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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본 문 : 히브리서4:14-16
설교일 : 2008. 7. 6(주일예배)
설교자 : 권 다니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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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중에서 저자를 알 수 없는 성경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입니다. 이 히브리서는 저자를 알 수 없는 성경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이 히브리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일 때에는 사도와 같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기록하셨기에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정통교리에서 빗나가지 않았기에 정경으로 받아들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를 바울의 저작으로 본 때도 있었지만, 모든 문체나 사상이나 신학적인 관점을 비교해보면 바울의 저작은 아닙니다. 그러면 바울의 영향도 받았고, 구약에 능통하고, 제사제도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저작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로 유력하게 거론된 사람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다녔으며, 구브로에서 출생한 유대인으로 레위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라면 십자가의 구원을 제사제도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완성으로 이해하고 기술할 수 있는 유력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로부터 분명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 흠입니다.
아볼로를 저자로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아볼로는 헬라사상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으로 고린도교회에서는 아볼로파가 형성될 만큼 유력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아볼로도 유력한 후보이지만 초대교회로부터 아볼로의 저작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없습니다.
브리스길라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유명한 석학이신 하르낙은 저자의 이름이 삭제된 것을 밝히는데 초점을 두고 연구한 분입니다. 당시는 남성위주의 시대였는데, 일개 여성이 서신을 쓰고 있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정경으로 받아들일 것입니까? 그러나 너무나 분명한 신앙이고, 정통교리에 어긋나지 아니하는 문서이기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정경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브리스길라는 아볼로에게 부족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진리에 대하여 은밀하게 가르쳐줄 정도로 바른 진리로 무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막을 만들고 수선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 바울과 일찍부터 교류하고 있었고,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장막에 대한 말씀이 아주 많이 나오고, 여행을 많이 한 사람으로 신앙의 여행인 순례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도 흥미롭기는 하지만, 정확한 증거를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대한 문제는 누구도 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데,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서의 저자는 가르치는 자로서 교회의 제1세대 지도자인 사도는 아니고, 사도를 이어가는 속사도로서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서신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언급을 주고 있는데, 히2:3의 말씀입니다. 히2:3에서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 이 큰 구원의 복음은 주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것이요, 그것을 들은 자들이란 사도들을 가리키는 말이요, 우리에게 확증하였다고 하신 것은 사도를 이은 속사도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히브리서를 쓴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수신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를 알아야겠습니다. 본 서신은 “히브리인들에게”라는 표제가 있습니다. 어디에 살던지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 형태의 서한이라고 할 것입니다. 수신자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예수 믿는 성도가 된 유대인들에게 보내진 서한이라고 합니다. 로마 제국 내에 여러 지역에 흩어진 기독교인 유대인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은 어떤 배경 하에서, 어떤 이유로 쓰여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이 기록된 1세기 후반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진 박해와 고난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성도들은 집과 재산을 몰수당하였고, 어떤 이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산중으로 도망다니면서 많은 이방인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였습니다.
히10장과 11장에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받은 박해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로마 관리들에게 잡혀가면 우선 심한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을 당하고 옥에 갇히는 시련을 받았고, 돌에 맞아 심한 상처를 받거나 죽어야했습니다. 톱으로 켜서 죽이는 경우도 있었고, 칼로 죽임을 당하였고, 도망 다니는 사람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가난하였습니다. 수많은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평안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은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박해시절에는 사도들의 권면이나 위로나 격려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히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마침내 주님이 예비하신 나라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서 성도들의 입장에서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유대인으로 기독교인이 되고 보니 유대인 공동체에 추방되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다정한 친구요, 사랑하는 형제였으나,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그들의 공동체에서 스스로 떠나야 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고, 환난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관원들에게 알려지면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가 아니었고, 황제숭배를 거부한다고 하여 당장 끌려가서 고문을 받아야 하고 배교할 때까지 모진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수많은 박해를 견딜 수 있는 동력이 있었다고 하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죽을 고생을 하지만,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승리한다고 믿었는데, 주님의 재림은 예상 밖에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열정은 점점 더 식어만 가고, 습관적인 신앙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의 모임에도 열심을 내지 않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어떠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던 성도들이 견디다 못하여 배교하여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히브리서를 쓰게 된 동기는 죄의식에 따르는 확신의 상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정결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과거에 지은 죄를 해결하는데 문제는 없었는데, 예수 믿고 세례 받은 후에 다시 짓는 죄에 대하여 어떻게 되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 전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면 상관이 없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 일 년이면 수만 번의 죄를 짓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회개하면 된다고 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보지만, 용서받았는지 아직도 용서하지 않으시고 더 회개를 요구하시는지, 어떤 때는 참으로 캄캄한 때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고민도 없이 예수 믿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죄와 싸우는 고민, 죄를 회개하는 고민, 죄를 다시는 짓지 않으려는 노력이 평생 계속되고 있습니다.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의 장벽이 쌓이게 됩니다. 우리의 죄의식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깨뜨리고 우리 주님의 구속의 죽으심 마저 의심하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정말, 우리의 과거에 지은 죄, 현재의 죄, 앞으로의 죄까지도 다 사해주시는 것일까?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고민도 없이 그냥 잘 되고 복 받고, 만사형통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고민해야 됩니다. 생각 없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당직 제사장이 매일 같이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고 나옵니다. 아침이 되면 상번제를 지내는데, 양 한 마리를 잡아 제단에 드리면서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이 짐승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면 온 백성들은 자기의 죄가 용서받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물론 아주 습관적인 일이었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유대교는 대제사장이 있어 7월10일이 되면 백성의 대속죄일에 하나님의 거룩?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에서 온 백성들의 일 년동안 지은 죄은 모든 죄를 사하여 달라고 제사드리고 나오면 그날 금식하고 있던 성도들이 모든 죄에서 사함받았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런 제사가 우리 기독교에도 있다면 분명히 보여주고, 그런 의식을 통하여 죄에 대한 사함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데, 우리 기독교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행6:7에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했습니다. 행6:7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회에서 개종하고 돌아오는 허다한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유대교회로 복귀하려는 생각을 가지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유대교에서 돌아가서 그들의 대제사장이 드리는 대속죄일의 제사로 죄사함에 대한 양심의 자유를 얻으려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아주 중요한 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교회는 모형에 불과한데 유대교로 복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유대교는 하나의 그림자요, 모형을 보여준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이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신 분이신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교를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히1:1-2에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으로, 예언서로 역사서로 시문학으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들로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1. 우리 주님은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유대교회는 아론의 후손들로 제사장이 있고, 그 중에 제사장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유대교회의 수장으로, 가장 권위가 있는 지도자입니다.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요, 상징적인 인물인지, 도피성에 들어가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곳 도피성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대제사장이 죽으면 사면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단 한 번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리면 온 백성들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도 죄를 짓는 한 사람이기에 백성을 대표하여 제사를 드리되, 먼저 자신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구약의 제사제도는 온전한 것이 오는 것을 예표로,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이지,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제도가 완전하였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완전한 구원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불완전한 제사장이었습니다.
히10:1 말씀에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였습니다. 참 형상이 아니었습니다. 해마다 드려야 하고, 달마다 드려야 하고, 날마다 드려야 하는 구약 제사는 우리를 온전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신 하나님이 세우신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로서 내려오셨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셨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하늘 성소로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인간으로, 그리고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이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히10:23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탁월성, 우리 주님의 초월성,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으로, 우리는 어떤 박해에도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문제, 죄와 죄의식의 문제, 인간의 한계성, 인간의 연약함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굳게 잡아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최후에 최선의 방법으로 최고의 진리로 허락하신 방책은 당신의 아들, 죄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어 죄를 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 그 처절한 모습을 보면서 인류의 죄를 다 심판하시고 벌하신 것입니다.
유대교의 제사장들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고 먼저 제사를 드리고, 다시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지만,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직접 나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엡3:12에 보면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2.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주셨습니다.
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의 유혹에 잘 넘어갑니다. 그리고 마음은 원이 있지만 육신이 약하여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강한 것 같으면서 참으로 연약합니다. 죄 앞에서 자신 있다고 큰소리칠 사람이 없습니다. 들키지 않은 것뿐이지 죄인들입니다. 서로 점잖은 체면에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 속으로부터 겉까지 다 죄인입니다.
죄의 문제는 자신 있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윗을 예로 든다면 우리의 잘못과 죄악을 회피하고 그 책임을 모면하려는 것 같지만, 천사와 같이 믿다가도 타락할 때는 악마로 변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어도 얼마나 흔들렸고, 나약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거하지 못하고 흉년이 왔다고 애굽으로 내려갔고, 거짓말로 일관하고, 아내의 몸종을 통하여 자식을 낳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다 아시고, 그 모든 연약함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십니다. 히2:18에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받고 있는 모든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물질의 시험, 명예의 시험의 권세의 시험도 이기셨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고,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있습니다.
3. 우리 주님은 은혜의 보좌이십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저는 다른 사람의 도움 받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저에게 있어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에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갈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은혜의 보좌는 우리 주님이 앉아계시는 하나님의 우편입니다. 그 자리는 왕의 보좌입니다. 은혜의 보좌는 시은소이며, 속죄소입니다. 은혜의 근원이 되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때때로 도우시는 중에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에 보좌에 나아가는 것은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민수기6:22-27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서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상급 사상, 공로사상이 율법주의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감격이지, 자격이 있다거나 자신이 있다고 하면 그 순간 은혜는 사라지고 공로사상, 상급주의만 남게 됩니다. 공로사상이나 상급사상은 성경에서 멀리 버려야 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을 봉사하시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도 모두다 은혜입니다. 봉사한 것 잊어버리세요. 무엇을 드리신 것도 잊어야 합니다. 은혜 안에 거하면 죄의 문제도, 회개의 문제도 사죄의 문제도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연약하여 죄를 지은 것도, 그것이 주님 앞에 엄청난 잘못이라는 죄를 깨닫는 것도, 우리의 추한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기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대언의 기도를 드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 들어가야 해결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을 모셔야 해결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몸을 한번 드림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드리신 제사는 “한영원한 제사”입니다. 그 말은 한번 드림으로 영원한 속죄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히10:12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가 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만왕의 왕으로, 하나님 앞에 대언의 기도를 드리시면서 중보자가 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지켜주십니다.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평강도 주십니다. 때를 따라 도와주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주님만을 바라보시면서 은혜의 주님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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