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믿음을 내게 보이라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막 2 : 1 - 12

 

성경을 읽다보면 간혹 흥미로운 일이 생깁니다.

읽어 가는 중에 어느 부분의 글씨가 눈에 유독 크게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글씨가 갑자기 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부분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런 느낌을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5절 첫머리에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는 부분입니다.

중풍에 걸려서 사지가 온전치 못한 어떤 사람에게 참으로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중풍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동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병이라도 고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사건은...

먼저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이해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그들을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친구들은 병자인 친구를 들것에 메고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그곳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도무지 예수님이 계시는 방까지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집 주위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그런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야 이 친구의 병이 나을 수 있다.

예수님만이 이 친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하는 이 생각으로 이들의 마음은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이들의 마음을 이끌었으며

이들은 또한 예수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아마도 저들은 장애물을 돌파하기로 결심하고 처음에는

\"좀 비켜 주세요.\" 양해를 구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예수님이 계신 방의 방문 앞은 도무지 통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나없이 자기가 먼저 예수님께 보여져야 한다며 절대 양보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좀체 방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보이지 않자

친구들은 환자를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그리고는 지붕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붕은 우리의 지붕과 다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지붕은 낮고 평평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잣나무로 서까래를 걸치고 가벼운 천장을 만들어

태양의 열기를 피하는 그런 건축이었습니다.

 

이윽고 지붕을 다 뜯고 나자 친구들은 들것을 방안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천장 뜯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그곳에서 들것이 내려오고 그 속에는 꼼짝도 못하는 사람이 누워 있는 겁니다.

 

아마도 친구들은 지붕 위에서 예수님께 말했을 것입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때, 네 사람이 천장을 뜯어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어떤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가겠다고 하는 믿음, 그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병자가 병 고침을 받았고 그 믿음 때문에 죄 사함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우리들 앞에도 이러한 장애물들이 있는 줄 압니다.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들,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 주일성수를 방해하는 것들, 기도생활을 가로막는 것들...

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나 방법은 여러 가지 모양이 있습니다.

가정이나 사무실에서도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올바른 것은 교회의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방해를 받습니다.

예배생활을 방해하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선, 세상적인 많은 행사들이 주일에 이루어집니다.

농경사회에서는 특별히 주일날 어떤 행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무 때나 날을 정하면 다 모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휴일개념이 주일로 모두 흡수되어 버렸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 정해진 주일을 휴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입사시험이 다 주일에 있습니다. 자격시험을 주일에 실시합니다.

결혼식이나 각종 모임이 주일에 있습니다.

학생들의 단체활동도 주일을 이용해서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해야할 시간들이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 크리스천 기업으로 꼽히는 몇몇 기업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경영 이념은 \'주일은 쉽니다\'라는 문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기업임을 표방하면서 주일날 일을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를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크리스천 기업들은 \'주일은 쉽니다\' 하는 것을

그 어떤 경영 방침보다 중요시합니다.

 

E-랜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본사는 물론 모든 매장들이 황금알을 낳는 날이라는 주일에 어김없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E-랜드의 이름을 걸고 있으면서도 문을 닫지 않는 곳이 꼭 한 군데 있습니다.

바로 강원도 설악산 입구에 위치한 켄싱턴호텔입니다.

E-랜드는 \'아름답고 건강한 휴식을 제공한다\'는 비전을 갖고 지난 95년 호텔업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주일 성수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반 매장들은 주일에 문을 닫으면 그만이지만,

호텔은 토요일 밤 12시가 되었다고 해서 투숙객들에게 나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민 끝에 새로운 원칙을 정했습니다.

\'주일에는 들어와 있는 손님 외에는 원칙적으로 영업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호텔 내에서 원하는 손님들과 같이 아침에 예배를 드리도록 한다.

휴일은 교대로 다른 요일에 갖도록 하고, 덕스럽지 못한 일은 모두 폐쇄한다.\'

 

그런데 이 원칙들이 투숙객들의 다양한 요구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켄싱턴호텔이 크리스천 기업의 소유이긴 하지만 크리스천들만 투숙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호텔은 \'건강한 재충전\'을 내세웠지만 투숙객들은 뭔가 즐길 수 있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호텔 수익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빠찡꼬 나이트클럽 등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호텔 측은... 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자동적으로... 투숙객 유치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특히 판촉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일에 집중되는 결혼식과 각종 연회들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시작 후 2년은 장애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들은 투숙 대상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켄싱턴이 원하고, 켄싱턴의 컨셉에 어울리는 고객을 찾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켄싱턴호텔의 경영 이념을 존중하는 고객들을 중심으로 멤버십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허니문을 오는 신혼부부들을 유치했습니다.

주한 외국인들 역시 이들의 타깃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설악산을 찾는 이유는 진정한 재충전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서비스와 깨끗한 환경,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원했습니다.

실제로 지금 켄싱턴호텔은 주위의 다른 호텔들보다 외국인들의 투숙율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호텔 측은 얘기합니다.

\"주일 성수는 타협될 수 없기에 오히려 소중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판촉활동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능동적인 공격성을 지니게 됐습니다.\"

켄싱턴호텔의 주일성수 원칙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어김없이 예배를 드립니다.

끝까지 주일성수를 지켜감으로써

이 호텔은 설악의 보석, 하나님의 보석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내적인 갈등이 우리가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형제와 다툰 것 때문에 예배가 방해를 받습니다.

\"너 때문에 교회 가기 싫어\" 하면서 화풀이를 하나님께 합니다.

 

두 사람 싸운 일에 하나님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또 크게 낙심되었을 때도 예배가 방해받습니다.

마음이 심란해져도 예배를 거르게 됩니다.

이렇게 내적 문제가 생기면 예배는 뒷전이 되기 쉽습니다.

 

또 [아간]에게 있었던 것 같은 탐욕이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심이 도를 넘어서거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일 때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간의 욕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요나]에게 있었던 것 같은 미움도 장애물입니다.

자기나라, 자기민족을 압제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은 정당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워할 만 하니까 미워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마음이 미움으로 사나워지면 예배를 등한히 하게 됩니다.

미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도마]에게 있었던 것 같은 의심도 문제입니다.

눈으로 보고 나서야 믿겠다는 것은 지극히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 생각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에서 얼마동안 제외되고야 맙니다.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아닙니까.

남들은 다 기쁨과 감격 속에 있을 때

자기만 유독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데마]에게 있었던 세상 사랑도 장애물입니다.

데마는 바울을 돕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대한 집착이 컸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환영을 받을 때는 바울 곁에 있었지만,

바울이 쫓겨 다니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데마는 그 곳에 없었습니다.

바울을 버리고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바울 곁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다.\'(딤후4:10절)

세상을 사랑하면 언젠가는 믿음을 떠나게 되고 주님을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주저앉아야 합니까?

그랬다가 장애물이 사라지고 어려움이 없어지면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 순간도 살수가 없습니다.

고로, 우리는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중풍병자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부여잡고,

예수님과 함께 해야만 삶의 질고를 이기며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을 때 그들의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수많은 인파에 밀려서 도저히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들 앞에 놓여진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저앉았습니까?

아니요. 그들은 가로막힌 장애물을 극복하고 기어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5절)

어떠한 장애물이라도 극복하고 기어이 주님을 만나겠다는 믿음!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서 그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오늘 내가 너의 믿음을 보고 싶다.\"

이것이 주님의 심정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가운데서 누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서 가진바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까?

자기의 장애물을 뜯어내고 주님께로 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을 보이십시오.

\'지붕이라도 뜯어내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께로 가면 죄 사함의 은혜까지 더하여 받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번잡스런 일입니까? 내적인 갈등이 있습니까?

[아간]과 같은 욕심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막습니까?

버려야 할 것입니다. 뜯어내야 합니다.

 

또 아직도

[요나]처럼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미워할 만 하니까 미워하는 것\'이라고 자위한다면 이것도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도마]처럼 의심이 있다면 그 의심을 뜯어내십시오. 의심은 믿음의 적이요 원수입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의 최대 장애물은 [데마]에게 있었던 세상사랑일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 앞에 부끄럽습니다.

세상적인 생활이 여전히 좋게만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다 가지려합니다.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두 가지를 다 가지게 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뜯어내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마지막 때에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 아닙니까?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것도 다 주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그 소망의 믿음을 주님께 보이십시오.

주님을 만나는데 장애 되고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버리는 믿음을 보여

주님께서 여러분의 그 믿음을 보시고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