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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나 한 사람과 조국 본 문 : 로마서9:1-5 설교일 : (광복절 감사주일) 설교자 : 권 다니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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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1907년에 작시한 “한반도가”라는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작곡자
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한반도의 수려함과 한반도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이 즐겨 불렀던
애국가이자, 독립군가였다고 합니다. 한반도가의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동해에 돌출한 나의 한반도야 너는 나의 조상 나라이니 나의 사랑함이 오직 너
뿐일세 한반도야 은덕이 깊구나 나의 한반도야 내 선조와 모든 민족들이 너를 의탁하여 성장하였구나 한반도야
산천이 수려한 나의 한반도야
물은 맑고 산이 웅장한데 너를 향한 충성 더욱 깊어진다 한반도야 역사가 오래된 나의 한반도야 선조들의 유적을 볼 때에 너를 사모함이 더욱 깊어진다 한반도
야
일월같이 빛난 나의 한반도야 둥근 달이 반공에 밝은 때 너를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다 한반도야 아름답고 귀한 나의 한반도야 너는 나의 사
랑하는 바니 나의 피를 뿌려 너를 빛내고저 한반도야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나라를 잃고 외국에 나가서 살면서 조국 한반도를 그리며 사모하였습
니다. 동해에 돌출한 우리 한반도, 우리는 이 한반도에 태어나, 이 땅에서 꿈을 키우며, 우리는 이 땅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
앙의 선조들처럼 조국을 생각하고 나의 피를 뿌려 이 땅을 빛내려고 힘써야 합니다. 우리 가락으로 편곡하여 부른 것이 있어 함께 감상하며, 작게 따라 불러보겠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9:1-5의 말씀을 중심으로 “나 한 사람과 조국”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1-2의 말씀을 나누지 않고, 함
께 기록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
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9:1-2) 사도바울이 지금 자기 마음에는 무엇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에게는
“큰 근심”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진심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
다.
지금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
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며, 성령 안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진실한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근심하거나 고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
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보면서 걱정하였습니다. 여러분,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얼마동안 걱정하다가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 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할 것 없이 그의 고통이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은 옛날 선지자 예레미야가 가진 고통과 같았습니다. 렘20:9
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만큼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핍박을 받아서 로마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으니, 로마의 보호를 받아야 살 것이라고 판단되어 황제의 재판을 받겠다고 그가 가진 로마의 시민권을 써먹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한 자들이 40여명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렇게 근심하며, 그치지 않는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까?
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
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믿어 구
원받기를 소원하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받은 소명은 이방인에게 선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선교하였지만,
자기의 동족 유대인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자나 깨나 유대인,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 민족,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원하고 싶었습니다. 집에 있어도, 길을 떠나
도 우리 민족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이방인들은 잘도 믿고
돌아오는데, 저들은 감격하여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데, 왜 우리 민족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구원받지 못하는가 하여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
다.
사도바울이 가진 그의 간절한 열망이 얼마나 컸으면 유대인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버림받아도 좋고,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 하)고 했습니다. 여기에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저주란 헬라어로 “아나데마”라고 하는데, 이 말은 파멸로 넘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곧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다보면 모세의 중보기도가 생각납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출애굽기32:31-32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다 지옥에 떨어지고 구원받지 못하는데, 나 한
사람만 구원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사실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
해도 나는 들어가야 하고, 다른 사람이 안 들어간다고 해도 나는 하늘나라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은 어느 한 순간도
생각할 수 없는 완전한 구원의 요소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끊어지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상태요,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마지막 38-39절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롬8:38-39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
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런데, 지금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누구나 어떤 감정에 북받쳐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끊
어지면 그것으로 영원한 저주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구원받아야 하고, 나에게 주신 구원을 빼앗아갈 수 없다고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나라와 민족
을 위하여 우리들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나라가 독립해야 하니, 논밭을 팔아서 독립군 자금으로 바치라고 하면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젊음과 시간과
물질을 바치라고 하면 바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고, 그런 말은 말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내가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도 먼저 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셨기에 더욱 유대인들이 먼저 믿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주신 특권들이 있었습니다.
4절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라고 했습니
다.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야곱의 다른 이름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야곱이 얍복강을 건널 때, 하나님을 이기고 받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성민이란 뜻입니다.
양자됨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의 장자라고 불렀습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4:22)라고 했습니다.
영광이 있
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위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졌으며, 그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과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언약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세웠습니다.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율법을 주
시며 언약을 맺었습니다. 다윗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의 자손 가운데 메시아가 나온다는 언약이었습니다. 예례미야에게 새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손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영원한 약속이었습니다. 이런 언약을 맺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람답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 속에 살아가라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들을 속박하고, 부자연스럽게 하고, 얽어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없고, 동물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 것도 사실은 은혜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막과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예배의 장소로 정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경배하고,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
다.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구약에는 수많은 약속들이 있는데, 그 모든 약속의 초점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절입니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사도바울이 지금 그렇게도 민족의 구원을 갈망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서 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
리 민족에서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것은 특권이요, 영광이요, 반드시 믿어 구원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만물 위에 계셔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 10, 11장에 계속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는다, 이방인들이 먼저 돌아오게 하여 시기 나게 하여 나중에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구원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소망을 버리지 않
았습니다. 반드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복절 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신앙심을 애국심으로 승화시킬 수 있
어야 합니다. 일제시대에 기독교인들은 다 애국자들이었고,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국자들은 거의 다 기독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주님도 장차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소리내어 우셨습니다. 눅19:42에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
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분명 예수
님은 만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태어난 유대인의 구원을 위하여 우셨습니다. 통곡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진정 평화가 무
엇인지 모르고 죽어가는 백성들, 돌아오지 않는 완악한 민족을 위하여 통곡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민족을 구원해야 합니다. 광
복절이 되었다고 하여도 민족의 영원한 문제는 말하지 않고, 적은 문제를 가지고 국론만 분열되고 있습니다. 한일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경색되어 있고, 남북관계도 북
한의 핵문제와 억지 주장에 막혀 한걸음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도의 아버지,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는 간디를 깊이 연구한 때
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하트마 간디라고 하는데, 마하트마라는 말은 ‘위대한 혼’이라는 말입니다. 인도인들은 간디를 마하트마라고 부릅니다. 그들에게 있어 태
양같은 아버지였습니다. 위대한 혼입니다. 그가 영국으로 유학 가서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식민지 국민으로 민족차별을 받아야
하였고, 많은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인도인의 고유한 옷과 터번을 쓰고 학교에 등교하므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놀림을 당하였으며, 심지어 같은 인도인 유
학생들로부터 영국 신사복을 입고 다니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나는 인도인이다. 인도인이 인도 옷을 입는데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냐, 영국 옷을 입는
다고 내가 영국인이 되느냐 영국 옷을 입고 영국 사람인체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간디의 기념 묘소는 세계 많은 정치인들
과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다녀가는 명소가 되었다. ‘라즈 갓’이라는 기념 묘소의 무덤의 화강암 벽에는 ‘간디의 망국론’이라고 알려진 ‘일곱 가지 사회악’이라는 그
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읽는 이들로 한번쯤 그의 간절한 애국심과 청렴결백하고 정직한 그의 생애와 사상을 음미하게 됩니다.
첫째,
원칙 없는 정치를 사회악의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두 번째는 노동 없는 부(富) 셋째는 양심이 마비된 쾌락, 네 번째 도덕적 가치 없는 지식, 다섯째 도덕성 없는 상
업, 여섯째 인간성 없는 자연과학, 일곱째, 자기희생 없는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자기희생 없는 종교라는 말에 찔림이 왔습니다.
우리는 광복이
된지 환갑을 넘기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의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간디가 외친 일곱 가지 사회악이야말로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을 그대로 지적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악의 으뜸이라는 ‘원칙 없는 정치’에서 ‘자기희생 없는 종교’까지 이것들은 망국으로 치닫는 우리의 질병이요, 연합과 성장을 가로막는 것으
로 반드시 도려내어야 하는 환부라고 할 것입니다. 간디의 주장이 어느 정부를 탓하고 어느 계층을 나무라기 위하여 인용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인
은 원칙에 따라, 노동자는 땀 흘려 일하므로, 그리고 우리 종교인들은 자기희생으로 나라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우리 모든 국민이 기본으로 돌아가서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므로 나
라를 사랑해야겠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의
롭게 살아야 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근면해야 합니다.
잠14:34에는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
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공의를 행해야겠습니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합니다. 그러나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의인 10 사람이 없어 멸망하였습니다. 죄인이 많기에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
하는 한 사람이 없어 멸망하였습니다. 렘5:1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
라고 하지 말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내가 바로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해야만
합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고,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나라,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나라, 세계에
서 가장 살고 싶고 여행하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고, 바울을 본받아 나라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 민족이 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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