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제목: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마 27:38-44절


\'성공시대\'라는 휴먼 다큐멘터리 드라마가 있습니다. 각 분야에서 성공한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인데, 이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거나, 눈에 보이는 뚜렷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때 이 프로그램이 의식있는 사람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성공적인 삶을 단지 외형적인 성장이나 가시적으로 나타난 어떤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한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느냐? 살지 못하였느냐?는 것을 우리는 외형적으로 드러난 결과들 속에서 찾으려는 경향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점점 확장시켜 나가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성공했다\'라고 말합니다.
좋?학교에 입학하면 \'이제 출세길이 훤히 보인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속에는 \'외적인 성장이 곧 성공적인 삶\'이라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이 교회 내에서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특히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를 향해서는 \'성공한 목사\'로 부르고, 외형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한 교회의 목사를 향해서는 물론 직접적으로 \'실패한 목사\'라고 말은 하지 않지만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성공의 기준은 외적인 요소가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성공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의 생애는 완전히 실패한 생애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외형적으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죄인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으로 생각하고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본문에 의하면 이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두 명의 강도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편과 우편에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둘 중, 어느 쪽에 있었던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집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오른편에 있었던 강도냐? 아니면 왼편에 있었던 강도냐? 하는 것을 가지고 거품을 물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른편이든, 왼편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연약한 자들 곁에 계셨습니다. 가난한자들, 병든 자들, 세리들, 이런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래 주님은 이 자리에 계실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는 영광의 보좌입니다. 이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곳이 예수님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주님은 강도들 사이에서 마치 강도나 된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만 보고 그분의 인생을 판단했습니다.

그 분을 통해 이루어질 위대한 구속의 사역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인의 괴수처럼 세 개의 십자가중 제일 가운데 달려 있는 예수를 쳐다보면서 그의 인생이 마치 실패한 인생인 것처럼 비아냥거렸습니다.

먼저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39절과 40절에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라고 했습니다.

실패한 듯 보여지는 인생을 향해 관대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외적으로 성공한 듯 보여지는 사람들에게는 관대하면서 실패한 것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모질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평소에는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돈을 빌리기도 합니다. 말만 잘하면 아무 조건 걸지 않고 빌려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업이 어렵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때부터 \"빌려간 돈 빨리 갚아달라\"고 야단입니다. 마치 그 돈 떼먹고 달아날 사람처럼 취급하면서 다그칩니다. 더러는 심한 모욕감을 느낄만한 말도 마구 해댑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레임덕\'이라는 단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권력 누수현상을 빗대어 쓰는 표현입니다. 왜 권력 누수현상이 나타납니까? 정권을 잡은 사람이 물러나야 할 시점이 다가오니까 새로운 권력을 향해 줄서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와 같습니다.

성공한 듯 보여지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 눈 도장 찍으려 하다가 실패한 것 같으면 가차없이 비판하고, 심한 모욕감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십자가 아래 지나가는 자들이 그랬습니다. 사실 여기에 지나가는 자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들이 이곳에 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지나가는 자들입니다.

원래 자신들이 가려고 했던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지나는 길에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것 같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에 대해 전혀 듣지 못한 상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뒷부분에서 그들이 했던 말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십자가 아래를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다고 해서 모두 신자는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그냥 구경만 합니다. 지나는 길에 잠시 재미있는 구경이나 하자는 식으로 그 아래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꼭 한마디씩 거듭니다.

한디씩 거들며 예수를 조롱합니다.
뭐라고 조롱합니까?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왜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만 하는지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 그들이 보기엔 예수는 영락없는 실패자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으로 그가 이루어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유대인의 왕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더욱 아닙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는 단지 죄수에 불과했습니다.

인생의 낙오자 내지는 실패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가차없이 예수님을 향해 욕을 해댑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턱대고 욕을 해댄 것은 아닙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기는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처럼 주님은 한번도 자신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였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불만이 있거나 불평이 있으면 말을 바르게 전하지 않습니다.
원래의 말에 자신의 생각을 첨가해서 그것이 마치 처음 있었던 말인 것처럼 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 불만이 있거나 불평하는 사람의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을 옮기는 과정에서 부풀리거나 아니면 자기의 말을 첨가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람들의 조롱하는 말 뒤에는 사탄의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너는 인생의 실패자야, 그 십자가에서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야\'라며 조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은 너무도 연약한 모습이며, 그것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는지 모릅니다. 십자가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력이 쇠하여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가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세상적 판단이었습니다. 사탄의 숨겨진 전략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는 주님인 것 같지만,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인생의 실패자로 매달려 있는 것 같지만, 그 십자가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실천장소였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자 아낌없이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신,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장소였습니다. 죄인을 위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장소였습니다. 실패한 듯 보이지만, 연약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죄로부터 인류를 구속하는 능력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만 보고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속의 역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보잘것없는 인생으로 치부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도 사탄의 음모에 휘말려 있습니다. 마치 세상적인 성공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간에 외형적인 성공을 거두어 보려고 분주하게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주장처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 달려가도 자신의 인생이 부족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 십자가의 그 위대한 사랑도 멀리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바울과 함께 사역에 참여했던 데마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데마는 바울을 도왔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울을 따라다니는 동안 많은 고난과 힘든 일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자신들을 따뜻하게 반겨준다거나 자신들의 수고를 알아주지도 않았습니다. 데마는 그렇게 사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어쩌면 데마도 바울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따라 다녀봐도 알아주는 이 없고, 걸핏하면 감옥에 갇히고, 심심찮게 매를 맞기도 하고, 이런 것이 무슨 성공적인 삶이냐? 라며 회의를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과 결별하고 그는 세상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몇몇 사람들에게 국한되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이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놀라게 만듭니다.

41절에서 43절을 보면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나가는 자들은 설령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를 보면서 이 말, 저 말,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기업화되었다\"거나 \"교회가 어려운 사람들의 삶은 돌보지 않고 자기들끼리 호위호식 하고 있다\"라고 말하거나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점점 타락해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교회가 그들의 비판처럼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은 교회의 아주 지극히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역에 대해 그들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여기에 나오는 이들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해 잘 아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헤롯왕에게 그리스도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예수가 단순히 강도와 같이 취급되어질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비아냥거리듯 주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가지 말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교회를 향해 무조건 비판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래선 안된다 저래서도 안된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려면 적어도 교회에 속해 있는 자신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비판을 해야 할텐데 남에게 책임을 다 떠넘기면서 자신은 아주 고결한 것처럼 교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여기에 나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은 예수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접촉해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많이 접촉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진 말에 동조하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노라고 하는 그들의 말이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왜냐하면 뭔가 보여주어야만 믿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뭔가를 보았을 때, 믿을 수 있다면 이미 예수님께서 여러 번 이적을 행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를 믿어야만 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폭풍을 잠잠케하고, 시각장애인을 눈뜨게 하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이런 일이 한 두 번이었습니까? 그들이 보는 것으로 믿으려 했다면 벌써 믿고도 남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기 전에 먼저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보여주실 때 믿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셨을 때,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였습니다.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의심하는 도마를 향해 주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주께서 하신 말씀을 신뢰함으로 가능합니다. 보고서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아도 실상은 믿지 않은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도 여전히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것 해 주시면 믿겠다\'고 말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 소원을 들어주시면 내가 결단을 하든지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겠노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이들의 생각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결론입니다.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말이 다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야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이 증명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고통 당할 것 다 당하고 그제서야 내려오겠습니까? 처음부터 아예 십자가를 지지 말 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내려오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매한 인간들의 요청일 뿐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요청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또 예수님을 향해 욕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강도들입니다. 44절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했습니다.

강도들도 예수는 자신들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주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향해 욕을 해댄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할 수 없다고 주님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까닭입니다. \'못하는 것\'과 \'하지 않은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의 생각으로 주님을 판단합니다. 내가 불가능하면 주님도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강도들의 생각이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도 아무것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른이들과 마찬가지로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 힘없이 인생의 실패자로 매달려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위대한 구속사역을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실패자가 아닌 승리자의 인생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성공적인 삶입니까? 어떤 인생이 승리한 인생입니까?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어떤 외적인 조건이 충족되어졌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주님의 인생도 실패요 그분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우리도 실패자들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온 인류를 구속하는 승리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를 믿고 의지하는 우리도 궁극적으로 승리자의 삶을 살 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성장이나 결과에 만족하는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십자가아래에서 주님의 구속사역을 온전히 바라보며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