한 성격에 소홀하여 하나님의 원래의 행동을 무시했지만 구속론자들은 그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을 구속사적인 틀에 제한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의 저자가, 무슨 문제점들을 전달하려고 했으며, 무슨 문제에 답하려 했으며, 전하려고 한 특별한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 과업을 위해서 해석자는 성경을 모범적인 일대 일의 접근이 아니라, 문법적 역사적인 해석 방법을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풍유화, 도덕화, 영해, 성경인물 모범화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다섯째 성경의 구속사적인 주된 흐름에 치중하다 보면 본문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을 초래하기 쉽다. 그러므로 \"문맥의 넓은 전개는 본문으로 협소화시켜야만 하고 본문의 협소화 전개는 성취와 적용의 넓은 분야로 열려야 한다.\"
이러한 조화는 구속사의 비반복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기적의 지속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나 모범적 반복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오늘날의 모든 신자가 성경 속의 인물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안내가 될 것이다.
다각도적 성경해석. 기독교의 구속사관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한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동시에 비슷한 사건들이 외양과 정도를 달리하면서 계속 반복된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한 방향과 양태를 달리하는 반복이 보완되어야 성경의 줄거리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성경을 다각도 또는 다방면으로 해석하는 것을 \"다각도주의\"(MultiPersfectavalism) 또는 다각도적 성경해석이라고 한다. 필자는 다각도적 성경해석이야말로 오늘날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여러 가지 해석학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가장 실용성 있는 대안이라고 믿는다.
다각도적 성경해석은 성경해석의 여러 각도 또는 안목을 상호배타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본다. 대부분의 성경 교리에 대한 논쟁이 헬라적 논쟁의 영향을 받아서 \"이것이 아니면 저것\"(either A or B)의 흑백 논리에 치우친다. 그러나 다각도적 성경해석은 많은 경우 \"이것은 물론 저것도\"\'(A as well as B)의 입장을 취한다.
다각도적 성경해석 방법을 적용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설명해 보자.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큰 테두리 내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허락하셨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100% 하나님을 의지하고 100% 인간이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각도적 성경 해석이다.
이런 주장은 직선적인 논리에 젖어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러한 역설(paradox)이 주요한 교리의 뼈대가 되고 있다.
다각도적 성경해석은 어느 특정한 구절을 여러 가지 다른 방법―예를 들어 영적 해석, 도덕적 해석, 문법적 역사적 해석―으로 해석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구절을 여러 각도에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한 가지 해석, 다양한 적용\"을 말한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복음서가 아니라 4복음서를 주셨다. 한 예수님이 하신 사역이지만 4가지의 다양한 측면에서 기록한 것이다.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하나가 여러 면으로 빛을 반사하여 신비한 아름다움을 내는 것과 같다.
집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어느 한 면만이 아니라 앞에서(정면도), 옆에서(측면도), 위에서(단면도) 봐야 하듯, 성경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야 \"저자 원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성경해석은 단편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성경의 교리적인 부분(Didactic portions)과 역사적인 부분(Historical portions). 전통적인 보수신학에서는 기독교의 교리와 경험을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역사서(주로 이야기 체로 기록된 사도행전, 복음서 등)가 아니라 교훈서(특히 바울의 서신서)를 주요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리를 확립시키는 데 있어서 성경의 교훈적인 부분이 역사적인 부분에 비해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의 개혁, 보수신학자들도 그렇다고 말은 하지 않지만 이런 방식을 따른다. 그래서 사도행전이나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여 기적 계속론을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보수신학 일각에서는 이러한 접근방법은 \"성경 안의 성경\"(Canon within the Canon)을 인정하는 비성격적인 태도라고 비판한다. 차영배 교수는 \"성경은 역사적인 부분이나 교리적인 부분이나 똑같이 우리의 신학작업에 중요하다.
경중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성경이 다 일곱번 풀무에 연단된 금보다도 귀하며. . . .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오히려 계시의 역사에 착근하고 있을 정도로 구원의 역사는 중요하다\"면서 이런 견해를 반박한다.
잭 디어도 \"성경 안의 성경\"을 인정하는 듯한 주장을 몇 가지로 나누어 비판한다. 첫째 신학자들은 교리 정립을 위해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꾸준히 이용해왔다. 칼뱅 이래로 개혁신학자들은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요 6:44와 행 13:48을 인용했다.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은 선교와 전도학을 가르치기 위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이용하고 사도행전을 통해 교회의 정치제도를 결정한다(행 20:17이하). 모든 사람들이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사용하여 교리를 만든다.
둘째 고대 근동 지방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이야기\'를 통해서 이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은 그 자체가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신학서이다.
셋째 서신서를 역사서보다 우선시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서신서는 물론 모든 다른 성경이 교훈하기에 유익하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의 주된 교리도 역사서인 복음서에서 주로 형성된 것이 아닌가?
명제 신학, 관계 신학, 경험 신학. 신학교 다닐 때 교회사 시간에 어느 교수는 개혁 주의와 다른 전통을 비교하면서 늘 하는 말이 \"우리는 교리를 중시하지만 저들은 경험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교리와 경험이 과연 분리가 될 수 있을까? 세상 학문조차도 순수학문 몇 개 분야를 제외하고는 이론과 실제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오히려 이론이나 가정이 실제에 의해 수정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기독교의 교리는 선험적인 것이 많다. 사람들이 체험하든 하지 않든 예수는 구세주이시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이 세상의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성경에는 반드시 이와 같이 독단적(dogmatic)이고 선험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