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으 영성교회] 의인의 고난과 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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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인의 고난과 축복 의인의 고난과 축복 - 시편 22편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는 글 고난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끊이지 않는 문제이다. 보커(J. Bowker)는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불가피함을 말하면서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 울음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고난의 비참함을 우리에게 예고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 이 말처럼 고난은 인류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고난이 왜 오는지, 고난이 닥칠 때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마다의 이해가 다르다. 불교에서는 생(生), 로(老), 병(病), 사(死)를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늙는 것과 병과 죽음의 현실적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인간이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 한국인들은 이러한 인과응보적 사상을 가지고 모든 고난을 바라보기 때문에, 고난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인다. 고난을 받는 것은 곧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고난에 대한 이해는 사뭇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을 악인과 의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취시며, 비를 내리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마 5:45). 악인이라도 의인이 받는 것과 같은 형통함을 누릴 수 있고, 의인이라도 악인이 받는 것과 같은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구약의 수많은 의인들이 고난을 받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도 고난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도 동일하게 고난을 받을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롬 8:17). 이에 필자는 본 연구에서 의인이 왜 고난을 받게 되는지, 의인이 고난을 당할 때 이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는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에 대한 개념을 짚어볼 것이다. 그리고 시편 22편을 중심으로 고난에 대한 의미를 살펴본 후, 시편 22편을 다시 하나님의 삼중적 의(義)의 측면에서 고찰함으로써 고난의 의미를 도출해 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난 받을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며, 축복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본문 연구의 결과를 따라 제시한다. 2. ‘의인(義人)’의 개념 ‘하나님의 의(義)’란 무엇인가?3) 일반적으로 ‘의(義)’라는 개념은 도덕적, 윤리적 규범에 따라 사회통념상 옳은 일, 또는 인간으로서 정도(正道)를 걷는 일을 가리킨다. 하지만 성경에서 ‘의(義)’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일반신학에서 이해하고 있는 ‘의(義)’란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질을 말하며(시 4:1), 하나님의 법에 나타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에 대한 순응성을 의미한다(신6:25, 시119:121).4) 이에 반해 김기동은 ‘하나님의 의(義)’란 절대적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義)라는 말로서, ‘결코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은사’라고 표현하고 있다.5)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 하늘에 관한 것,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셔서 지금도 계속하시는 모든 역사를 의라고 한다. 그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제하면 의가 되지 않는다. 창세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한 모든 것과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을 포함해서 의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것과 그가 하시는 모든 것을 의라고 한다.”고 말한다.6) 결국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義人)’이라는 말의 의미도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다. 곧 하나님의 기준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義)가 있는 자가 의인(義人)인데, 성경에 나오는 ‘의인(義人)’이라는 말은 구약과 신약에서 그 의미와 관점이 확연히 다르다. 구약에서 말하는 의인은 품행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다(겔33:13~20).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은 외모로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7) 그러므로 구약의 의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기준대로 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 의를 사모한 사람이란 말이지 하늘에서 인침을 받은 사람이란 말은 아니다. 즉 그들은 하늘에서 의롭다 칭의(稱義)를 받은 것이 아니다.8)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거룩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다(마 11:11). 반면에 신약에서 말하는 의인은 품행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진 자를 말한다.9) 즉 신약에서의 의인은 교회 생활을 잘 하는 등의 행위를 가진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소유한 자를 말하는 것이다.10) 자기 의는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은 자이다(마 25:31~46).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예수로 옷 입을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약에서의 의인은 율법으로는 죽었지만, 믿음으로는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서 산 자들이며,11)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자들이다. 3. 시편 22편에 나타난 고난에 대한 이해 3.1. 본문의 배경 및 문학적 이해 시편 22편은 다윗이 지은 시로서, “영장으로 아얠렛샤할12)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즉,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지은 시이다. 그러나 사실 본문의 목적과 배경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이 시편 전체를 제의적 구조를 가진 것으로 파악하여, 기자가 극심한 병을 앓고 있으면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13)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라는 말은 앞에 나온 애가나 기도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기 때문에 기도 후에(19~21절), 이러한 돌발적인 확신의 선언을 하게 만드는, 치유와 건강을 알려 주는 예언의 선언이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14) 더 나아가 성전에 모여든 회중 속에 섞여서 제의 의식에 참여한 기자는 자신의 요청에 합당한 제사장의 예언을 기대했을 것이고, 이것이 위대한 확신을 선언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라 해석한다.15)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그 근거가 불확실하다. 본문은 다윗이 사울에게 박해를 받으며 온갖 수난을 겪을 때에 쓴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쓰여진 시편 22편에는 적어도 세 가지 종류의 다른 요소가 있다. ‘애가’(1~21절), 애가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기도의 요소’(11, 19~21절) 그리고 ‘찬양과 감사’(22~31절)이다.16) 본문은 다섯 단계에 거쳐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주님을 부르고, 둘째, 자신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애통하며 때로는 불평하고, 셋째, 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신앙의 확신을 고백하고, 넷째, 주님께 기도하며, 다섯째, 주님을 찬양하는 순서로 진행된다.17) 시편 22편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8) Ⅰ. 애가(1~21절 상): 병든 자가 그의 슬픔을 밝힌다. 1) 하나님과 인간에게 버림받음(1~10절) 2) 도움을 위한 기도(11절) 3) 고난으로 둘러싸임(12~18절) 4) 구원을 위한 기도(19~21a절) Ⅱ. 응답(21b절): 고난 받는 자의 믿음의 확신 Ⅲ. 감사(22~26절): 고난 받는 자에 의해 선포됨 Ⅳ. 감사(27~31절): 회중의 감사를 도출해 냄 3.2. 본문의 주석적 고찰 3.2.1. 하나님과 인간에게 버림받음 (1~10절) 다윗은 1절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라는 2중적인 부름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부름의 반복은 고난의 심도가 얼마나 깊은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의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하나님께 간절히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의뢰한 사람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 신앙이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 순간으로 보인다.19) 그래서 1절은 자칫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소리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김정준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라는 2중적 부름을 주목하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 두 마디가 탄식과 호소의 대상을 찾기 때문에, 그것은 탄식을 들어주는 ‘내 하나님’이 계시다는 신앙의 증거라고 주장한다.20) 결국 하나님과의 신뢰의 관계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낀 다윗은,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다. 그의 애타는 부르짖음은 2절에서도 이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신다. 침묵하신다. 사실 기도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인데, 이러한 상황이 다윗을 끝없는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다. 마틴 부버는 이에 대해 ‘하나님의 개기일식’(eclipse of God)이라고 표현하고 있다.21) 그러나 3~5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의지신앙을 보여준다.22) 6~8절은 원수들이 다윗을 조롱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입술을 비쭉인다거나 머리를 흔든다는 표현은 조롱할 때 하는 행동양식이며, 그들의 조롱 앞에 한없는 모멸감을 느낀 다윗은 자신을 벌레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들의 대적하는 말은 다윗의 마음에 심한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것 같고 인간들은 가까이서 조롱하고 있는, 모순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3) 그러나 여기 다윗을 조롱하는 원수들의 표현 속에서 오히려 다윗의 신앙을 확인할 수 있다. 8절에서 그들은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탁 한다’를 의미하는 ‘골’()은 ‘맡긴다’는 뜻으로24) 자신의 곤궁의 처지를 하나님의 손에 올려놓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25) 원수들의 눈으로 볼 때에도, 다윗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분명히 확인된다. 다윗은 9~10절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됨을 고백한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그를 견고히 붙들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더 확실히 느끼게 된다. 그럼으로써 다윗은 그의 모든 삶을 주께 맡겨 버리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3.2.2. 도움을 위한 기도 (11절)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멀리 하지 말 것을 위해 기도한다. 9, 10절에서 고백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끊지 말아달라는 것으로서 ‘멀리하지 마옵소서’라는 표현은 1절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1절에서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느낌에서 ‘멀리’라는 표현을 썼다면, 11절에서는 한층 확신에 찬 가운데, 그 하나님이 이제 가까이 다가오셔서 구원하여 달라는 간구이다. 무엇보다도 다시금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느끼기를 원하고 있다. 3.2.3. 고난으로 둘러싸임 (12~18절) 12~18절에서는 11절의 환난에 대해 비유를 통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은 대적들의 위협적인 자세에 대한 묘사(12~13, 16절)와 고난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공포에 대한 묘사(14~15, 17절)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26) 12절의 바산은 요단 강 동편에 있는 매우 비옥한 지역으로, 황소와 바산의 힘센 소들이란 길들여지지 않은 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나운 소들이다. 이러한 표현은 그 포악함이 비길 데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비유이다. 13절에서는 사자의 비유를 통해 원수들의 잔인성을 폭로하고 있으며, 14절에서는 이로 말미암아 다윗이 혹독한 고난 속에 탈진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어그러졌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는 ‘흩어지다’(scattered out)라는 뜻인데, 이 단어는 약탈자 무리가 희생자를 멸망시킨 후 각기 자기 몫을 챙겨가는 상황에서 사용된다.27) 14절은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연상케 한다.28) 15절에서는 이러한 육신의 고통을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16절에서는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모르는 ‘개’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무례한 약탈자가 다윗을 공격하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 당시만 해도 개는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로 도시 변두리를 떼 지어 어슬렁거리거나 뒤지고 다녔기 때문에, 성경에서 ‘개’라는 단어는 흔히 조롱이나 경멸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29) 한편 15절의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라는 표현은 비록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것들은 조롱하는 대적자들이지만, 그의 궁지의 근원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30) 3.2.4. 구원을 위한 기도 (19~21 상) 19절에서는 11절과 비슷한 간구가 다시 나온다.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의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 또 다시 동물의 비유를 사용하여 대적자들로부터의 구원을 요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2.5. 응답 (21절 하) 다윗이 의심을 가진 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간구하는 있음을 21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21절에서 다윗은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응락하시고’라는 동사는 ‘아나()’인데, 여기서는 칼형, 완료태로 쓰였다.31) 동작이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다윗은 주께서 응락을 하셨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32) 그렇기 때문에 22절부터는 분위기가 반전되고 전형적인 찬양시로 그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3.2.6. 감사 (22~26절)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던 다윗은 21절에서의 확신을 전제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규를 들으시고 응답을 주셨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여기서 찬양과 감사의 첫 부분은 하나님께 드려지고(22절), 나머지 부분은 회중 전체에게 주어진다(23-26절). 25절의 ‘대회’는 ‘카할 라브’()로서 ‘큰 군중’이란 말인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중을 가리킨다.33) 이 부분에서는 모든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거리낌 없이 털어 놓는 찬송과 감사가 다윗을 죽음의 자리에서 극적으로 일어서게 하고 있다.34) 3.2.7. 감사 (27~31절) 여기서의 감사는 개인적인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감사와 찬양으로 이끌고 있다. 27절의 ‘돌아오다’는 말은 ‘회개하다’라는 의미이다(겔 33:11). 그러므로 이 부분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제한될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 민족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35) 그래서 박윤선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열매로 모든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이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하였다.36) 그리고 29절에서는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한 자’ 즉 죽음을 모면하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절하라고 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죽음을 초월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세대들에게까지 증거 될 것이기 때문에 고난 받는 자의 죽음은 종말이 아닌 것이다. 3.3. 시편 22편에 나타난 의인의 고난에 대한 신학적 이해 시편 22편은 고난 중에 있는 다윗의 상황과 심경을 기도를 통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몸부림치며 기도한다. 그는 자신을 벌레라고 표현할 정도로, 사람으로서의 자존심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해 버렸다.37) 여기에 조롱자들의 핍박은 그의 고난의 깊이를 더해 주게 된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탄원의 기도는 감사와 찬양으로 마무리 된다. 다윗은 낙심할 만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음으로써, 위기를 극복하였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9~10절에서 다윗이 자신을 주께 맡겨버리는 고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난은 오히려 다윗의 신앙을 더 깊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하나님을 더 체험한 다윗은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던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고난에 대해 인과응보적인 면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즉 고난을 받는 것이 곧 저주를 받는 것과 동일하다는 논리에서 벗어나 오히려 고난을 통해 영적으로 더 유익한 점들을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 시편 22편은 분명히 다윗에게 있어서 사실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이다.38) 다윗이 당한 고난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지옥과 같은 고통을 받으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가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39) 시편 22편은 신약 성경에서 메시아의 수난을 전하는 텍스트로서, 인류의 모든 죄와 그 모든 책임을 홀로 지고 하나님과 사람과 이웃과 동료들과 부모에게서조차 완전히 버림받은 자로서의 메시야를 그려주고 있다.40) 결국 시편 22편은 궁극적으로는 본문이 예언한바 처절한 십자가 수난을 오직 우리 죄인을 위한 사랑으로 감내해 주신 예수의 사랑에 가슴이 뭉클하게 하며, 또한 예수께서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부활 승천하셔서 천국 구원의 산 증거까지 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영원한 부활 승리의 환희를 소망하게 한다.41) 4. 시편 22편에 나타난 삼중적 하나님의 의(義)와 고난에 대한 이해 지금까지 시편 22편에 나타난 고난에 대해 주석적 고찰을 통해 고난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시편 22편을 통해 살펴본 고난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고난을 부정적인 입장으로만 보는 것에서부터 긍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게끔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주었다. 오히려 고난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유익성에 대해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고난을 이겨냈을 때 그 주인공이 받게 되는 유익에 대해서는 신학적 고찰을 해 볼 수 있었지만, 왜 고난이 있게 되는 것인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시편 22편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삼중적 의의 틀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 회퍼는 고난의 유익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42) 첫째 자기를 그리스도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악마와 시험을 깨닫고, 둘째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기쁨을 깨닫고, 셋째 하나님의 집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는다. 이는 김기동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 설명하는 바와 유사한 관점을 지닌다. 김기동은 세 가지의 의(義) 개념을 성경에 나타난 세 영적 존재의 관계망을 통해 설명하는데,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의(제1의), 하나님과 천사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제2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제3의)가 그것이다.43) 여기에서는 시편 22편을 이러한 삼중적 하나님의 의의 측면에서 고찰해 볼 것이다. 곧 고난의 이해에 대해 제 3의 의(義)인 인간 구원 곧 죄의 대가라는 측면에서, 제 2의 의(義)인 마귀 진멸 곧 악한 영의 방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제 1의 의(義)인 아들을 위해서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측면 이렇게 세 가지 측면에서 시편 22편을 고찰하게 된다. 4.1. 제 3의 의(義)에서 바라본 고난 본 시편의 1~10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응답지 아니하신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2절 하반절을 헬라어 구약성경은 ‘나의 허물로 인해 나의 구원으로부터 멀어졌나이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맛소라 사본의 ‘샤아가티’()를 ‘세기오타이’(, 허물)로 읽고 있는 것이다.44) 아마도 다른 어떤 본문으로부터 번역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표현은 3절의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는 표현과 연계해 볼 때,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처지와 상황을 잘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3절의 ‘카도쉬’(, 거룩)는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할 때, 부정한 것을 미워하시며,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신다는 의미이다.45) 즉 죄로 말미암아 구원에서 멀어진 인간과 대비하여 하나님의 순수한 거룩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6절에서 기자가 자신의 모습을 ‘벌레’라고 표현하고 있는 데서 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더 나아가 9~10절에서 기자는 자신이 출생할 때부터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1~10절에서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를 지니고 태어나며, 바로 이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고난은 창 3:16~19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도 바울도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이 땅에 사망과 저주가 들어왔음을 언급하고 있다(롬 5:12~14). 또한 신 28장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할 때 임할 복과 불순종할 때 임할 저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로 인해 저주가 임한다는 인과응보적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폰 라드(G. von Rad)는 “고난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하는 사상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죄와 고난을 인과응보적으로 연결한 보편적인 사상이었다. 즉 하나님과 인간과의 내적 관계가 파괴됨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고난을 받게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은 각각 자신의 죄에 따라 다루어진다고 한 것이다.46) 그러나 이제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시 22:1의 탄식의 기도를 외쳤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로 다윗이 토로하였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을 처절하게 직접 경험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의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의인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자신이 갖고 있는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할 이유가 없어졌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형벌하실 의무는 없어진 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에서 바라본, 고난에 대한 이해이다. 기존의 신학적 이해에서는 고난에 대해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 가운데서 고난의 극복으로 말미암은 영적 유익을 말하지만, 속죄함의 대가로 부활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고난을 짊어지셨다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안다면(마 8:17, 벧전 2:24), 이 세상에서도 필요치 않은 고난을 감당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고 해서 고난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고난의 실체에 대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고난은 현실적으로 해소되거나 소멸된 것이 아니다. 죄의 세력이 팽배하여 있는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47) 또한 예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셨다고 하여 우리의 죄의 본성과 연약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죄를 지을 때도, 넘어질 때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의 죄 또는 연약함과 허물로 인해 우리에게 고난이 올 때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연약함을 담당하셨기에(마 8:17), 그로 말미암은 고난을 당할 때 이를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징계라고 봐야 한다. 징계가 없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잘못을 했는데도 징계가 없는 자에 대해서는 사생자 혹은 참 아들이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다(히 12:5~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 및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고난이요, 이러한 고난과 연단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시키시고(엡 4:13), 또한 우리를 더 훈련시키셔서 더 뛰어난 그리스도의 군사로 만들기 위함이며(벧전 1:7, 딤후 2:3~4), 결국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창 1:27). 즉 그런 고난들에서 하나님은 숨어서 일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인간의 교육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는 것이다.48) 4.2. 제 2의 의(義)에서 바라본 고난 본 시편의 12~21절에는 다윗의 대적자가 나온다. ‘황소’, ‘개’, ‘사자’ 는 모두 고대 동방 종교에서 악마적인 힘을 지닌 존재들이다.49) 18절에서는 이런 원수들이 겉옷과 속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지고 있다. 다윗이 미처 죽기 전인데도 그의 재산을 서로 나누어 가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대적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들에 대한 설명들이 온통 은유적이기 때문이다. 궁켈은 기자가 질병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의 제자인 모빙켈은 초기에는 시편의 고난당하는 자들이 원수의 마술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자로서 질병을 앓고 있다고 보았으나, 후기에는 주술론적인 해석을 버리고 역사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50) 그러나 궁극적으로 시편에 나타난 원수는 단지 우리를 괴롭히는 이웃이 아니라 사단과 그의 영향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므로, 우리는 영적 원수로 이해해야 한다.51) 마 13장의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보듯이, 원수의 역사는 지금도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의인들의 모든 죄와 허물은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셨고 우리의 모든 고난을 대신 담당하셨지만, 마귀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마귀와 그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 또한 불신자의 사후 영인 귀신들로 말미암은 고난이 있는 것이다. 홉킨스는 “많은 다른 면에서, 고난의 현상은 악마의 행위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난은 사단과 관련하여 설명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52) 그런가 하면 본 회퍼는 “크리스챤이 중병이 빠지거나 혹독한 빈궁에 빠지거나 기타 어려운 고독에 빠질 때에는 여기서 악마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53) 그 한 예로 욥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욥의 성실성에 대한 사단의 도전은 하나님에 의해 허용되어지고, 사단은 그의 재산, 자녀들, 질병 등으로 욥을 넘어뜨리려 하였다. 욥이 어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사단이 그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책략을 쓴 것이다.54) 김기동은 예수께서 요동치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는 장면에 대해서(막 4:35~41), 예수께서 바람을 다스리는 것을 귀신을 내어 쫓는 방법과 같이 하셨던 것에 주목하면서, 바람을 제어하는 방법과 귀신을 제어하는 방법이 같음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그는 “천재지변이나 사람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것 뒤에는 영적인 원수의 역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주기도문의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의 ‘악’에 대해서도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인격적 존재임을 강조한다.55) 결국 세상 신들은 저주받은 영들이기에, 그들이 반드시 인간을 괴롭히려고 들어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접한 인간은 세상 신의 특징을 따라 함께 고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56) 악한 영들은 방해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는다. 의인들 중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면서, 어떡하든지 넘어뜨리려 하고 있다. 그래서 의인일지라도 어느 순간 악한 영들의 방해로 쓰러질 수 있으므로(마 24:24, 막 13:22),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벧전 5:8~9). 4.3. 제 1의 의(義)에서 바라본 고난 시 22:21~31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나온다. 특히 27~31절은 회중의 찬양을 이끌어 내는 모습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앞부분까지 개인의 고난과 고난에서부터의 탈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이 부분에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면서, 열방의 모든 족속이 경배할 것을 외치고 있다. 더욱이 29절에서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감사와 찬양의 이유가 개인에게 고난을 극복해 준다던지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불행이 임하고, 고난 가운데 죽는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신본주의적인 입장이다. 개인에게 복을 주느냐 안 주느냐의 여부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심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 시편은 고난 받는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으로 보지 말고 좀 더 광범위한 견지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57)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존재요 예수의 길을 예비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살아야 한다. 주기도문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먼저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을 부른 후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고백한다. 즉 모든 기도의 가장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는 것이다(시 104:34, 9:2). 인간은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준비해 두신 그릇이다(딤후 2:20~21). 즉 그리스도에게 쓰이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다.58) 그러므로 우리의 본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는 고난이 닥쳐올 때, 이를 인간의 입장과 시각에서만 바라본다면,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으로 바꿔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고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요 9장에 나오는 소경의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예수에게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물어본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부정하시고 질병의 원인에 대한 물음을 제쳐놓으시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신다. 이 소경의 경우에는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가 세상을 위하여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할 목적이 있는 것이다(요 8:4~5, 12). 또한 요 11장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게 되자, 예수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4절)”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죽음의 극복에서 종말적-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핵심이다.59) 이 소경과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자칫 오해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서 눈이 멀게 태어나게 하셨다거나, 죽을 병에 걸리게 하셨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표현은 이러한 고난의 원인에서 바라보아야 것이 아니라 고난의 결과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결국은 이러한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욥은 하나님이 천군천사들 앞에서 욥을 위해 장담한 ‘영예의 말’을 손색없게 했다. 티끌 위에 던져진 욥은 ‘하나님의 영예와 자랑으로서’ 고난을 당한 것이다.60) 그러므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빌 1:29, 벧전 2:19~20). 성경은 이러한 고난을 받는 자를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으며(벧전 3:14~17), 이러한 고난을 받을 때 즐거워하고 자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벧전 4:12~16). 구약의 하나님의 종들의 고난이 예수의 고난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였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고난은 예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가 머리요 그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다(골 1:18). 그러므로 이제는 한 몸이니,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다른 지체도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더군다나 머리가 고난을 받았으니 그 지체들도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그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롬 8:17, 고후 1:7). 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자신을 따라오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마 16:25, 막 8:34, 눅 9:23; 14:27). 5. 고난에서 축복으로 : 시편 22편에 나타난 고난당할 때의 기도에 대한 제안 지금까지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왜(why) 고난이 있는가?’ 하는 것보다 고난이 닥쳐올 때에 ‘어떻게(how)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시편 22편에는 모범이 되는 기도의 자세들 몇 가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5.1. 부르짖는 기도 1~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신음하며,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다(렘 33:3).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적이 있다(눅 22:43~44). 이는 소리만 크게 지르라는 것이 아니고,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욜 2:13). 이러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9) 또한 어떤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기 전에 응답하시기도 한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 그러므로 고난이 닥쳐올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야 한다.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롬 8:6), 고난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시 147:5). 5.2. 솔직한 기도 시편 22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아뢴다. 때로는 도저히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게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할 때 어느새 우리의 마음 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나 원망이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원망이나 불평이 마음속에 있는 채, 외식하는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삼상 16:7). 겉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없는 척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보신다는 것이다. 기도할 때는 솔직하게 해야 한다. 본문에서 다윗은 원수의 공격에 대해서 고자질 하듯이 자세하게 아뢰는 것을 볼 수 있다. 25절에서는 오히려 그의 대적에 대해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라는 저주하는 것과 같은 표현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61) 5.3.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 그러나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모든 경우에 항상 이렇게 쉽게 응답을 주시지는 않는다. 침묵하실 때도 있다. 다윗에게 있어서 정말 답답했던 것은 그 상황 자체라기보다도 하나님께서 아무 응답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2절에는 이러한 다윗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한 것이다(잠 1:28). 그러나 다윗은 절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보여주었고, 이것은 우리 신앙의 본(本)이 된다. 우리의 기도가 막힌 것 같을지라도 거기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62) 침묵의 산을 넘어갔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도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를 더 깊이 만나 주신다. 4~5절에 보면, 다윗은 자신의 열조가 하나님을 의뢰했을 때 그들을 도운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도 과거에 조상들을 도우신 하나님을 붙잡았다. 어쩔 때는 기도가 상달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전혀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과거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기도에 신실히 응답하셨던 주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튼튼했던 관계가 어려울 때도 나를 붙잡아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강한 확신이 필요하다. 현실의 장벽과 출렁이는 파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평안할 수 있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도의 응답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아무 소리도 듣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굳건히 의지하면서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한다면(히 12:1)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하셔서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5.4.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는 기도 시편 22편의 초점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1절과 19절에 보면 ‘멀리하지 마옵소서’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다윗은 여기서 고난이 가까이 와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더 가까이 와 주실 것을 소원하고 있다. 다윗의 절규도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하는 느낌에서 나온다. 사실 기도할 때에 기도의 응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며, 이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6. 나가는 글 인류는 수많은 고난을 당하여 왔다. 악인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의인들도 고난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이러한 고난은 첫째로 나에게서 그 원인을 찾았을 때 나의 죄와 연약함에서 온다. 이는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신 지금,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은 고난은 저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연단과 징계로서 임하는 것이다. 둘째로 악한 영에게서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대적함으로 물리쳐야 하는 고난이다. 마지막으로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고난을 나에게도 나누어 주시는 것으로서 큰 축복이다. 이러한 고난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데 있어서 귀하게 쓰임 받는 것이다. 고난을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과 더 친밀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시 42:1).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될 때 그의 고난도 해결되고 대적의 공격도 파하여질 것이다(렘 15:15~21, 요삼 1:2). 우리는 오히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된다. 오히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고난을 통하여 축복하시려 함인 것이다. 고난의 과정은 우리를 더 깊은 그릇으로 만드는 과정이요 진정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져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이 올 때에 오히려 정면으로 고난과 맞부딪쳐야 한다. 독수리는 새끼를 훈련시킬 때 특수한 방법으로 시키는데(신 32:11), 나는 훈련이 다 끝나면 마지막 단계로 특별히 비바람이 치는 날을 택해 새끼와 함께 폭풍우 속을 나르게 한다. 이 때 독수리는 바람을 정면으로 상대하여 가야 한다. 그럴 때 마침내 구름 위에까지 올라가서 비바람도 없고 광명한 햇빛이 빛나는 창공을 유유히 나르게 된다. 고난이 올 때 두려워하지 말고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며(벧전 4:16),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해야 한다(벧전 4:13). 우리는 영생을 바라보아야 한다. 고난도 영생을 바라볼 때 그 가치가 있고 견디어 낼 힘이 있다. 영생이 없다면 고난이 반가울 이유가 없으나, 영생을 위하여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한다.63)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이 많이 있겠지만 이러한 싸움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여서 그 날에 주께서 예비해 놓으신 의의 면류관(딤후 4:7~8), 생명의 면류관(계 2:10, 약 1:12), 영광의 면류관(벧전 4:1~4)을 얻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