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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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자


본  문  :  로마서8:6-11


설교일  :  (주일낮예배)


설교자  :  권 다니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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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에 가지려는 ‘거룩한 걷기 묵상’을 준비하면서 양평에 있는 모새골에 다녀왔습니다.   모새골은 영락교회와 주님의 교회를 시무하셨던 임영수목사님이 운영하시는 영성수련원입니다.  모새골이라는 말이 특이합니다.  계시록21:5의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말씀을 가지고 “모두 다 새로워지는 골짜기”란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좀 시간을 내어서 모새골에 입소하여 피정의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우선 거룩한 걷기 (래버린스) 묵상을 준비하러 갔기 때문에 우선 묵상동산을 둘러보았습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영성수련을 위하여 수도원을 두거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공동체로 유명한 곳은 프랑스 동쪽 리옹 근처의 마콘이라는 시골 마을에 있는 떼제라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이곳은 수도원이라고 하지만, 떼제공동체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천주교회가 중심이지만, 개신교, 정교회도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곳은 절대로 외부의 기부금을 받지 않고, 가족의 유산도 받지 않고, 자급자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내 것이 없고, 내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사용할 뿐입니다.


우리 개신교회들이 기도원이나 수련원을 가지고 있으나, 영성훈련과 공동체 생활을 위한 모임은 사실 전무합니다. 모새골에는 한 주간에 20여명이 입소하여 공동생활하고 있지만, 각자의 방에서 기도하고, 도서관에서 독서할 뿐이지 떼제공동체와 같은 생활은 하지 않습니다.  새벽, 점심, 저녁 세 차례 모여서 함께 묵상하고 간단한 세미나를 열고 나머지 시간에는 개인적으로 보내면서 야외에 만들어진 ‘묵상동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골짜기 아래쪽 텃밭에는 자급할 수 있도록 30여 종의 야채를 키운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데 변화 하는 속도가 너무나 빠릅니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전통적인 가치관도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정신적인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에 노예가 되었고, 오직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자아를 상실하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일중독 현상이 만연되었고, 병적이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새골에 입소하는 사람들처럼 한 주간을 떼어내어 자신을 돌아보지 않아도,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우리의 영성을 새롭게 하여야겠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령한 영에 들렸다는 말입니다.     옛날 귀신이 들린 사람들을 보고서 “신 지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 표현이 너무 저속하고 남을 비하하는 말이지만, 사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것이나, 지금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성령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삶은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거듭남은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3:5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우리 주님이 보내어주신 하나님의 영으로,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며, 우리 죽은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누구나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있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존스토트 박사는 성령세례와 충만이란 책에서 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그 후에 성령을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아들의 영 곧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바울사도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두 가지 다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갈4:6을 인용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를 먼저 자녀로 삼으시고, 후에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주시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롬8:14을 다시 인용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곳은 먼저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삼아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정확한 순서는 잘 모릅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 일이란 영적인 일이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성령을 보내주시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는지, 동시적인 사건인지, 결과는 다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이란 사람이 감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동시적인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영, 성령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는데, 성령을 소유하였다거나 성령을 소유하였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고전12:3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롬8:16 말씀처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을 주님을 모시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든든하며,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홀로 두시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아들을 대신하시는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용하셔서 주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국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생명이요, 평안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성이 있습니다.   영성이 뜨겁고 예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성이 이성에 눌려서 크게 활동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영성이 다 있습니다.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위르겐 몰트만이란 학자는 소망의 신학을 주창한 사람인데, 현대 신학자로 독일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영성이란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삶과 하나님의 영과의 살아 있는 교제다”라고 했습니다.   영성이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가며, 성령과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원을 창설하신 대천덕 신부는 영국성공회 소속 신부로 신부라고 하지만, 개신교회 목사입니다.   성공회에서는 목회자를 신부라고 부르기에 천주교회의 신부는 아닙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셨지만, 남아계신 사모님이 지금도 예수원을 운영하시고 있습니다.  대천덕 신부가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라는 책을 쓰고, 다음에“산골짜기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책을 두 권 쓰셨는데, 두 번째 책은 성령론에 대한 책입니다.   그가 첫 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들과 성령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성령과의 관계를 말하면서 우리와 성령과의 관계는 첫째로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경우라고 말합니다.  


대천덕 신부는 성령의 사역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이시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역사하는 성령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으면 성령님의 사역을 놓고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오해가 모두다 일시에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경우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구원사역에 있어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충분하신 성령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경우는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 성화의 길을 가게 하시는 성령님, 충전해야 하고 충만하신 성령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 인격적으로 충분하고 온전하신 성령님으로 구원받았고, 우리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성령 안에 있어야 하며,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하고, 성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소진되었을 때에 충전해야 하듯이 성령의 충만, 재 충만, 계속 충만을 사모하고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면서도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일에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을 부르고, 나의 삶에 개입하여 달라고 의탁하면 우리의 생각한 것보다 더 훌륭하고 멋지게 인생을 설계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의 11절 말씀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런 능력의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도 살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서 마침내 우리의 죽을 몸도 부활에 동참하는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게 속하여 육신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에게는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지만, 여러분이 의를 선택할 수도 있고, 불의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선택하면 성령님은 말할 수 없이 슬퍼하십니다.  때로는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선택하고, 성령님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고 내어 맡기면 우리 안에 생명과 평안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6절에서도 육신의 생각, 7절에서도 육신의 생각, 8절에서 육신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마침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을 법을 따르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 육신에 속한 생각, 그것의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우리의 육신이란 요구사항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무리 잘 먹여주고 입혀주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육신이 흙에서 왔기 때문에 많이 먹이고 땅에 눕혀놓으면 참 평안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마침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겨우 죽기 위하여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에 속한 생각, 성령님이 원하시는 생각,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육신의 생각을 하고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고, 마침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에 지배를 받고 싶습니까?  육신의 지배를 받고 싶습니까?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육신은 이 땅에서 죽는 날이 오지만, 우리의 영은 주님이 대속의 피를 흘리심으로 주님의 의를 힘입어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므로 우리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요,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무엇으로 나타날 것입니까?     성령과 교류하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면 우리는 믿음의 영성을 가지게 됩니다.    믿음은 우리 기독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담대한 믿음, 확신에 넘치는 믿음,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령 충만은 곧 확신에 넘치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성령 충만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다시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성령과 교류하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면 우리는 사랑의 영성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1997년 세상을 떠난 인도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는 지난 세기의 인류의 어머니로 존경받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마더 테레사라고 부릅니다.  그는 천주교회만이 아니라, 전 세계 개신교회, 그리고 모든 이교도들로 그를 존경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굶주린 자가 있는 것은 우리가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는 테레사의 말은 지금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주고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의 집은 세계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테레사의 영성의 핵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해서 인도는 테레사를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것은 20세기의 기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힌두교의 나라에서 가톨릭 수녀 한 사람, 자기네 나라 사람도 아닌데 국장으로 장례를 모신다는 말입니까?  테레사는 인도의 국장으로 장례를 모실 것이 아니라, 인류의 이름으로 장례를 모셔야 했습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큰 이적을 베푼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아프리카 성자 슈바이처의 영성의 핵심도 사랑에 있었습니다. 그는 신학적으로 위험한 발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독일 교회는 그에게 목사의 직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빈집은 위험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전에서 석유를 끌어올리는 사람들은 석유를 끌어 올린만큼 물을 집어넣어 채워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석유를 끌어올리다 땅이 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석유도 끌어올릴 수 없게 됩니다. 


영성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곧 소명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유일한 것입니다.  유일하다는 말은 나만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나만의 소명의 길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66억명이란 사람들이 있지만, 지문이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작은 손가락에 그려진 지문이 다르다는 말은 나만이 살아가야 하는 창조적인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성령을 주시면서 성령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자리에서 충성하는데, 영혼 구원이 가장 큰 목적이 됩니다.   그리고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는지 모른다고 하면 성령님의 인도함을 더욱 사모하여야 합니다.     소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악한 사탄을 몰아내고 성령을 모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장을 만들어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쫓겨나갔던 악한 사탄이 다시 들어와 더 크게 역사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빈집은 위험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주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을 예민하게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에 속하였다고 하지만, 육신의 생각만 좇아가지 말고, 육신의 사람으로 생을 마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