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하신후 말씀 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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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제  목  :  침묵하신 후 말씀하신 예수님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본  문  :  마가복음14:57-65


설교일  :  (주일낮예배)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설교자  :  권 다니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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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지난 주간은

평양노회 노회원 수련회로 일본 규슈 지방을 다녀왔습니다.  수련회 수요예배 시간에 “일본 기독교의 역사와 전망”이라는 특강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본 선

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면서 기독교가 일본에 전래된 과정에 대하여 많은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style=\"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기독교가 일

본에 전래된 것은 우리나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됩니다.  1549년 8월 15일 스페인의 예수회 소속 신부인 프란치스코 사비에르(Francisco

de Xavier)가 사제 토레스와 수사 페르난데스와 함께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사비에르는 로욜라와 더불어 예수회를 창설한 멤

버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1517년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개혁교회가 분리될 때에 익나티우스 로욜라와 프란치스코 사비에르는 4명의 동료와 함께 6명이 모여 “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목표를 가지고 “제수잇 성직수도회”를 파리에서 창설하였습니다.     예수회는 그 후에 점점 더 성장하여 현재는

전 세계 100여개 나라에 진출하였고, 220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고, 226개교의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을 설립하여 운영되고 있습니다.  예수회는 우리 한국에도 들어왔는

데, 서강대학교를 설립하였고, 광주의 대건신학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사비에르는 투철한 선교의식을 가지고 일본 선교에 임하였

는데, 그가 머문 2년 동안 1500명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그 당시의 일본은 전국시대로 매우 혼란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50년 동안 무려 45만 명의 신도를 가지게 되었습니

다.  당시의 최고 실력자, 천하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은 기독교에 대하여 보호정책을 펴면서 서양에서 입국한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

다.  풍신수길이 선교사들을 배척하지 않은 것은 서양의 선교사들을 통하여 과학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세계열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기독교가 가장 활발한 큐슈지방을 방문하였는데 선교회에게 헌납된 나가사키 항구를 둘러보았는데, 항구가 요새화 되어 있었고, 성벽과 참호가 구축

되어 있었고, 대포를 가지고 있고, 군함이 입항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풍신수길은 기독교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기독교를 신봉하지 말라는 금교령을 내리고, 선교사 6명을 포함하여 26명을 처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style=\"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일본은 토요

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제1대 쇼군에 오르는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에도 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라고 부르는데

, 에도란 현재의 바다를 메우고 만든 도시 에도(현재의 도쿄)를 영지로 삼았기에 에도시대라고 불렀습니다. 에도시대에 들어오면서 일본의 기독교회는 계속 전도하여 75만명의 신

자를 확보할 만큼 발전하였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과 네덜란드의 선교사들이 계속하여 들어오면서 일본은 서양의 각축장이 되어갔습니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생각

할 때에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를 그대로 내버려둘 때는 마침내 기독교가 일본을 삼켜버릴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서양에 팔아먹는 ‘음모단’

이라고 하여 전국적으로 박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632년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20세의 나이로 3대 쇼군이 되면서 제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한 기독교 금

지령을 더욱 엄격히 실행하여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시켰습니다.  1639년에는 쇄국령을 선포하여 포르투갈 인들이 일본에 오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와 관계가 없는

네덜란드와 중국인들에게만 나가사키에 들어와 무역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기독교인들을 색출하

여 수없이 죽은 인물이었습니다.   1632년 그가 장군에 취임하자마자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예수상과 성모상이 그려진 성화를 밟고 지나가면 기독교를 배교한 것

으로 인정하고 살려주었고, 성화를 밟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화형시키고, 입을 벌리고 물을 부어 죽이거나 목을 베어 죽였고, 거꾸로 매달아 죽이고, 98도의 끓는 온천물에 집어넣

거나, 기독교인들을 배에 태워 바다에 내어다 버리는 등 갖은 방법으로 괴롭히다가 죽였습니다.    그것도 빨리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진 고통을 받아야 하고

, 죽을 때까지 배교를 강요당하였습니다.


1637년에는 히젠아리마 촌의 백성들이 지방 권력자들의 착취에 견딜 수 없어서 먹고 살 수 없

는 경제적인 이유로 농민 봉기를 일으켰는데, 3만5천 명의 사람들이 13만 명의 정부군과 맞서 4개월 동안 항전한 사건이었습니다.  막부군에 의하여 3만5천명의  농

민들은 전멸하였습니다. 이때의 농민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으로 일본 전역에서 박해가 일어났는데 30만 명의 순교자를 내고 기독교회는 가꾸레 기리스단(감

추어진 기독교인)이라고 하여 드러내놓고 믿지 못하고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가꾸레 기리스단은 불상 옆에 마리아상을 놓거나 앞에

는 불상을 내어놓고 뒤에 십자가를 감추어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을 유지하였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수교되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1865년에 나

가사키에 성당이 재건되었는데, 성당이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는 날에 자기들은 본래부터 기독교인이었다고 몰려든 이들이 2만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탕\'; TEXT-ALIGN: justify\">30만명의 기독교인들이 무참하게 죽어 순교한 교회가 일본교회입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 엔도 슈사쿠는 “침묵”이

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책은 일본의 에도 시대에 일어난 박해에서 20년간 선교사로 일본교회의 최고 책임자인 주교로 활동하다가 잡혀 모진 박해 끝에 순교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고 배교한 페레이아 신부가 나옵니다.    로마교황청을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 교회들은 일본에서 페레이아 신부가 배교하였다는 소식에 놀

랐습니다.  정말 위대한 신앙인었는데, 설마 그럴 리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좌절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신앙과 사상 면에서 굴욕

적인 패배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배교한 페레이아 신부가 본국의 수도원에서 신학을 가르친 포르투갈의 세 명의 젊은 사제들이

일본에 들어가려고 배를 탔습니다.     말라리아에 걸린 호안테 신부를 제외하고 로돌리코와 가르페 신부가 기치지로라는 일본인의 안내를 받아 일본

에 잠입하는데 성공합니다.    로돌리코는 비밀리에 성도들을 만나고 감시를 피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는 마을로 내려와 전도하였습니다

.  그러나 일본군에게 잡혀 배교한 가치지로의 밀고로 로돌리코 신부는 붙잡히게 되었고, 전에 페레이아 주교를 배교시킨 일본의 권력자 이노우에는 신부를 고문하지도 않

고 처형하지 않으면서 잘 대접하였습니다.  그의 앞에서 수많은 신자들을 잡아와 고문하다가 죽이면서 로돌리코에게 배교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노우에는

말합니다.    “더 이상 일본에는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릴 자리가 없으며, 그런 가운데 기독교를 포교하는 것은 ‘추녀의 지나친 애정의 강요’이며,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석녀’라”고 비난하면서 배교를 강요합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그의 보는 앞에서 죽어 가는데, 그 어떤 응답도 없으신 하나님의 침묵 앞에 많

은 고뇌와 혼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면 저렇게 포악무도한 박해자들을 나무라거나, 하늘에서 불을 보내어 죽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아

무 말씀도, 어떤 행동도,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일어납니다.  신부로 임직을 받았으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었습니

다.  세 명의 신자들과 친구인 가르페 신부가 바다 속에 던짐으로 순교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았습니다. 



style=\"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로돌리코는

자기 때문에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 죽지도 못하고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는 사람들을 보아야 했습니다.   일본군은 로돌리코 한 사람을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관리는 계속하여 말합니다.  “너는 그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다고 하는데, 사실은 너 때문에 저 사람들이 죽어간단 말이다.

”라고 수없이 배교를 강요합니다. 


배교란 무엇입니까?   성화를 한번 밟기만 하면 지금 죽어가는 수많은 성도들을

살려준다고 하는데, 그들 중에는 이미 배교한 이들도 있지만, 신부가 배교하지 않아 죽어간다고 하는데,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가는 성도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젊은 신

부는 참으로 무서운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젊은 신부 로들리코는 말할 수 없는 번민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수없이 갈등하였습니다.   선배 신부요, 자기를 가르친 배교자 페레이라 신부가 찾아와서

일본은 선교할 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일본이 가장 원하는 천문학과 의학책을 번역하면서 일본을 위해 진정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탕\'; TEXT-ALIGN: justify\">통역하는 관리가 말합니다.   “형식으로만 밟으면 되는 거요”  신부는 발을 들었습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만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

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습니다.  동판에 새겨진 주님은 신부에게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밞아도 좋다. 밟

아도 좋다.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고 하신 말씀에 가슴이 메어집니다. 


이것이 주님의 음성입니까?  아니면

사탄의 속삭임입니까?  젊은 신부가 그의 배교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말하는 구실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습니

다.    그리고 멀리 닭이 울었습니다. 


순교의 자리에 서게 되면 별의별 생각이 들 것입니다.  성자로

추앙받기 위한 순교가 진정 순교일 것입니까?   교회와 교단의 자랑이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 진정한 순교는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죽는 길

은 어떤 길입니까?  일본을 다녀오면서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는

신앙이 있습니까?  오직 주님만이 저의 생명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나는 천국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저의 사는 이유가 되시고,

주님 때문에 나를 죽이는 사람들 앞에서 욕하지 않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며 죽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별 것도 아닌 말 한마디로 미워하지 말고, 별 것도 아닌 돈 몇

푼 때문에 자존심 상한다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고, 주님만을 사랑하기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있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누가 알아준다고 잘 믿는 척

하고, 보는 사람이 없다고 불신자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알고 우리 주님이 보고 계시는데,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style=\"FONT-SIZE: 12pt; MARGIN: 2px 0px; COLOR: #000000; TEXT-INDENT: 26px;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사실은 나도 그 자리에서 죽은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죽어야 하고, 나는 살아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주

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새롭게 살아났는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가

치관이 무엇이 좋다고 여전히 고집할 것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심문하는 자 앞에서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53:7-8에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

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

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인류를 구원하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그 분이신데, 심문하는 제사장이란 자

가 “너는 왜 아무 대답도 없느냐?”   우리 주님은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 하셨습니다. 사실 대답할 가치가 있어야 대답할 것인데,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누구 앞에서 무엇을 변명할 것이며, 무엇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style=\"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대제사장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 때에 우리 주님은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침묵의 의미를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생각하는 시간

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신앙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시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만이 나의 전부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고통, 사람으로는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바탕\'; TEXT-ALIGN: justify\">젊은 신부가 처절하게 고통하면서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

에 계십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권능자의 우편에 앉아계시지만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그 약속의 말씀은 신

성모독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과 함께 지금도 소망 중에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 있는 신앙, 생명력 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