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본 문 : 로마서6:1-11 설교일 : 2008. 6. 15(주일예배) 설교자 : 권 다니엘 목사 ------------------------------------- 성지순례 때에 이집트의 룩소르에 갔었는데, 룩소르에는 ‘왕가의 계곡’(와디 알무르크)이라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카르나크신전과 룩소르신전이 있고, 나일강 서편, 깊은 광야의 골짜기에는 왕족의 암굴 묘들이 있는데, 약60여개의 암굴묘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전은 동편에 건축하고, 묘소-장지는 해지는 편 서쪽에 두었습니다. 나일강 동편은 신들이 사는 세계이고, 서편은 인간이 사후세계에서 사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일강 서쪽에는 왕들의 암굴 묘와 장례와 제사를 지내는 장제전들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주전1400년 전에 일어난 18왕조에서 20왕조까지의 왕들은 사후 세계를 위하여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계곡을 깊이 파고 들어가다가 왕이 죽으면 그 자리를 정리하여 시신을 안장하였습니다. 왕이 생전에 사용하던 금은보화와 진귀한 물건, 그리고 섬기던 종들까지도 함께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고 무덤이라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나오는 통로를 묻어버렸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왕가의 계곡의 어떤 무덤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여 예배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왕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하여 벽면에는 상형문자로 가득하게 새겨놓았는데, 한쪽에 주후 3-4세기의 성도들이 피신하여 들어가 예배하면서 헬라어와 콥틱어로 성경구절을 새겨놓은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에 들어간 기독교도인 콥틱교회의 성도들이 환난을 피하며 왕가의 무덤에 들어가서 정기적인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누구나 들어가기 싫어하는 무덤에 들어가 예배를 드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독교회는 목숨을 찾는 박해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초대교회 교인들이 생각한 것이 어떤 사람도 들어가지 않는 지하묘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하 묘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지켜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찾기 싫어하는 공동묘지에 가서도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켜가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 최고의 전도자요, 목회자요, 신학자는 사도바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배교를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려고 가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12제자들을 보면 어부가 변하여 제자가 되고, 세리가 변하여 사도가 되었지만, 정말 극적인 변화는 사도바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다가 예수를 믿어야 산다고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두 가지 놀라운 진리를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분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된 것입니까? 우리는 수준에 의하여 구원받은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6:1-2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했습니다. 오늘 죄를 무서워하고, 죄는 절대로 짓지 않겠다고 투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고, 정말 죄를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것은, 자포 자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래도 죄인이고, 저래도 죄인이고,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역시 죄인이라는 것 때문에,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고, 타협의 명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구원의 감격이 오히려 죄에 대하여 저항력을 떨어뜨리고, 죄에 대하여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후에도 죄라는 문제를 놓고,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회개하면 되지, 이래도 죄인이고, 저래도 죄인이 아니냐고 합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므로,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사변적이고, 논리적이고, 화석화되어버린 교리에 익숙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교인이 되었으면서도 도덕적으로 매우 무감각하고, 부도덕이 판치는 사회가 되었고, 윤리의식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빛을 잃었고, 소금이 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지, 잘 믿고 잘 살아서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일평생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헌신적으로 섬겼다 하여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고, 은혜 받으려고 하여 죄를 더 지을 것입니까? 사도바울은 그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어찌하여 죄 가운데 더 살 것입니까? 수준이 있어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수준에 미달하는 성도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 대장부와 같은 신앙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죄와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고, 말씀대로 산다고 다짐하고 결심하였어도 죄악 세상에 또 다시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왜 이렇게 결심이 약한 것입니까? 우리는 죄와 타협하는데 명수입니다. 죄는 우리의 체면을 잘 살려줍니다. 적당한 명분도 주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고 있습니다. 죄를 떨쳐버려야 하는데, 그 죄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오랫동안 믿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으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정말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언제나 과제입니다. 누구를 미워할 것도 없고, 시기하고 질투할 것도 없고, 모두 다 사랑할 사람이요, 다 함께 기뻐할 사람들이요, 내가 섬겨야 할 사람이라면 좋겠습니다.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족하고, 지금 소유한 것으로 만족하고,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은혜요, 감격입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도 없고,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다 내어주고, 다 바쳐도 감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새벽기도할 때에 생각하고 기도한 대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 것都歐? 도대체 나 중심에서 벗어나고, 나를 내려놓고 온전히 내려놓고, 주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날은 언제입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사시는 우리 주님이 하시면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연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4절 말씀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와 합하여”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우리는 예수와 합하여”,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합하여”라는 말은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5절 말씀에서도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했습니다. 5절에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몸을 성전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는데,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영주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연합하시고, 합하여 하나되었는데, 우리 안에 평안하게 거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연합”이라는 말은 “함께 심겨졌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한 자리에 떠날 수 없는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우리 주님과 함께 심겨진 자리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는 우리 주님이 함께 있는 자리요, 내가 가는 곳은 우리 주님이 함께 가시는 곳입니다. 연합이란 함께, 합하여, 하나 되었다는 말이요, 같은 자리요, 같은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님이 죽은 자리에서 함께 죽었고, 이제는 죄에서 벗어나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의롭다 함을 받은 그것으로 그친다고 하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주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요, 이것은 주님과 함께 죽어 장사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죽은 사람이요, 함께 장사된 사람이요,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가장 큰 주제가 되고, 기독교를 지탱해주는 두 기둥이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얻었고,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례란 무슨 진리가 있습니까? 세례를 정의해보아야 합니다. 세례는 일생에 단 한번 받는데, 우리는 뒤 따라 세례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함께 동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세례는 정말 중요합니다. 절대로 세례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 칼빈 선생님은 세례를 설명하면서 “세례는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신 거룩한 인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으로써 새로운 출발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 칼빈의 세례에 대한 정의는 아주 고전적입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세례 받으신 성도들은 거룩하게 인침을 받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었고,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죽을 뻔하였는데, 지금 살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감격, 병원에서 죽을 것 같았는데, 퇴원하여 다시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어떤 성도는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에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그 후에 집에 돌아가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교회에 오시고 싶었으면 먼저 교회로 나오셨습니다. 다시 살아난 감격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욕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면 아직도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바랄 것도 없고, 욕망도 없고, 미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싶은 마음에서 더 살기를 원하지 나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더 살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다가 욕을 먹으면 영광이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갈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탐심도 못박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죄를 끌어들이고, 죄와 타협하고,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 살겠다는 과도한 욕심 때문입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했습니다. 죽은 척하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죽었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그 은혜에 감사하여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였고, 주님의 부활에 연합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1절)여기서 “여길지어다”라는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긴다는 말은 “로기제스데”라고 하는데 “로기조마이”라는 말은 간주한다. 결론짓다,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의 교인들은 네로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카타콤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은 미신을 섬긴다느니, 사교라느니 하면서 오해도 살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암호가 있었는데, 그것이 물고기 상징입니다.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땅 바닥에 낙서하는 것처럼 물고기 형상을 그리는데, 알아보는 사람은 교인이고, 전혀 몰라보는 사람은 불신자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고기 형상의 그림이 카타콤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물고기라는 말이 헬라어로 ‘익투스’라고 합니다. 물고기 즉 익투스(ΙΧΘΥΣ)는 정말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글자를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리아스라는 단어의 첫 글자를 연결시키면 물고기라는 ‘익투스’가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이렇습니다. Ιησoυs(예수스, 예수) Χχριστοs(크리스토스, 그리스도) Θεοs(데오스, 하나님) Υιοs(휘오스, 아들) Σωτηριαs(소테리아스, 구세주) 첫 글자만 연결하면 익투스(ΙΧΘΥΣ. 물고기)가 됩니다. 이런 익투스라는 말이 로마의 카타콤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카타콤은 로마의 외곽지대에 거미줄 같이 연결된 지하 묘소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에 석회암 지대를 깊이 파고 들어가서 지하 통로를 만들고, 양 옆으로 관이 들어갈 수 있게 파내고, 시신을 넣어두었습니다. 지하 통로가 몇 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수십 리 길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음산한 묘지가 기독교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누구도 들어가려고 아니하는 지하 묘소에서도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장로회신학대학은 1901년 평양에서 개교하여 1907년에 7명의 목사를 배출하였고, 남과 북으로 나뉘면서 서울 남산의 신궁터에서 재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에 광장동에 있는 광나루가 내려다보이는 아차산에 기슭에 이전하였습니다. 이전할 때에는 겨우 학교 본 건물 하나만 세우고 옮겼습니다. 서울 시내에서 천호동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힘들게 다녀야 했습니다. 60년대에 다니던 학생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산을 깎아내어 운동장을 만들고, 길을 내고, 나무를 심어야 했습니다. 전학생들이 노력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운동장에서는 수많은 유골들이 나왔습니다. 학교 앞에는 신비한 약수가 흘렀는데, 사형장의 약수는 약효가 많다고 하여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약수를 받아갔다고 합니다. 주변의 어딘가에 사형장이 있었고, 학교 운동장 주변에 큰 구덩이 파고 수없는 시신을 묻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음산한 바람, 더욱 사형이라는 처절함, 그런 무서운 바람은 맞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사형장이요, 처절한 무덤이 변하여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종들을 양성하는 선지동산이 되었습니다. 우리 장로회신학대학은 1907년에 1회 졸업생을 내면서 작년에 100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무려 3만 명에 가까운 목회자를 배출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결정짓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합하여,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죄 짓는 나는 죽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라고 결단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있어 중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생을 이기심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속적인 관심 속에 살지 말고, 거룩한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사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죽는 이유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사는 이유가 되시고, 우리의 죽는 이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