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언제 오시나?
예수는 언제 오시나?/마 24:32-39
우리가 믿는 복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와 질병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것임을 믿습니다.
3) 우리는 그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심을 부활을 통하여 알려주신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습니다.
5) 그분의 재림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 예수께서는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십니다. 예수의 재림을 우리는 믿고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신다는 예수께서는 언제 오신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궁금한 부분입니다.
뱅겔 같은 이는 1917년 9월 17일에 재림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한국에 여러 사람들이 1900년대에 오신다고 예언한 바 있었습니다.
윔 말고(Wim Malgo)는 그가 쓴 성경의 『예언성취』라는 책에서 2000년대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림의 날을 예언하였으나 아직도 맞춘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듯이 재림의 날을 알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예언하는 사람들의 논리인즉
신랑을 만나는 결혼식 하는 날짜를 신부가 모를 리가 없다는 이론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1-5절에
그날에 주님은 도적같이 임하는데 깨어있는 자 빛의 사람들에게는 도적같이 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빛의 사람들은 그날을 안다고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누구도 그날을 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본문 36절에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이나 아들도 모르나니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신 말씀대로 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예수는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전지하신 분이어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모른다고 하였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7절에 제자들도 궁금하여 예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때냐고 물었을 때 우리 주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권한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재림하시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무화과 나무 비유에서 알아야 하고, 하나는 시대를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째, 무화과나무 비유에서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32절)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하시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무화과입니다.(렘 5:17, 8:13, 24:1-8, 호 9:10)
영적인 상징은 포도나무입니다. 종교적인 상징으로는 감람나무를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없습니다.
꽃이란, 부귀영화, 호화로운, 외적인 사치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화려한 일은 없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압박을 받고 시련을 겪는 민족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습니다.(마 21:19)
그 후에 주후 64년에 로마 황제 네로에 의하여 유대는 점령을 당하고
아그립바 2세를 유대의 분봉 왕으로 세우고 아그립바 2세는
폴로루스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유대총독으로 임명받은 폴로루스는 유대인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고 포악한 성질대로 자기를 반대하는 유대인 3,360명을 처형하였습니다.
이때 유대인 지도자들은 아그립바 2세에게 항의하였으나 묵살 당하자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로마 군인 300여명을 살해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로마 황제 네로는 베스파신안 장군에게 그 아들 디도를 대동하고 유대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 유대를 공격하게 하였고, 유대 장군 요세푸스(Josephus)를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디도 장군은 5만 8천명의 군사를 받아가지고 주후 70년 4월 유월절기를 지키는 유대 예루살렘을 총공격하여 주후 70년 8월 28일에 완전히 멸망시킨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실 때에 “그 피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4-26) 한대로 그 값을 지불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2000년을 방황하다가 이제 그들이 흥왕하고 있습니다.
즉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듯이 그들이 왕성한 시절이 되었습니다.
즉 무화과나무가 무성해지는 것을 보면 여름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뜻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왕성할 때에 종말의 때를 개닫고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죽음이 오는 것을 개인 종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힘이 왕성하고 무성할 때에 노년을 준비해야 합니다
둘째, 영적으로 노아의 때와 같은 때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최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나 질병도 있고 실패도 체험해야 합니다.
마음에 괴로움도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면 우리의 영과 육이 함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주님 만나고 영생 복락 상급을 받는 것 이보다 더 값진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신앙생활로 인하여 복 받으려 한다면 이방 종교도 그런 것을 다 말해줍니다.
아니 그들은 더 편하게 말해 줍니다.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도 마음대로 마시고 할 짓을 다하면서 복 받는다고 말하는데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나 예수믿는 기독교의 복은 다릅니다. 세상의 복을 누리는 것보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영원한 생명의 종교이고,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시는 영적인 축복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날을 기대하면서 바로 믿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그날이 언제입니까?
노아의 때와 같은 때라고 하십니다.
노아의 때가 어떤 때였나를 알려면 창세기 5장에서 7장을 상고해야 합니다.
1. 영적인 타락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6:3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체가 되었더라” 하였습니다.
시대는 번영을 누릴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함은 셈 계열의 후손들이었는데 이들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내면적인 경건을 본 것이 아니라 외모의 아름다움을 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 육적인 여인들에게 빠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창 6:2)
우리가 영적으로 바로 살려고 한다면 내가 좋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가정에서 아내를 보고 모든 것을 내 좋은 대로 하자고 하는 남편이라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좋은 대로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이것이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자는 것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신앙인들의 삶의 방법은 섬김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발을 씻기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섬기지 못하나요?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자기 좋은 대로, 자기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다 보니 육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타락입니다.
2. 하나님의 신이 떠난 시대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육적인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육체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에 말세의 징조를 말하면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는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하였습니다.
요즈음 사람들 중에는 진리를 듣지 않으려 합니다.
들어서는 유익이 없는 말은 잘 듣습니다.
허탄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유익이 없는 말을 의미합니다.
3. 문제는 생각입니다.
창세기 6:5절에 “사람의 죄악이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인간이 하나님의 신이 떠나니까 괴물 같은 인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각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사고 방식이 틀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거듭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화 되어야 합니다.
이 성화라는 것은 인간의 비뚤어진 사고 방식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연속되어질 때 사람의 생각도 생활도 달라집니다.
4. 결과는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더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치와 음란과 향락주의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먹고 마시는 것이 삶의 수단이어야 하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무슨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정당하게 남녀가 일남 일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여자를 택하고 남자에게 간다는 말입니다.
쉽게 이혼하고 쉽게 결혼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음란한 삶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5. 더욱 중요한 것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깨달을 수 있다면 좋은 것인데 그렇지 못 하더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잘못 되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유는 양심이 화인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보거든 인자가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통하여 시기를 알게 되고
노아의 때와 같이 되면 그날이 바로 주님이 오시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되어져 가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노아와 같이
1.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은혜 생활입니다.
창세기 6:8절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문화는 세상 사람과 같이 사는 것 같은데 다른 데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주신 은총과 총애를 받으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이 와서 복되게 살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라는 말이 구름이라는 말과 어근상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구름은 뜨거움을 가리워 줍니다.
구름에는 물을 담아 가지고 내려 줌으로 땅이 비옥해지고 풍년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해를 받지 않게 지켜 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계속적으로 시험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이라는 데 시험 쳐서 간다면 누가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은혜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시인하고 주님으로 영접하여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천국 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 은혜와 축복을 알고 그 은총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사람입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창 6:9)
주와 동행한다는 말은 삶의 목적이 주님의 뜻과 같다는 말입니다.
즉 방향이 같다는 것입니다.
목적만은 같아야 동업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세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동행하려면 마음이 같아야 합니다.
목적은 같아도 마음이 다르면 동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안 맞으면 오해가 생기고 불평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발걸음이 같아야 합니다.
한 사람은 빨리 가려고 하고,
한 사람은 걸음걸이가 늦어서 자기 생각대로 가면 동행이 안 됩니다.
말세 성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때부터 행복한 삶입니다. 주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바로 인도하여 주신 답니다.
3. 준비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노아의 생애는 방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왜 날마다 거기에 매달려 있느냐?
라고 조롱하였을 것입니다.
노아는 그날을 위하여 준비한 것입니다.
사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오랜 세월동안 그들에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그런 행동을 지켜보던 당시의 사람들은 다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할일 없으면 낮잠이나 자둘 것이지 이 때양 볕에 배는 무슨 배\'라면서 비아냥 거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노아의 말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비가 홍수가 되어 자신들을 덮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무엇을 말합니까?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날이 임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의 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심판을 말해도 그들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든 주님의 날은 반드시 그리고 속히 도래할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습니까?
40절에서 41절에 보면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밭을 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대로 내 버려둠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사람은 내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데려감을 받고 어떤 사람이 데려감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물론 궁극적으로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은 준비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밭에 있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데려감을 당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4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주님은 우리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버려둠을 당하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언제 오실지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비유를 본문에서는 도적이 오는 것에 비유합니다. 도적이 언제 올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적이 자기가 언제 갈 것인지를 말하고 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적의 본질은 몰래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44절에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이르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준비 된 사람입니다. 준비 된 사람은 그날에 웃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위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준비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회개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바른 준비입니다.
그날을 위하여 오늘을 바로 살아갑시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워집니다. 징조가 보입니다. 시대를 보세요.
말세의 징조대로 사랑이 식어집니다.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보세요.
세상은 온통 먹고, 마시고, 목욕하고 자고 음란하기가 노아 시대 못지 않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노아와 같이 은혜를 입고 마지막 때를 철저하게 준비하였다가
오늘밤에라도 주님이 오신다고 하더라도 마라나타 두 손 높이 들고 영접할 수 있고 공중에 들림 받을 수 있는 자격자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