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소유

생명과 소유
 권 다니엘 목사  08 06:02 | HIT : 137 | VOTE : 4 |
  ☐ 생명과 소유 (1155)  눅 12:13-21     061008

1. 사람에게는 누구나 소유욕은 다 있습니다.
 인간에게서 가장 강한 욕망이 바로 이 <소유욕>입니다.  
누구에나 이것은 공통적인 본능이라고 봅니다.
아름다운 것, 귀한 것, 선한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유욕도 하나님이 만든 본능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그 욕망이 지나칠 때 탐심(貪心)이 됩니다.
탐심이란 분수를 넘어선, 경계선을 넘어선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탐심은 죄를 낳게 된다고 했습니다.
☞ 성경에도 이 탐심에 눈이 어두워 범죄 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계하시>와 <아간>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게하시는 아람왕의 사례를 거절하는 엘리아의 눈을 속여 물질을 탐냈다가 문등병이 걸렸고,
아간도 여리고성이 불탈 때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어리에 탐이나 몰래 집에다 숨겨놓았다가 그로 인하여 죽게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십계명에서도 바로 이 탐심을 범하지 않도록 명령했습니다.
타인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타인의 집이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깨질 때 창조의 질서가 깨지고, 사회적 질서와 평화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2. 소유욕 중에 물질에 대한 욕망이 매우 강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를 벌면 만족하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 질문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없을것입니다.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는 만족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벌면 벌수록 더 크게, 더 많이 벌려는 것이 인간의 상정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풍부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또 다른 탐심이 생깁니다. 그 탐심에 걸려 넘어간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 다윗은 왕위에 올라 나라가 평안해 졌을 때, 타인의 아내를 보고 탐내게 되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말처럼, 없는 것이 없이 다 가지고 있는 부잣집에 손님이 왔으면 자기것으로 얼마든지 대접할 수 있었는데도 그 고을에 가장 가난한 과부의 애지중지하는 양을 뺏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왕이라면 무엇이 부족해서 남의 아내를 탐낼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살인죄를 지었고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움을 당하였는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륜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은 죽었고, 자기가 죽은후 통일되었던 나라는 두 나라고 갈리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소유에 대한 가치관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 본래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 인간은 빈 벌거숭이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 단지 살아 생존해 있는 동안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 소유권은 없고 사용권만 있습니다.
 창조 주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다 가는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데도, 모두 자기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 권력을 소유하면 더 큰 권력을 잡으려고 합니다.
한번 잡은 권력은 놓지를 않으려고 합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내다가 결국 죽는 것을 보게됩니다.
☞ 지금 북쪽의 정권이 바로 그런 꼴입니다.
백성들을 굶어죽게 하면서도 잡은 권력을 놓지를 않으려고 합니다.
결국 그 권력욕으로 망하고 죽게될 것이 뻔합니다.

 이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그런 말이 귀에 들리지 않고 있기에 결국 재물로인하여 영적 사망선고를 당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소유욕 때문에 신앙의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 소유와 생명은 별개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삽니다.
21세기의 과학물질 문명사회를 이룬 인류가 당면한 문제가 바로 이점입니다.
☞ 요즘 나라마다 소유를 생명보다 더 크게 보는데 비극이 있습니다.
소위 에너지 확보를 위해 나라들 마다 무한경쟁에 들어섰습니다.
정신적 가치보다(종교, 도덕, 윤리, 양심) 누가 더 많은 부(富)를 축적하느냐에 만 관심을 둡니다.
☞ 대학들도 바로 이것을 위한 노력들뿐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면서 인문학을 다시 살려야 한다는 교수들의 성명이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먹고,누리고, 즐기는 데만 관심을 둡니다.
그 결과 창세기 6장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연애함으로 그들이 육체가 되었더라’는 말처럼 모든 가치는 육체를 위한 부의 축적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 이것이 얼마나 잘 못된 착각입니까?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생각입니다.
자기의 소유로 그는 영혼까지 편히쉬자고 하였습니다.
영혼은 결코 소유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그것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와는 관계가 없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더 큰 창고를 지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에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에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 소유가 뉘것이 되겠느냐?’ 고 했습니다.
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밤입니다.
오늘밤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밤입니다.
오늘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일 아침 더 큰 창고를 지으려고 고민합니다.
내일은 내일이요, 오늘밤은 오늘입니다.
그렇다고 내일의 꿈을 접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질의 소유만을 위한 내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 저는 이번 추석절에 임진각을 다녀왔습니다.
해마다 북녘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북쪽의 부모님을 생각하며 더 이상 갈 수 없는 임진각에서 <망배단>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절에는 웬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행사장에 나타난 노인들이 예전과 같이 많지 않았습니다.
모두 1세들은 거의 다 돌아갔고, 몇몇 노인들은 자녀들의 부측을 받으며 한 없이 북녘하늘을 바라다 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 그러면서 생각해 본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세상의 모든 것들, 부귀영화, 호의호식, 고대광실(高臺廣室),
다 무의미하게 없어질 것 들이란 생각뿐이었습니다.
 결국 소유라고 가지고 있던 것 모두는 낡아지고, 없어지고, 날아가 버리는 것들이란 것을 절감해 보았습니다.
 솔노몬이 아마 그래서 해 아래 모든 수고가 헛된 것 뿐이라고 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에게 최후까지 남아있는 것은 영혼의 본향 뿐입니다.
그러므로 너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습니다.
너의 소유로 하늘나라에 투자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위해 쌓았던 모든 것은 살아지지만,
하늘나라에 쌓아둔 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어린 소자에게 한것까지도 다 기억해 두겠다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해야지, 내 이름으로 한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지금부터라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 요즘 저는 복음성가 순례자의 노래가 가슴에 와 닿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아득한 나의 갈길 다간후 저동산에서 편히쉴때,
내 고생하던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 내주 예수 날사랑하사 늘 지켜 주시리’

친구 목사님이 내가 이제 현직에서 그만둔다고 메일을 보내오면서
이 복음송을 깔아 보내주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 지면서 젊어서는 도무지 느끼지 못했던 진한 감동이 이 가사속에 담겨 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 인생길은 정말로 아득한 한 평생의 길입니다.
그 인생길에서 목회생활에 고생했던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이제 빈들이나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괴로움이 있을지라도,
내 주예수 날 사랑하사, 늘 지켜주시리...
믿음으로 살아갈 것 뿐이란 절절한 노랫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소유한 것이 지금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 소유의 넉넉함이 우리의 영혼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주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고 하였지만 부자청년은 근심하며 예수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그 청년이 소유가 많음으로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오늘 내 모습이 그런 모습은 아닌지....
내가 가진 소유 때문에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아닌지....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소유 때문에 주님을 떠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